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김종직이 죽은 뒤에 온 무오사화

야촌(1) 2010. 3. 31. 03:15

■ 점필재 김종직이 죽은 뒤에 온 무오사화

 

성종 20년(1489) 봄 김종직은 형조판서에 올랐다. 비록 육조 중에서는 서열이 낮다고 하지만, 세조 공신의 후예나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웠다는 좌리공신(佐理功臣), 왕실의 친인척이 판서 이상 고위직을 거의 독차지하던 상황에서 쉽게 넘볼 수 없는 자리였다.

 

이때 정국은 가파르게 돌아갔다. 정책의결 및 집행을 담당하는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세력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 중심의 언관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훈구대신과 신진사림의 격돌이었다. 성종도 무척 걱정하였다. "두 호랑이가 싸우는 형국이니 실로 좋지 못하다."

 

김종직은 노쇠하기도 하였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박감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얼마 후 사임하고 밀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고통은 이때부터였다.

 

제자 김일손의 '늙고 병든 김종직에게 가마와 인부를 보내자'는 제안부터 도마에 올랐다. 김종직에게는 '본래 재산이 많은데 청빈을 가장하였다'는 비방이 쏟아졌고, 김일손은 '사사로운 은혜를 나라의 재물로 갚았다'고 탄핵을 받았다.

 

향리에서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녹봉을 받았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녹봉을 주자고 주장한 이칙(李則)은 추국을 당하였고, 김종직은 '문묵(文墨)을 일삼았을 뿐이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인물이다'는 비난을 받았다. 

 

훈구파 계열의 공세였다. 마치 신진사림이 훈구대신을 탄핵한 데에 따른 분풀이를 김종직에 퍼붓는 것과 같았다. 실로 고단한 최후의 나날이었다.

 

김종직의 곤혹스러움은 죽음으로도 그치지 않았다. 정2품 이상 대신에게 내리는 시호(諡號)를 제자 이원(李黿)이 '문충(文忠)'이라고 올리자 훈구파는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김종직은 글을 잘한 사람에 지나지 않고, 후진을 인도하였다고 하지만 시문을 가르친 일밖에 없는데, 이원이 장난하듯 성현에나 해당될 문충으로 올렸으니 국문하자." 결국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널리 듣고 많이 보았다는 '박문다견(博文多見)'과 공경으로 덕성을 함양하고 행실이 간략하다는 '거경행간(居敬行簡)'을 취한 것이다. 이런 정도는 약과였다. 6년 후 김종직은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들춰 내면서 관을 부수고 시신을 가르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