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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이 남긴 기고(寄稿).

야촌(1) 2010. 1. 1. 14:14

[MT 온라인 10년]

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이 남긴 기고

 

머니투데이 온라인이 출발한 것은 2000년 1월 1일. 그로부터 1년 3개월 후 타계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머니투데이의 첫 기고자였습니다.

 

머니투데이에 그동안 현직 대통령에서부터 각계 경영인, 전문가 등 수많은 분들이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담은 기고문을 보내주셨지만 그 첫 테이프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온라인 세대를 모를 것 같은, 하지만 꿰뚫어보고 있었던 정 명예회장이 끊어주셨습니다. 그 기고문은 결국 그 분의 마지막 유고가 됐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2000년 1월 1일 머니투데이 온라인을 통해 송출된 '세상의 변화가 여전히 멋있다'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인터넷이 세상의 변화과정에서 커다란 전환점에 해당한다는 점을 평생 쌓아온 사업가적 안목으로 분명히 인식한다"고 짚어냈습니다.

 

역시 '정주영' 다운 면모였습니다. 고인은 이 칼럼에서 "새 천년에도 나와 같은 기업인이 또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며 "그래야 한국경제가 우뚝 선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한번더 기고문을 보내주셨습니다.

 

2001년 1월 10일 '모두 승자가 될 수는 없다'는 두번째 칼럼에서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에 줄곧 축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배가 더 많았던 듯싶다. 다만 나는 그 쓴잔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고 시련으로 받아들이며 앞만 보고 걸어나갔을 뿐이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정회장은 특히 "일이 어긋나거나 사업이 제대로 안 풀리는 것을 겁내서는 결코 안된다"며 "사실 사업치고 벤처 아닌 게 어디 있는가"라고 역설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해가던 한국 경제의 영원한 벤처 정 명예회장이 새 천년의 개막과 함께 탄생한 '인터넷 신문 머니투데이'에 기고한 힘차고 멋진 유고는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슴 뛰게 합니다.

 

당시 기고문을 다시 싣습니다. (당시 정회장은 고령과 건강 악화로 컬럼의 주요내용을 구술했고, 이를 토대로 비서실에서 작성했습니다.)

 

1. 세상의 변화가 여전히 멋있다. 

우선 나는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1915년 생이니까 내나이 이제 여든 다섯, 이 나이에 2000년의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 더구나 나는 만년을 즐길 자격은 인정받을 정도로 저 어려웠던 젊은 시절부터 최근까지 한국경제에 일정한 자취를 남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복받은 사람들은 요즘의 젊은이들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미래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도 새천년의 초입에 그러한 기회가 왔다는 것은 커다란 복이다.


새천년의 출발에 맞춰 기자들은 있으되 종이신문은 발행하지 않고 인터넷에만 기사가 떠있는 '인터넷신문'이 나오게 됐다니 반길 일이다. 나는 인터넷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시대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최근의 '인터넷 소용돌이'가 세상의 변화과정에서 커다란 전환점에 해당한다는 점을 평생 쌓아온 사업가적 안목으로 분명히 인식한다.


천부적인 사냥꾼은 큰 짐승이 다니는 길목을 알고 훌륭한 어부는 물고기떼의 흐름을 잡아내듯이, 뛰어난 사업가라면 새천년의 화두를 인터넷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세대가 자랄 때 겪었던 절대적 궁핍의 위협 없이 요즘 젊은이들이 인터넷의 가능성 앞에서 땀을 쏟으며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덩달아 흐뭇하다.


난 경영인으로서 공장 말뚝을 직접 박아 보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갖가지 어려움을 딛고 척박한 땅에 자기 공장의 말뚝을 직접 박으며 땀흘려 공장을 지어볼 때 단순한 장사꾼을 탈피해 비로소 기업인이 된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그래서 부단히 건설 자동차 조선 전자산업 등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공장을 지어왔다. 주변에서 제대로 안 될 것이라고 만류하거나 노골적으로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에도 이러한 신념에서 나는 일을 밀고 나갔다. 아직도 난 나의 판단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란 대단한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정보화산업, 인터넷산업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이 산업은 전통적인 분류로 따질 때 공장말뚝이 있는 산업이 아니다. 아니, 그러한 과거 잣대에 의한 분류가 무의미한 산업이다.

세상의 변화란 멋진 일이다. '공장을 직접 지어봐야 기업인이 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시대변화로 인해 그러한 생각을 젊은이들에게 꼭 강권할 뜻은 없다. 그러나 공장을 지어봐야 기업인으로서 사고와 행동의 호흡이 길어진다. 짧은 생각, 가벼운 행동을 스스로 자제하게 된다.

 

기업을 하려는 사람이 호흡을 짧게 가져가서는 결코 안된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인터넷 사업에 뛰어든 젊은이들중 일부가 일확천금을 꿈꾸며 '작전성 사업'을 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요즘 젊은이들은 시대변화로 인해 진정한 기업인이 되기 위해 꼭 공장을 지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훈련을 통해 시골 황소와 같은 우직함을 몸에 익혀야 한다.


이 노인네가 평생 소중하게 여겨온 공장말뚝론을 새천년을 맞아 새롭게 할 테니 부디 젊은이들도 기업경영을 단기적으로 목돈 한번 챙기는 정도로 간주하는 습벽을 물리치라고 당부하고자 한다. 시대의 변화가 멋진 것이지만 거기에서 좋은 면들을 섭취해야지, 일시적으로 이용해 돈을 벌겠다고 하다간 오히려 그 변화에 스스로 먹히거나 매몰되고 만다.

 

괜한 말이 아니라 나는 그러한 예들을 과거에도 무수히 보아왔다. 엄청난 변화의 시기에 새로운 면모의 젊은 기업인들이 대거 탄생하길 바라며, 이 말을 해둔다. 새천년에도 나와 같은 기업인이 또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야 한국경제가 우뚝 선다.

 

2. 모두 승자가 될 수는 없다.

 

지난해 홍콩의 한 경제지가 나를 20세기의 아시아 10인중 한명으로 선정했다고 전해들었다. 나로선 영광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줄곧 축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배가 더 많았던 듯싶다. 다만 나는 그 쓴잔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고 시련으로 받아들이며 앞만 보고 걸어나갔을 뿐이었다.

 

나의 회고록을 보더라도 금방 드러난다. 그것은 일이 술술 잘 풀려나간 과정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소위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내가 도중에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비를 겪었으며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어떻게 헤쳐나왔는지를 기록한 내용이다.

일이 어긋나거나 사업이 제대로 안 풀리는 것을 겁내서는 결코 안된다. 그러나 섣부른 시도는 금물이다. 요즘 한창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있는 벤처기업의 경우 사실상 성공률은 아무리 좋게봐야 5%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95%이상이 도중하차 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대해 한평생 기업을 일궈온 내가 몇가지를 지적해 두고자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나같은 사람들이 100명 나서서 각자 사업을 할 경우에도 반드시 95명이상은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사업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승리자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상대적인 경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수의 성공자를 남긴다.

 

이것은 벤처기업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벤처기업이라는 말이 없던 나의 젊은 시절에 사업을 할 때에도 성공률은 이처럼 작았다. 사실 사업치고 벤처 아닌 게 어디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성공의 모델 케이스로 보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나만을 바라봐서는 곤란하다. 더 많은 실패 케이스에도 주목해야 한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95%이상의 벤처기업이 쓰러진다고 할 경우 그것은 100번의 시도중 95번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얘기이지, 100명중 95명이 곧장 인생실패자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한두번의 시도로 좌절해서는 애초에 기업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사업시도가 성공하지 못할 때 재기불능으로부터 그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신용이다. 신용을 저버린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다. 또다른 시도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변에 신용을 쌓아둔 사람은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또다른 시도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결국 사업에 나선 사람이 커다란 시련에 부딪혔을 때 신용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정반대로 운명이 갈린다.

신용의 힘을 일찍 깨닫는 젊은이는 사업가적 자질을 반쯤은 이미 갖춘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을 속이면서 조그만 이득을 취하는 것은 사업에서 독약이다.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도 차라리 사업이 망하는 게 낫다. 독약이 쌓여가지고는 사업을 오래 지탱할 수가 없다. 사업이 망할지언정 사람의 신용을 손상당해서는 안된다.

벤처사업에 나서는 젊은이들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나의 외침을 함께 나눠갖길 바란다. 남다른 의지로 인생을 걸고 자기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벤처기업가라면 왜 내가 그러한 신념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해 왔는지를 벌써 깨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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