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려시대 인물

권중화(權仲和)

야촌(1) 2010. 1. 7. 02:27

 

■ 권중화(權仲和)

 

◈익재 이제현의 장손인 계림군(鷄林君) 이보림(李寶林)과 친구관계다.

◈생몰년 : 1322년(충숙왕 9)∼1408년(태종 8)
◈본 관 : 안동(安東)
◈자·호 : 용부(容夫), 동고(東皐)
◈시 호 : 문절(文節)
◈저서 : 《향약간이문(鄕藥簡易文)》, 《신편집성마우의방(新編集成馬牛醫方)》

◈작품글씨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명(墓誌銘), 〈나옹화상비(懶翁和尙碑)〉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
◈시 대 : 고려말∼조선초기
◈성 격 : 문신,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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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2(충숙왕 9)∼1408(태종 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이다. 

아버지는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권한공(權漢功)의 서자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로서 공민왕 2년(1353)에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우왕 3년(1377)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안극인(安克仁)과 함께 진사(進士)를 취하여 성석연(成石珚)등 33인을 급제케 하였다.

 

그뒤 삼사 좌사(三司左使).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역임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에 윤이(尹츺). 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가 곧 풀려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상의 찬성사(商議贊成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공양왕 4년(1392)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돌아왔다.


태조 2년(1393)에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하면서 새 도읍지 한양(漢陽)의 종묘(宗廟). 궁전(宮殿). 사직(社稷). 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렸다.

 

그 뒤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고, 태조 5년(1396)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왔다. 태조 7년(1398)에 예천백(醴泉伯)에 봉하여지고, 태종 7년(1407)에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가 된 뒤 치사(致仕)하였는데, 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그는 의약(醫藥)에도 정통하여 조선 초에 고려 말 이래로 전하여 오던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을 보완하여 서찬(徐贊) 등과 함께 《향약간이문(鄕藥簡易文)》을 편찬하였고, 정종 원년(1399)에는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新編集成馬牛醫方)》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 고사(故事). 지리(地理). 복서(卜筮)에도 통달하였고, 전서(篆書)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명(墓誌銘), 회암사(檜巖寺)〈나옹화상비(懶翁和尙碑)〉와 개성(開城)의〈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의 전액(篆額)을 썼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朝鮮金石攷,  ◇國朝人物考,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韓國醫學史(金斗鍾,  ◇探究堂,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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