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개립(李介立) - 제정공파

야촌(1) 2010. 8. 1. 03:49

■ 충(忠)과효(孝)를 실천한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

 

  글쓴이>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이개립(李介立, 1546~1625)의 자는 대중(大仲)이고 호는 역봉(櫟峰)또는 성오당(省吾堂)으로 경상도 용궁현(龍宮縣) 대죽리(大竹里)에서 아버지 이해와 어머니 예천 권씨(醴泉權氏)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경주이씨는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 신화에 등장하는 이알평(李謁平)으로부터 시작된다. 신라 6촌 가운데 양산촌(楊山村)의 촌장이었던 알평이 알천(閼川) 가에 나타난 신이(神異)한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도와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좌명대신(佐命大臣)에 오른 뒤 유리왕 8년에 이르러 이씨(李氏)의 성을 하사받아 경주이씨 가문은 이후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다.

 

이개립의 선조는 고려 말 제정(霽亭) 이달충(李達衷)에 이르러서 모습을 나타낸다. 동북 지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이달충이 개경으로 돌아오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인 환조(桓祖)가 그를 전별하였는데, 이 때 이성계가 환조의 뒤에 서있는 것을 보고 그 역시 일어나서 이별주를 나누었다.

 

훗날 이성계는 이 일로 인해 이달충의 자손들로 하여금 이름 가운데 일어섰다는 뜻의 ‘입(立)’자를 쓰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 이달충의 손자 이흥적(李興啇)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계림군(雞林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로 남부령(南部令)을 지낸 이숙정(李肅靖)이 이개립의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는 대호군(大護軍) 이욱(李昱), 조부는 부호군(副護軍) 이선동(李善童)인데, 조부대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 용궁현(龍宮縣) 대죽리(大竹里)로 이거(移居)하였다.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이해(李?)이며, 어머니는 예천(醴泉)의 대성(大姓) 권례(權禮)의 딸이다.

 

효행으로 천거되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을 비롯한 인근 선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어려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과거에 대한 뜻을 버리고,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이 담긴 경서의 연구에 전념하며 실천궁행(實踐躬行)에 노력하였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특히 정유재란의 와중에 무함을 입고 낙향한 뒤로 강학에 힘쓰며 문인들의 양성에 힘을 기울여 집안에는 늘 제자들의 신발이 가득히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제자로는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를 비롯하여, 조함일(趙咸一)· 이양(李崵)· 박수약(朴守約)· 박수검(朴守儉)· 이홍경(李弘經)· 채이복(蔡以復) 등이 있었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된 이개립은 이듬해 부친이 병들자 밤낮을 곁에 모셔두고 하늘에 빌고,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가늠하며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기를 무릇 6개월을 한결 같이 했다. 부친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사흘이나 식음(食飮)을 끊고 무덤아래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을 시묘(侍墓)했는데 그의 건강을 염려한 맏형 이중립(李中立)이 억지로 권하여도 뜻을 거두지 않았다.

 

복을 마치고 나서 3개월동안 혼자 산사(山寺)에 기거하다가 돌아오자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관(官)에 알렸다.

관에서는 다시 감사(監司)에게 알리려하자 이를 듣고, 그는 자제를 보내 자신의 효행에 대한 표창을 저지시켰다.

부친상을 마친 뒤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천 금곡당(琴堂谷)으로 이사하여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1586년(선조 19) 이개립은 탁월한 효행을 이유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재랑(齋郞)에 올랐지만, 홀어머니와 떨어져 지낼 수 없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이미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같이 정성을 다하여 상례를 치른 뒤, 1591년(선조 24)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경상도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제수되자 비로소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들은 죽는 것이 도리이다.”라고 말하며 지역의 선비들과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의주(義州)에 피란해 있던 선조가 교서(敎書)를 보내어 그의 충의를 기려 격려했다.

 

그때 명나라에서 원군(援軍)와 군량이 걱정스럽고 백성들이 굶주려 주검이 길에 깔리는 처참한 상황에 구호할 길이 없자 감사(監司)는 대규모의 둔전(屯田)을 일으켜 곡식을 충당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주관할 만한 인물이 마땅치 않았는데 성오당이 이를 맡아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 땅에 가서 곡식 종자를 구해다가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

 

1594년(선조 27)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고 이듬해 낭천 현감(狼川懸監)에 발탁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산음 현감(山陰懸監)에 발탁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때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김경서(金景瑞)가 미천한 지체로 발신하여, 여러 고을에 위엄을 세우려 하자 성오당은 그의 행세를 좋지않게 여겨 멀리햇는데, 김경서가 마음속으로 성오당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1597년(선조 30) 김경서의 군사가 황석(黃石)에서 무너지자 체찰부 종사관(軆察府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이 성오당으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을 삼았다. 성오당이 사양하다가 나가, 드디어 정예(精銳)를 모아 적을 막았는데 모든 사로잡은 적이며 베인 것은 김경서에게 보고하지 않고 의병장에게 보고했는데 이에 김경서가 크게 노하여, 장령(將令)을 무시한다는 무함으로 장계(狀啓)햇다.

 

일이 장차 불측(不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승지(承旨) 한준겸(韓浚謙)이 적극 주선하여 큰 화(禍)에 미치지 않고, 선조가 벌미(罰米)를 물리도록 처결하자 조정의 관원들이 봉록(俸祿)에서 나누어 도와줌으로써 벌미를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주의산서원(榮州 義山書院)

 

「상산사회(商山四會)」를 만들다.  

 

이로부터 그는 세념(世念)을 끊고 수 십년 문을 닫고 지내면서 시국이며 정치에 관한 말은 전혀 입에 담지 않았으며, 문도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함에 심력을 다했다. 「상산사회(商山四會)」를 만들어 좋은 계절을 만나면 시주(詩酒)로 회포를 달래면서 자연속에서 유연자적(悠然自適)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는 광해군(光海君)때 세상이 몹시 어지러워지자 암울(暗鬱)한 심회를 누를 길이 없어 때때로 한숨을 내쉬곤 했는데, 주위의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리는 이가 없었다. 성오당은 예천 용궁 대죽리(龍宮 大竹里)에서 태어나, 예천 금당실(金堂)·안동 감천(甘泉)에 우거하다가 만년에 영주(榮州) 갈미(葛山)에 자리잡고 살았다. 

 

1625년(인조 2) 몸이 많이 불편함을 느껴, 한 수의 시로 감회를 읊고, 친구들과 결별하고 이튿날 저녁 손수 글 몇 줄을 써놓고나서, 자제들에게 술 한 잔씩을 마시게 하고는 「오랜 시일 병간호하기에 수고들이 많았구나…….」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니 향년 80이었다.

 

성오당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으로 위기(爲己) 실천의 도학(道學)에 전념하여, 영달(榮達)에 뜻을 두지 않고 날로 옛 성현의 글을 읽으며 실행에 힘썼다. 그는 학문에 깊고 행실이 높아갈수록 겸허하여 알려지기를 피했으나, 차츰 성망(聲望)이 높아 자주 벼슬에 임명되었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는 그의 행장(行狀)에서 이른바 「…덕행(德行)을 닦으면 벼슬은 저절로 얻게된다고 함이라. 어찌하리,

 

첫째 불행으로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일에(큰 인재를 낮은 벼슬자리에) 잠시 시험했으나, 흉한 장수(김경서를 가리

        킴)무고함에 걸린 바 되었음이요, 

 

둘째 불행으로 광해군때는 정사가 어지러워 오랫동안 자취를 숨겼음이요,

셋째 불행으로 광해군이 쫓겨나자 곧 80고령이라, 일찍 지닌 바 포부를 펴볼 길이 없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

         랴…」라고 못내 개탄했다. 성오당은 제사를 받들때 차림을 풍성히 하기보다 정성으로 정결히하는데 힘썼으며, 나이 많아 제사에 절을 할 수 없게 되어서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엎드려, 살아있는 이를 받들듯이 한결 같이 정성을 다해 극진히 했다. 

 

그는 또 장인을 봉양함과 그 장례와 제사를 어버이와 한 가지로 받들었으며, 조모 상사에도 3년 동안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고, 그 형이 죽자 그 집 살림을 맡아 꾸려가면서 그 자녀를 친자식처럼 거두어 모두 성취시켰다. 

 

일찍 서울에 머물면서 스승 학봉의 집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만났는데, 함께 있던 사람들이 다 자리에서 피해버렸으나, 성오당은 혼자서 읍(揖)으로 인사하자 판서가 이상히 여겼다. 

 

돌아가자, 학봉은 그에게 「군이 나를 위해 낯을 내주었네.」라고 칭찬했다. 후진을 가르침에 각기 그 재주를 따라 독실히 깨우쳐 그 문하에서 성취한 이가 많았다. 일찍 감문현(甘文縣)에 우거할 때 배우려는 선비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빈 골짜기가 마을을 이룰 지경이었다.

 

후학들이 ‘봉산서당(鳳山書堂)’을 세우고 유계(儒契)를 맺어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다. 그는 재물에는 담박하고 분명했으니 그 장인 민 진사(閔 進士)가 큰 장토(庄土)를 그에게 주었는데, 그 곡물은 어버이를 봉양함에 쓰고, 여유의 곡식이며 재물은 불쌍한 이들을 위해서 흩었으며 빚문서를 불살라 버렸다.

 

양서(瀼西) 이광윤(李光胤 : 부제학을 지냄)이 고장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성오당의 행덕을 글로써 관에 알림으로 하여, 예조(禮曹)에서 임금께 아뢰어 표창하기를 청했는데, 이괄(李适)의 반란이 있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원종훈(原從勳)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저서에 『성오당문집(省吾堂文集)』이 있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행장(行狀)을 짓고, 용주(龍州) 조경(趙絅)이 묘명을 지었다.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부인은 영천민씨(榮川閔氏)로 진사 민운서(閔雲瑞)의 딸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휘음(李徽音)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으나 일찍 죽었고, 2남 이희음(李希音)은 진사였으며, 사위는 진사 김소(金韶)이다.

 

이휘음의 아들 이숭언(李崇彦)과 이상언(李尙彦)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영주의산서원(榮州 義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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