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려시대 인물

최해(崔瀣)

야촌(1) 2010. 1. 7. 01:17

■ 최해(崔瀣)

 

[생몰년] 1287년(충렬왕 13)-1340년(충혜왕 원년)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29년 (1303) 계묘(癸卯) 충렬왕 29년 계묘방(忠烈王 二十九年 癸卯榜)

[분야] 문학>문필가 >문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삼은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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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언명보(彦明父) 또는 수옹(壽翁), 호는 졸옹(拙翁), 또는 예산농은(猊山農隱). 최치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민부의랑(民部議郎) 백륜(伯倫)이며, 어머니는 대호군(大護軍) 임모(任某)의 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학관을 거쳐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예문춘추주부로 기용되었다.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된 뒤 1320년(충숙왕 7) 안축(安軸). 이연경(李衍京) 등과 함께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최해(崔瀣)만 급제하여 1321년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가, 5개월 만에 병을 핑계하고 귀국하여 예문응교(藝文應敎)·검교(檢校)·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이제현(李齊賢). 민사평(閔思平)과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 삼아 가까이 사귀며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남의 선악을 밝힘으로써 윗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다. 그는 독서나 창작에 있어서 스스로 깨달음을 중히 생각하였다.


그가 사제관계를 맺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고려사》에서 기술하였듯이 그의 성격이 대단히 곧고 깨끗하였음을 보여준다.


노년에 지은 《예산은자전 猊山隱者傳》은 자서전으로,『책 속에서 구차하게 편함을 추구하지 않고 떳떳이 우졸(愚拙)로 살아가겠노라.』라고 한 것은「졸옹」이라고 자호(自號)한 동기와 같다.


말년에는 저술에 힘써 고려 명현의 명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 東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고, 그가 남긴 문집은《졸고천백 拙藁千百》 2책으로 일본에 있으며 1930년 영인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稼亭集. 〈朴魯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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