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사성어

서릿발 같은 기상을 문집에 담다/남명 조식

야촌(1) 2010. 3. 29. 11:36

■서릿발 같은 기상을 문집에 담다.

 

“온 몸에 찌든 사십년의 찌꺼기를, 천 섬의 맑은 물로 다 씻어 없애리라. 그래도 흙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라.”

 

위의 시(詩)는 무엇보다 유학자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과격한 표현이 돋보인다.

시(詩)의 작자는 남명 조식(曺植:1501~1572). 퇴계 이황(1501~1570)과 같은 해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끌어간 16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그의 문집인 《남명집(南冥集)》에는 시대의 모순에 맞서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학자 조식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 외척정치를 향해 칼날을 던지다.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되고 뜻있는 신하와 밤낮으로 나라 걱정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희희낙락하면서 우선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며, 뱃속이 썩어 가는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하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좁쌀비가 내리니 그 조짐이 무엇이겠습니까?

 

[抑殿下之國事已非。邦本已亡。天意已去。人心已離。比如大木。百年蟲心。膏液已枯。茫然不知飄風暴雨何時而至者。久矣。在廷之人。非無忠志之臣夙夜之士也。已知其勢極而不可攴。四顧無下手之地。小官嬉嬉於下。姑酒色是樂。大官泛泛於上。唯貨賂是殖。河魚腹痛。莫肯尸之。……慈殿塞淵。不過深宮之一寡婦。殿下幼冲。只是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人心之億萬。何以當之。何以收之耶。川渴雨粟。其兆伊何]”

-《남명집 권2,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1》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받은 후에 올린 사직 상소문에서 조식은 당시 사회의 위기의식을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권력자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부분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에 파생되는 외척정치의 문제점을 직선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군주 앞에서 일개 처사(處士)에 불과했던 조식은 당당하게 직언을 퍼붓는 선비였다. 조식의 상소문이 올라오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는 이유로 남명을 처벌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조식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만하다’거나, ‘조식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는 논리로 적극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정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재야 선비나 그 발언을 존중한 시대분위기는 주목할 만하다.

 

2. 칼을 찬 선비

 

조식은 학문에 있어서 무엇보다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남명 사상의 핵심이다. 남명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신념화하였다.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항상 깨어 있음)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는 칼을 찼다.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고 새겨 위기의 순간에는 바로 결단을 할 것을 다짐하였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학자. 언뜻 연상되기 힘든 모습이지만, 조식은 이러한 모습을 실천해 나갔다.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과감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후학들에게는 강경한 대왜관을 심어 주었다. 제자들을 대상으로 모의고사 형식으로 실시한 시험과 답안을 쓴 글인 〈책문제(策問題)〉에서는

 

“지금 고명한 덕을 지닌 임금이 보위에 있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도 섬 오랑캐들이 난리를 일으키고 있다.……눈을 부라리면서 말하기를 , ‘네 모가지를 뽑아버리겠다.’고 하면 비록 삼척동자라도 그것이 공갈임을

알게 된다. [方今聖明在上。治具畢張。而島夷爲亂。……瞋目曰。必拔爾之項。雖三尺童子。猶知其恐動也]”

면서 왜적에 대한 강경 대응을 늘 강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문하에서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등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식의 사상에서 의(義)는 실천적 행동을 의미했다. 의는 그가 차고 다녔던 '칼'의 이미지와도 맥을 같이한다. 조식의 칼은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수양과 극기로,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에게 향해져 있었다. 칼로 상징되는 그의 이미지는 수양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 가는 실천적인 선비 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3. 이론 논쟁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조식은 무엇보다 16세기 중반 이황과 기대승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이론논쟁을 못마땅해 하였다.

조식이 당시 이기(理氣)를 둘러싼 논쟁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남명집》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가. 사람이 도회지의 큰 시장에 놀러가면 진귀한 금은 보화가 즐비하다. 종일 거리를 오르내리면서 그 값을 묻곤 하지만 끝내 자기집에서 쓸 용품은 아니다. 차라리 내 한 필 포목으로 생선 한 마리 사가지고 오는 것만 못하다. 지금 학자들이 성리만을 말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없으니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遨遊於通都大市中。金銀珍玩。靡所不有。盡日上下街衢而談其價。終非自家家裏物。却不如用吾一疋布。買取一尾魚來也。今之學者。高談性理。而無得於己。何以異此] 《남명별집 언행총록》

 

나. 선생이 항상 세상의 학문을 근심한 것은 인사를 버리고 천리를 말하는 것인데 제자 하항과 유종지 등이 자질이 명민한데도 매양 성명(性命)의 이치를 말하기를 매우 열심히 하니 선생(남명)이 말하기를, 하학(下學:실천하는 학문)과 상달(上達:하늘의 이치에 다다름)은 스스로 단계가 있는데 자네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先生常患世之學者。舍人事而談天理。河公沆柳公宗智諸人。天姿高敏。每談性命之理。亹亹不厭。先生曰。下學上達。自有階梯。諸君知未]《남명별집 언행총록》

 

조식은 국왕 앞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당당히 피력하였다. 명종에게 정치하는 방법을 건의하면서, “아래로는 인사(人事)를 배우고 위로는 천리를 통달하는 것이 또 학문의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인사를 버리고 천리를 논하는 것은 한갓 입에 발린 이치이며 반궁실천(反躬實踐:자신을 반성하여 실천에 힘씀)하지 않고 견문과 지식이 많은 것은 바로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인 것입니다.

[由下學人事。上達天理。又其進學之序也。捨人事而談天理。乃口上之理也。不反諸己而多聞識。乃耳底之學也]”

-《남명집》,〈무진년에 올린 봉사(封事)》

 

라 하여 하학(下學)과 인사(人事)가 정치에 반영되기를 거듭 건의하였다. 조식이 이론논쟁을 비판한 것은 이러한 논쟁이 실제적인 삶에 도움이 되지 않고 지식인들의 헛된 이름만을 내세우는 데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남명조식선생초상화(南冥曺植先生生肖像畵)

  생졸년 : 1501년(연산군 7) ~ 1572년(선조 5)

 

 

4. 지리산을 닮아가다.

조식은 말년에 지리산이 바라다 보이는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잡았으며, 지리산의 웅혼한 기상을 닮고자 했다.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로 시작하는 시와 1558년에 있었던 지리산 기행을 기록한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그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다.

 

조식은 61세가 되던 해에 외가인 합천을 떠나 지리산이 보이는 산천재에 마지막 학문의 터전을 잡았다.

여기서 ‘산천’이란 산속에 있는 하늘의 형상을 본받아 군자가 강건하고 독실하게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지리산은 바로 조식이 가장 닮고 싶었던 바로 그 산이었다.

다음의 시에는 조식의 그러한 심정이 잘 담겨져 있다.

 

청컨대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 請看千石鐘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 非大扣無聲

두류산과 꼭 닮아서 / 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네 / 天鳴猶不鳴

 

조식은 생전에 10여 차례 이상 지리산을 유람했고 지리산을 노래한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도 지리산이 보이는 이곳 산천재에서 맞았다.

 

묘소도 자신의 생가가 아닌 바로 이곳,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잡아두었다.

앞으로 덕천 강이 흘러가고 뒤로는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솟아있는 곳이다.

 

조식은 16세기 당대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식인이었다.

재야에 묻혀살면서도 현실정치에 문제점이 노정될 때마다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고, 경과 의를 실천하며 제자들에게 그 가르침이 이어지게 하였다. 《남명집》에는 16세기를 뜨겁게 살다간 선비 학자 조식의 모습이 잘 구현되어 있다.

 

글쓴이 /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보학 > 고사성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천에서 용(龍) 안 난다.  (0) 2010.04.08
19세기 서울의 새로운 인간형, 유속(流俗)  (0) 2010.04.05
진정한 효도란  (0) 2010.03.25
호화 청사와 민심  (0) 2010.03.18
서울에 퍼진 가짜 도학의 소문  (0) 201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