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일보(34) 병자호란에 순절한 충신과 백성들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남한산성 주변 여러 곳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대표로 기억되는 사례가 쌍령(雙嶺)리 전투 순국자들의 사당인 정충묘(精忠廟), 남한산성 북문 밖 법화골에는 300명 병사들의 희생 이야기와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전사시킨 유적, 성남에는 충청병사 정세규(鄭世規)가 청군과 전투를 벌여 피가 냇물을 이룬 검천(險川)에 전해 진다.
당시 각지에서 구원병이 출동했으나 작전에 성공하지는 못해 원주영장 권정길(權正吉)이 맨 먼저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검단(黔丹)에 들어가 점거했고, 적은 군사로 많은 수의 적을 당해 낼 수 없어 끝내 패해 물러나기는 했으나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앉아서 보기만 한 채 진군하지 않은 장수들과는 혁혁한 애국혼의 자취가 전한다.
● 군졸이 총 쏴 청 태종 매부 양고리 장군 사살
병자년 12월 28일 영의정 김류가 작전을 잘못 세워 조선군 총수(銃手) 300여 명이 북문 밖으로 출전했다가 적의 유인 작전에 휘말려 별장 신성립, 지여해, 이원길 등을 비롯한 300여 병사가 모두 함께 죽었으며, 오랑캐 군사는 2명만 죽었을 뿐이다.
↑정충 묘(精忠廟)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있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쌍령리전투에서 전사한 장군 다섯분을 모시는 사당이다. 당시 조선의 다섯 장군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許完.1569~1637), 경상좌도 안동영장 선세강(宣世剛, 1576~1636), 경상 우병사 민영(閔栐,1587~1637), 충청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 1576년~1636년), 경상 감사 심연( 沈演,1587~1646) 등이 이곳에 포진했다. 이들은 주로 경상도의 병사들이었다.
김류(金瑬,1571~1648)는 자신의 잘못을 북성장 원두표(元斗杓,1593~1664)가 구하지 않았다고 핑계해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니 좌의정 홍서봉(洪瑞鳳,1572~1645)이 “수장의 잘못을 부장에게 죄를 돌리는 데가 있는가?”라고 묻자 김류는 부득이 왕의 처소에 나가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질해 거의 죽게 만들었다.
이처럼 군사의 일에 어두운 사람이 지휘관이 되므로 군사들은 “흰 옷 입은 자는 지휘관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청원할 정도였다. 한편, 청 태종의 매부인 양고리를 전사시켰으니,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청나라 장수 양고리를 쏘아 죽인 것도 이름없는 군졸이 바위틈에 숨어 총을 쏜 것이라고 했다.
훗날 청 태종이 양고리를 위한 절을 지으라고 요구해 북문 밖 골짜기에 법화암(法華庵)을 짓게 됐고, 아직까지 그 절터가 남아 있다.
●험천전투에서 69세로 전사한 최진립의 기개
인조 15년(1637) 1월 15일 도원수 심기원(沈器遠)이 군관 지기룡에게 대구어 알과 연어 등의 물품과 함께 보낸 보고에서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함경감사 민성휘(閔聖徽)가 군사를 합쳐 양근(양평)의 미원(薇原)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2만3천이라고 일컬어졌다.
평안도 별장이 800여 기병을 거느리고 안협에 도착했다.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이 군사를 거느리고 쌍령에 도착했는데, 교전하지도 못하고 패했으며, 우병사 민영(閔 木+永)은 한참동안 힘껏 싸우다가 역시 패해 죽었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1583~1661)가 진군해 용인 험천에 진을 쳤으나 적에게 패해 생사를 모른다”고 했다.
분당구 대장동에서 발원해 낙생저수지, 분당구 금곡동 동막골과 머내를 지나 탄천으로 유입되는 검천(머흐내, 동막천)에는 병자(1636)년 12월 27일에 정세규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다음 해(1637) 5월에 전사한 좌영장 최진립(崔震立,1568~1636), 별장 황박(黃珀,1573~1637), 중군 이건(李楗,미상~1636), 참모관 이경선(李慶善,1600~1636) ,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 이상재(李尙載,1607~1636), 군기차사원 김홍익(金弘翼,1581~1636), 심약(審藥) 이시량(李時亮)을 표창하고, 화살에 맞아 죽을 뻔한 심일민은 벼슬을 내려 주었다.
최진립은 임진왜란에도 아우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험천전투에서 69세로 순국했으니 충신정려와 함께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주영장이 된 지 두어 달 만에 남한산성이 포위됐는데 정세규가 군사를 일으키면서 공의 나이가 많은 것을 민망히 여겨 황박으로 대신하게 하니, “내가 늙어서 장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지만 능히 갈 수는 있소”하고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니 좌우에서 감동했다.
험천에서 전투가 벌어져 공이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화살이 다되자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 자리를 표시해 두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서 여러 아들이 그곳에서 공의 시체를 찾았는데, 화살이 온 몸에 맞아 고슴도치와 같았으나 얼굴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의 ‘해사록(海 木+差 錄)’에는 1637년 3월 8일 일기에서 “맑음. 새벽에 출발했다.
용인에 닿으니 현감 이명열(李命說)이 먼 마을로부터 보러 왔다. 마희천(馬戱川=머흐내, 험천)에 이르니, 시체가 쌓였고 피가 수십 리에 잇따라서 말이 나아가지 못했다.
충청 감사 정세규가 싸움에 진 곳인데 참혹하고 슬픔을 말할 수 있겠는가!
신원(新院)에 이르니 인마가 나아갈 수 없고, 또 양재에 인가가 없다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 여기서 묵었다”고 했다.
● 청군과 싸우다 전사한 4명 위패 봉인한 정충묘
정충묘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장군들의 절의를 기리고 제를 드리기 위해 초월읍 대쌍령리 3번 국도변에 건립됐다. 이곳 쌍령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안동영장 선세강(宣世綱), 공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 등 4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하던 조선군은 엄동설한에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서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열악한 보병(步兵) 부대였고, 평소에 잘 훈련된 강력한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우게 되니 적은 기마부대(騎馬部隊)가 주력이므로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우리 군사가 전멸지경에 이르자 허완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고, 민영, 선세강은 전사했으며, 죽주산성(竹州山城)에 진을 치고 있던 이의배도 추후 군사를 이끌고 투입됐으나, 패하고 말았다. 미수 허목이 지은 허완 묘비명에 “공은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 두 아들에게 편지를 전했는데, 목숨 걸고 싸울 뜻만 말했지 집안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또, 천성이 바르고 근엄해 예로써 사대부를 대접하고, 군대를 다스릴 때에도 비천하다고 멸시하거나 친근하다고 사사로이 대한 일이 한 번도 없어서 이것으로 사졸의 마음을 얻었다. 벼슬이 높아진 뒤에도 항상 변방에 있었으며 조금도 자신을 위해 일을 도모한 적이 없었다”라고 쓰여있다.
또 그는 말하기를, “국가의 큰 은혜를 받았으면 당연히 목숨을 바쳐 전하에게 보답해야 되니, 어찌 염치
를 버려 가면서까지 자손을 위해 계책하겠는가”라 했다고 전한다.
● 음력 정월 초이틀날 광주문화원과 주민 협력으로 정충묘 제례
전쟁이 끝나고 4월 7일에야 비로소 예조의 청으로 쌍령과 검천의 시체를 매장하고 전사한 장군들과 병졸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왔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 때에 국가 재정의 절약을 위해 나라에서 지내던 제사 또한 철폐령에 의해 제향(祭享)이 중단됐으므로, 마을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 저녁에 마을제사로 제향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은 음력 초사흗날에 광주문화원이 주관해 대쌍령리 주민들이 협력해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정충묘 제례」를 올린다. 정충묘 앞 도평리(島坪里)로 들어가는 입구에 낙화암이 있었다. 아군이 크게 패하자 많은 사람들이 낙화암 근처로 피난을 하게 됐는데, 청군이 여기까지 몰려오므로 수백 명의 피난민들 특히, 아녀자들이 강물에 투신했으므로 후대 사람들이 이곳을 ‘낙화암’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검천과 쌍령리 전적지는 고종 임금 때까지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왔고, 가뭄이나 전염병 등의 재해가 있을 때마다 별도의 제사를 지내왔으니 분당 검천 주변에 기우제단 터가 전해오고 있다. 효종 7년(1656) 5월 24일 가뭄이 심해 관리를 보내어 쌍령·마희천(머흐내=검천)· 금화(金化) 등 전쟁터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 성남에 묘가 있던 현종 임금의 명혜·명선 두 공주는 1673년 불과 석 달 사이에 각각 9살과 14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했는데, 현종 때 전염병과 천연두가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현종 9년(1668) 3월 19일에는 여역(?疫)으로 인해 산천단과 성황단에 제사를 지내고, 중신(重臣)을 보내어 북교(北郊)에서 여제(?祭, 서낭과 주인없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다.
또 근신을 보내어 병자호란의 격전지인 험천, 쌍령, 금화, 토산(兎山), 강화에서 죽은 장사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도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으니 현종12년에는 전국의 여러 곳으로 제사를 확대했다.
● 가뭄 때 숙종이 전사한 군졸 영혼 달래는 기우제문 짓기도
숙종과 영조, 정조 임금이 이곳을 직접 찾았으니,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금이 쌍령을 지나다가 말을 멈추고 묻기를, “여기가 바로 병자년에 싸우다가 패망한 곳인가?”하니,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비록 사람의 꾀가 훌륭하지 못해 끝내 패망하게 됐지만, 그 충의(忠義)와 절개만은 높일 만 합니다”하므로, 임금이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숙종 임금이 직접 기우제 제문을 짓기도 했다.
숙종 34년(1708) 6월 17일 “외로운 성(城)은 달무리처럼 포위됐으니, 군졸은 약하고 군량은 다 떨어졌다.
외부의 구원을 날마다 기다렸더니, 아! 너희 영남의 충의(忠義)의 군사들이 분기(奮起)해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해골을 베개로 삼은 사장(沙場)과 원한을 머금고 있는 구천(九泉)에서 굳센 혼백이 굶주린 지 70년이 넘었으니, 하늘이 음산할 때 귀신이 통곡함을 어찌 이를 들을 수 있겠는가?
내가 친히 글을 지어 번민하고 원통함을 이에 위로한다.
살아서는 이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었으니, 유명(幽明)은 달라도 한가지 이치다.
다만 너희 많은 혼령들은 하늘의 화기(和氣)를 인도해 이르게 해 이날의 술잔[치:角+單]에 흠향하고, 빨리 단비를 내리게 해 우리 적자(赤子=백성)들을 소생하게 하라”고 기록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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