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이일영 묘갈명(李一榮 墓碣銘)/익재공후 화곡공파

야촌(1) 2010. 7. 29. 04:06

■ 전주판관 증 이조판서 이공 묘갈명

   (全州判官 贈 吏曹判書 李公 墓碣銘)

 

월성 이유원 경춘 저(月城 李裕元 景春 著)

 

공(公)의 휘(諱)는 일영(一榮)이고 자(字)는 계여(啓如)이다.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신라(新羅) 때 태사(太師)를 지낸 알평(謁平)의 후예(後裔)이고, 대대로 고관대작이 줄은 이은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이다.

 

고려조에 이르러 휘(諱) 제현(齊賢)이 있는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인데 세상에서는 익제선생(益齋先生)이라고 일컫는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諱) 원(黿)이 있는데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고 호(號)는 재사당(再思堂)이며, 무오사화(戊午史禍)1)때 재난(災難)을 만났고2) 갑자사화(甲子士禍)3) 때 사형 당했다.

 

삼세대(三世代)를 내려와 휘(諱) 대건(大建)이 있는데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였으며 호(號)는 오촌(梧村)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분이 낳은 휘(諱) 시발(時發)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고 호(號)는 벽오(碧梧)이다.

 

이 분이 낳은 휘(諱) 경억(慶億)은 좌의정(左議政)을 지냈고 호(號)는 화곡(華谷)이며, 조상을 빛낸 이름이 높이 드러난 분이다. 화곡이 낳은 휘(諱) 인소(寅熽)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고 호(號)는 노포(老圃)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공(公)의 5대조(代祖)가 된다.

 

고조(高祖)는 휘(諱)가 항공(恒坤)인데 감역(監役)을 지냈고 이조판서(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는 휘(諱)가 석로(錫老)인데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祖)는 휘(諱)가 진원(進源)인데 감역(監役)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諱)가 집두(集斗)인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을 지냈으며 호(號)는 파서(琶西)이다.

비(妣)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으로 안동 권씨(安東權氏) 통덕랑(通德郞) 세모(世模)의 따님이다.

 

공(公)은 영종(英宗) 계사년(1773) 윤3월 21일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문예(文藝)를 일찍 성취하였다. 일찍이 정조(正祖) 때에 동몽(童蒙)으로서 여러 번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 책을 읽게 하고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글의 뜻을 물었다.

 

공(公)이 막힘없이 응대(應對)하자, 더욱더 장려하며 가르치고 타일렀으며, 문득 파서공(琶西公)의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공(公)에게 비단을 하사하며 “돌아가 너의 어머니에게 드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장성해서는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경신년(1800, 28세)에 모친 상(喪)을 당하였고, 갑자년(1804)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며, 을축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에 보임(補任)되고, 정묘년에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로 승진하였다.

 

무진년(1808)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전직(轉職)되고 기사년에 선릉 직장(宣陵直長)으로 옮겼다.

경오년에 6품(品)으로 승진하여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후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전직되고 종부시 전적(宗簿寺典簿)을 지냈다.

 

신미년(1811)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제수되고, 지방관으로 나가 영산 현감(靈山縣監)이 되어 군대의 폐단을 개혁하고 환곡(還穀)의 폐단을 다스리는 일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 해에 흉년이 매우 심하게 들었는데, 봉급을 덜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해주었으므로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없었다. 갑술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혜택을 베푼 일을 기록하였다.

 

병자년(1816)에 사릉(思陵)4)의 능령(陵令:능을 지키는 벼슬)에 제수되고, 정축년에 전주 판관(全州判官)되었다가 기묘년에 돌아왔다. 경진년에 부친 상(喪)을 당하였다. 정해년에 현릉(顯陵:문종과 비 현덕왕후의 능)의 능령에 제수되고, 무자년 전생서 판관(典牲暑判官)되었으며, 기축년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으로 옮겼다.

 

순조(純祖) 계사년(1833)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1세였다. 아들 규팽(圭祊)이 존귀(尊貴)해졌기 때문에 자헌대부(資憲大夫)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규례(規例)대로 겸직(兼職)하였다.

 

공(公)은 헌걸찬 장신(長身)으로 풍모(風貌)가 헌칠하고 빼어나, 멀리서 바라만보아도 대인(大人)의 기상이 있음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언론(言論)과 박식(博識)함은 시국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할 만하였고, 과문(科文)과 문자(文字)는 왕정(王政)을 아름답게 꾸밀 만하였으나, 세상과 서로 맞지 않아 벼슬길이 침체되어 곧 잠기고 말았다.

 

다만 맡고 있는 관직에 직분을 다하여 한곳에 묶이게 되었으니, 아! 공(公)이 품부 받은 것이 많은데 어찌 여기서 그쳤단 말인가. 여기서 그쳤단 말인가.

 

묘지는 처음에 양주(楊州)의 묘적산(妙寂山)에 있었는데 기유년에 청안(淸安) 북면(北面) 시화(時化)의 을좌(乙坐)를 등진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배우자는 창녕 조씨(昌寧趙氏) 통덕랑(通德郞) 윤량(允亮)의 따님이며 응교(應敎)를 지낸 명교(命敎)의 손녀로, 계사년에 출생하여 갑인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공(公)과 합장(合葬)하였다.

 

계배(繼配)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생원(生員) 면철(勉喆)의 따님으로 정유년에 출생하여 정사년에 별세하였는데 공(公)의 우측에 합장하였다. 또 계배(繼配)는 양성 이씨(陽城李氏) 응오(應五)의 따님으로 신축년에 출생하여 무진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같은 산 다른 묘지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규팽(圭祊)인데 판서(判書)를 지냈고 첫 번째 배우자에게서 태어났다. 측출(側出) 아들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규호(圭祜)와 규조(圭祚)·규록(圭祿)·규복(圭福)이 있다. 딸은 윤규영(尹奎永)과 서남보(徐南輔)에게 시집갔다. 판서(判書)의 아들은 교중(敎重)이다.

 

측출 아들은 효중(斆重)인데 규호(圭祜)의 아들이 되었다. 교중(敎重)의 양자(養子)는 용우(龍雨)인데 지금 정언(正言) 벼슬을 하고 있으며, 자손(子孫) 몇 사람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유분(劉蕡)5)은 책문(策問)6)에 응시하여 / 劉蕡對策

낙방(落榜)했어도 근심이 없었고 / 下第無悶

유하혜(柳下惠)는 벼슬에 나아가 / 柳惠進退

세 차례나 내쳐져도 원망하지 않았네7) / 三黜不怨

오직 공(公)에게만 이런 점이 있어 / 惟公有之

 

좋은 운수 끝나고 곤경에 처하였네 / 終吉處困

벼슬하여 도(道)를 행함은 멈췄지만 / 其行則止

그 뜻은 공손하였네 / 其志則巽

길이 후세(後世)에 보여 / 永眎來世

식자들이 논의케 하네 / 識者之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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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오사화(戊午史禍) : 연산군 4년(1498) 김종직(金宗直)이 기초한 사초(史草)에서 발단되어, 신진 사류(士

   類)인 김일손(金馹孫) 등이 유자광(柳子光) 등의 훈구파에 의해 화를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 참시(剖官斬

   屍)를 당한 사건.

2)재사당 이원(李黿)은 무오사화 때 봉상시(奉常寺)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서 김종직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주자고 건의한 일로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나주(羅州)로 이배(移

   配) 되었다.

3)갑자사화(甲子士禍) : 연산군 10년(1504)에 폐비 윤씨와 관련하여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

4)사릉(思陵) :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

5)유분(劉蕡) : 당(唐)나라 사람으로 상당한 재질과 학식을 가지고도 매번 과거에 낙제하기로 유명하였다.

6)책문(策問) :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科擧) 과목.

7)이 구절의 내용은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 2장에 보인다. 유하혜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大

   夫)인 전금(展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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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全州判官 贈 吏曹判書 李公 墓碣銘

 

月城李裕元景春著

 

公諱一榮。字啓如。姓李貫慶州。新羅太師謁平後。世襲圭組。爲三韓名族。至麗朝有諱齊賢。門下侍中鷄林府院君。謚文忠。世稱益齋先生。入本朝。有諱黿禮曹佐郞。號再思堂。罹戊午史禍。死於甲子獄。三傳有諱大建成均進士。號梧村。贈左贊成。生諱時發。刑曹判書。謚忠翼號碧梧。生諱慶億。左議政號華谷。爲顯祖。華谷生諱寅熽。弘文舘校理。號老圃。贈吏曹判書。寔公五世祖也。高祖諱恒坤監役。贈吏曹參判。曾祖諱錫老監察。贈吏曹判書。祖諱進源監役。贈左贊成。考諱集斗判敦寧。號琶西。妣贈貞敬夫人安東權氏。通德郞世模女。公生以英宗癸巳閏三月二十一日。自齠齕好學。文藝夙就。甞於正廟朝。以童蒙屢入侍。上見而奇之。使讀書。拈問文義。公應對無滯。益加奬諭。輒問琶西公安否。一日賜錦緞於公曰。歸遺爾母。及長治擧業。勤篤不輟。庚申丁內憂。甲子登上庠。乙丑。補明陵參奉。丁卯。陞掌苑署奉事。戊辰。換義禁府都事。轉濟用監奉事。己巳。遷宣陵直長。庚午陞六品。授尙衣院別提。轉工曹佐郞,宗簿寺典簿。辛未。除工曹正郞。出爲靈山縣監。革軍瘼釐糴弊爲先務。歲大侵。蠲俸賙賑。民無捐瘠。甲戌棄歸。民竪石紀惠。丙子。除思陵令。丁丑。判官全州。己卯還。庚辰丁外憂。丁亥。拜顯陵令。戊子。移典牲署判官。己丑。遷軍資監判官。純祖癸巳卒。享年六十一。以子圭祊貴。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職如例。公頎然長身。貌豊而秀。望之知爲大人之象。言論博識。有足以弘濟時艱。功令文字。有足以賁餙笙鏞。而與世鑿枘。沈屈郞潛。秪以當官盡職。爲一副所執。噫。公之豊賦。豈止於是歟。止於是歟。墓初在楊州妙寂山。己酉。移窆于淸安北面時化負乙原。配昌寧曺氏。通德郞允亮女。應敎命敬孫。癸巳生。甲寅卒。與公合祔。繼配坡平尹氏。生員勉喆女。丁酉生。丁巳卒。祔公右。繼配陽城李氏。應五女。辛丑生。戊辰卒。祔公左。同岡異室。男圭祊判書。初配出也。側出男圭祜僉樞,圭祚,圭祿,圭福。女尹奎永,徐南輔。判書男敎重。側出男斅重爲圭祜子。敎重系子龍雨今正言。子孫畧干人。銘曰。

 

劉蕡對策。下第無悶。柳惠進退。三黜不怨。惟公有之。終吉處困。其行則止。其志則巽。永眎來世。識者之論。<끝>

 

출전 : 가오고략(嘉梧藁略)> 嘉梧藁略冊十六>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