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맹사성(孟思誠)

야촌(1) 2009. 12. 13. 17:26

■맹사성(孟思誠)

 

↑맹사성(孟思誠) 존영

  [생졸년] 1360년(공민왕 9)~1438년(세종 20)

 

맹사성(孟思誠)의 본관은 신창(新昌)으로 자(字)는 자명(自明), 호(號)는 고불(古佛)이다.

고려 수문전 제학 희도(高麗修文殿提學 希道)의 아들이며, 최영(崔瑩)의 손녀사위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온양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는 지금의 종로구 화동 정독도서관에서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맹현(孟峴)에서 살았다.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이 된데 이어 전의시성(典儀寺承). 기거랑(起居郞). 사인(舍人). 우헌납(右獻納)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郞)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좌기상시(諫議左散騎常侍). 간의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가 되었다. 태종 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를 거쳐 태종 7년(1407) 예문관대제학이 되었을 때, 마침 세자가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길에 시종관(侍從官)으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한성부윤과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이 되었을 때, 지평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 조대임(平陽君 趙大臨)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 하였으므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 될뻔 하였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부사로 임명되고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생원시의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券採)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복시의 도권관(讀券官)이 되었다.

 

그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藥)을 하사 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하였으나 왕은 그를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었는데 그는 또 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19년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에는 의정부찬성사가 되고 142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우의정 재임시에『太宗實錄』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는데, 그는『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수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 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자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록미(祿米)로 하였고, 매양 출입 할 때에는 소 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재상인줄 알지 못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國朝名臣錄.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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