■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건원릉 참봉 이봉남 묘지명. 묘갈명.

야촌(1) 2009. 1. 6. 21:19

26世 이봉남『李鳳男,1537년(중종 32) ~ 1593년(선조 26)』

이몽윤(李夢尹)의 손자임.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이군(李君)의 묘지명/26世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이서중 봉남(李瑞仲鳳男)은 나의 죽은 종형(從兄)  안복(安福)의 아들이다. 형은 강개한 성품에 학문을 좋아하여 가정(嘉靖) 연간에 명성이 있었다. 고(考)는 몽윤(夢尹)으로 우리 백부(伯父)인데,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사도시 정(司䆃寺正)으로 졸관(卒官)하였고, 또 그 고(考)는 예신(禮臣)으로 우리 조부(祖父)인데,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다.


우리 이씨는 경주에서 나왔는데, 휘 알평(謁平)이 혁거세 때를 당하여 익대(翊戴)의 공이 있었고,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 서중은 정유년(1537년(중종 32)에 태어나서,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2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계조모(繼祖母) 조씨(趙氏)가 어질고 훌륭한 행실이 있어 그를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렀다.

 

16세에 이르러 비로소 학문할 줄을 알아서 개연히 도(道)를 구할 뜻이 있어 《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등의 책을 모두 가져다가 열심히 읽어서 그 요점을 대략 알고, 당세에 명성 있는 선비들과 두루 교제하여 귀취(歸趣)를 넓혀서 마침내 과거(科擧)의 학문을 싫어하였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는 조모(祖母) 및 계부(季父)를 섬기면서 효도와 공경을 극진히 하고, 충주(忠州)와 포천(抱川) 사이를 왕래하면서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가니, 향당(鄕黨)에서 모두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당시 금상(今上)이 한창 문학을 진흥시키면서 초야의 선비들을 낱낱이 찾아서 거용하는 일을 한 해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서울 및 충주ㆍ포천 두 고을의 향인(鄕人)들이 군(君)의 학행을 서로 천거하여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 후 임진년 난리 때에는 사잇길로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계사년(1593년(선조 26). 12월에 작고하니, 향년이 67세였다. 군의 아내는 판관(判官) 맹숭선(孟崇善)의 딸이다. 세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지하(支厦)는 일찍 죽었고, 그 다음 경하(擎厦)는 음보(蔭補)로 우봉 현령(牛峯縣令)이 되었고, 그 다음은 대하(大厦)이다.

 

[자료문헌]

◇백사집 제2권 >묘지(墓誌)

 

[原文]

李瑞仲鳳男。余之亡從兄安福子也。兄慷慨好學。有名嘉靖間。其考曰夢尹。吾伯父也。明經及第。卒官司䆃寺正。又其考曰禮臣。吾祖父也。成均進士。我李出慶州。有諱謁平。當赫居世時。有翊戴功。由新羅及高麗。連世有人。瑞仲生於丁酉。九歲。喪其父。二十二。喪其母。繼祖母趙。賢有行。取養如己出。至十六。始知學。慨然有求道之志。悉取小學,心經,近思錄,朱文公家禮等書。伏而讀之。略知其要。遍交當世知名之士。以博其歸趣。遂厭科擧之學。入而事祖母及季父。克孝克敬。往來忠州,抱川間。治田自資。鄕黨服其義。時今上方興文學。搜羅林下。擧無虗歲。於是漢京及忠,抱二邑之鄕人。交薦君學行。除禧陵參奉。壬辰之亂。間道詣行在。又除健元陵參奉。癸巳十二月卒。得年六十七。其妻。曰判官孟崇善女。三子。長支廈。早世。次擎廈。蔭補牛峯縣令。次大廈。君弱外而剛中。平居與人處。訥訥若言不能出。見人非違。輒析理抗議。談辯鋒生。一座盡傾。與余爲莫逆交。忘年與族序。常冀緩急有所樹立。位卑而名埋。其必有待。

 

白沙先生集卷之二 / 墓誌

--------------------------------------------------------------------------------------------------------------------------------------

健元陵參奉李公墓碣銘 八月晦日 / 南溪 朴世采

 

公諱鳳男。字瑞仲。月城之李。世爲東方大族。有諱謁平。翊戴羅祖。是其鼻祖也。曾祖諱禮臣。上庠。祖諱夢尹。司導寺正。考諱安福。隱德不仕。公少孫。未幾母夫人又歿。繼祖母趙氏憐之。撫養如己出。十六歲始知爲學。慨然曰吾旣失父母。苟不力學自立。非人也。遂取小學近思錄及諸先儒書誦讀。輒提其要。遍交當世有識之士。以博歸趣。最與宋龜峯翼弼,鄭松江澈,金沙溪長生諸公友善。間游館學。力論妖僧普雨罪。又疏救松都儒生破淫祠者。時議快之。其疾惡持正類此。旣而棄擧子業。往來抱川忠州間。力田行義。事趙夫人及叔父某克底孝敬。鄕黨稱服。於是中外交薦公學行可用。命除禧陵參奉。未幾趙夫人卒。公哀悼特甚。持制一如文公禮。且結廬墓側。手具饋奠。不釋衰麻以終喪。壬辰上西狩。公聞變。間道跋涉。奔問行在。朝廷嘉之。將大用。旋除健元陵參奉。以萬曆癸巳十二月二十二日辛未卒。距其生嘉靖丁酉。壽五十有七。葬于抱川楸谷負艮之原。從先兆也。配宜人孟氏。父曰判官崇善。後公三十一年歿祔焉。子三人。長支廈早世。次擎廈縣監。次大廈武科郡守。諸孫男女幾數十餘人。公天分卓異。外和內剛。讀書勤學。未嘗少懈。與人處訥訥若不能出口。及見非違。正色析理。議論風生。衆莫能屈也。每以不逮親養爲至痛曰。要當不敢毀傷遺體耳。又曰持身敬人亦敬之。不敬人亦賤之。父母榮辱係此。其可忽耶。追慕謹身。常若不足。明宗之喪。五月疏食。三年不飮酒。及倭寇作。見國事顚危。益自慷慨。以至流涕。觀者易容。嘗交李潑兄弟。見其盛稱栗谷李先生道學。未幾黨論起。反肆醜詆。公遂責而絶之。歿後九十四歲。曾孫惟材以公從祖父白沙公所爲誌來請銘。銘曰。

名不必聞。惟實之專。學不必華。惟行之全。其修在人。其用在天。庶幾斂斯。以俾後延。有覺沙翁。載闡其賢。我銘于石。永眎千年。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七十四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