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양생(李陽生)

야촌(1) 2010. 7. 28. 01:15

■ 이양생(李陽生)

    [생졸년] 1423년(세종 5)∼1488년(성종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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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군수 종직(從直)의 아들이다.
 
공은 서얼(庶孼)로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신을 삼아 저자에 내어 팔아 생활을 하였고, 비록 책은 읽지 못하였으나 무예(武藝)에 능하여 장용위「壯勇衛=조선시대 중앙군의 하나인 충무위(忠武衛=後衛)에 소속 된 병종」의 군졸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하여졌으며, 충의교위「忠毅校尉=조선시대 무신의 정5품 하계(下階)의 품계명」 행호분위(行虎賁衛) 중부사직(中部司直)으로 겸사복(兼司僕=국왕의 경호원)이 되었다.


서얼출신이기 때문에 자급(資級)이 가선대부(嘉善大夫=從二品)에 이르렀으나 한번도 현직(顯職)에는 등용되지 못하였고, 평생 겸사복으로 있으면서 포도장으로 도성 내외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도적 소탕에 공을 세웠다.


그중에서도 관악산 일대에 둔취(屯聚), 항거하였던 고도(古道)· 김말응(金末應) 등의 소탕과 충주의 수리산(愁里山), 여주의 강금산(剛金山) 도적들을 소탕하여 큰 공을 세운 것이 유명하다.
 

평생을 겸사복으로 지냈으나 불평 한마디 없었고, 옛날 자신이 신발 장사하던 저자[시장]를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옛 친구들과 땅에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가곤 하였다 한다. 향년 66세로 그가 죽으니, 사제(賜祭=임금이 신하가 죽었을 때, 칙사를 보내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주던 일)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그는 아들을 두지 못하였는데, 적형(嫡兄=정실부인에서 난 형)인  길상(吉祥)의 아들 오(晤)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참고내용]

 ◇世祖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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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성군 이양생(雞城君 李陽生의 卒記)

    성종 19년 무신(1488) 4월 8일(신축)

 

계성군((鷄城君) 이양생(李陽生)이 졸(卒)하니, 사제(賜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양생은 경주인(慶州人)으로, 군수(郡守) 이종직(李從直) 비첩(婢妾)의 아들이다.

 

처음에 장용위(壯勇衛)에 속(屬)하였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에 졸오(卒伍)로서 종정(從征)하여 공(功)이 있었으므로 정충 적개 공신(精忠敵愾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여러 번 옮겨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으며, 계성군(城君)에 봉해졌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66세이다. 양평(襄平)이라고 시호(諡號)하니, 일로 인하여 공(功)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다스려서 잘못이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아들이 없고, 적형(嫡兄)인 이길상(李吉祥)의 아들 이오(李晤)로써 후사(後嗣)를 삼았다.

 

[주-01]

졸오(卒伍) :  병졸(兵卒)들의 대오(隊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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