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이경선(李慶善)

야촌(1) 2009. 11. 16. 11:41

■ 경주이씨 29世 익재공파(益齋公派)

 성명(姓名)  이경선(李慶善) 본관(本貫)  경주(慶州)
시대(時代)  조선시대 자(字) 군선(君善) 호(號) 남포(藍浦)
이력(履歷) [인물요약] 
◇생졸년 :  1600년(선조 33) 5월 2일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병자호란의
                    검천(川)
전투에서 전사(戰死)

◇문과 :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
                (10/33)/  
◇진사시 :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6위(3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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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초명(初名)은 경징(慶徵)이요,
자(字)는 군선(君善), 호(號)는 남포(藍浦), 충익공 벽오(忠翼公 碧梧) 이시발李時發)의 아들로 경자(庚子) 1600년(선조 33) 5월 초(初) 2일 태어나,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음직으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正九品)를 지냈다 . 

1633년(인조 11) 11월 17일 계유 식년방(癸酉 式年榜) 33인중 10등(을과 7등)으로 문과급제(文科及弟)하여, 사과(司果-正六品), 교리(校理-正.從五品),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 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正六品)을 역임한 후, 1636년(인조 14) 1월에  남포현감(藍浦縣監-從六品) 겸, 홍주진관 병마절제도위(洪州鎭管 兵馬節制都尉-從六品)로 전임되고,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이에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몽진해 있을시,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이끄는 왕의 근왕병 참모관(參謀官)으로 경기도 광주 검천 전투(廣州 川 戰鬪)에 출전, 장렬히 순절하니, 향년 36세였고, 이듬해인 1637년 5월 26일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 禮曹參議-正三品)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영조 6년) 11월에 왕명(王命)으로 후손들이 세거하는 오늘날의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마을 입구에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본래의 정려문은 왜정시대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신문화(精神文化) 말살 정책(抹殺政策)에 의거, 소실되고 없던 것을 2005년 진천군에서 공의 묘소 아래, 새로이 건립하고 현판(懸板)은 12대손 재훈(在薰)이 원판(原版)을 탁본(拓本)하여, 천연기념목(天然記念木)인 후박나무로 제작 복원하여, 달았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공(公)의 묘소 소재지인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일부 지역이 선생의 사패지(賜牌地)였다고 전한다.   

[문과방목(文科榜目)
  
◇이경징(李慶徵) >훗날 경선(慶善)으로 개명 함.  
◇1633년(仁祖 11年) 계유 식년시 을과(癸酉 式年試. 乙科).  10등/33명

[인적사항] 
◇생졸년(生年) : 1600년(선조 33)
◇졸년 : 1636년(인조 14)/병자호란 때 검천 전투에서 전사  
◇자(字) :  군선(君善)  
◇호(號) : 남포(藍浦)     
◇개명(改名) : 경선(慶善)  
◇본관(本貫) : 경주(慶州)  
◇거주지(居住地) : 경(京)    

[가족사항] 
◇부(父) :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        
◇조부(祖父) :  오촌 이대건(梧村 李大建)  
◇증조부(曾祖父) :  이개윤(李愷胤)  
◇외조부(外祖父) :  옥산 이우(玉山 李瑀 : 율곡의 동생)  
◇처부(妻父)  :  영의정 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  1624(인조 2) 진사시      
◇문과(文科)  : 1633년(인조 11) 식년시  
◇전력(前歷) :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正九品). 사과(司果), 교서(校書), 교리
            (校理), 예조좌랑(禮曹佐郞), 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 남포현감(藍浦
            縣監)겸, 홍주진관병마절제도위(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從六品 무관
           벼슬). 증 예조참의(贈禮曹參議)  
◇품계(品階) : 정5품(通訓大夫). 증(贈) 정3품(通政大夫)  
◇관직(官職) : 현감(縣監). 증(贈) 예조참의(禮曹參議)  

[전사일기(戰死日記)]
공의 초명(初名)은 경징(慶徵)이요. 자(字)는 군선(君善), 호(號)는 남포(藍浦), 오촌공(梧村公) 대건(大建)의 손(孫)이요. 충익공 벽오 시발(忠翼公 碧梧 時發)의 아들로 1600년(선조 33) 5월 초(初) 2일 태어나.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병자호란(丙子胡亂)시, 광주 검천 전투(廣州 儉川 戰鬪)에서 장열히  전사(戰死)하니 향년 37세였고, 정축(丁丑) 1637년(인조 15) 5월 26일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 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1624년(인조 2) 사마(司馬)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음직으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正九品)를 지내다 1633년(인조 11) 11월 17일 계유 식년방(癸酉 式年榜) 33인중 10등(을과 7등)으로 문과급제(文科及弟)하여, 사과(司果-正六品), 교리(校理-正.從五品),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 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正六品)을 역임한 후, 1636년(인조 14) 1월에  남포현감(藍浦縣監-從六品)겸, 홍주진관 병마절제도위(洪州鎭管 兵馬節制都尉-從六品)로 전임 되었다.

그해 1636년(인조14) 12월 14일 북녘 오랑케의 청 태종 홍타시(弘他時)가 난(亂)을 일어 켜, 12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서울로 물밀 듯 쳐들어오자 미쳐, 막아 내지를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몽진(夢塵)하여 들어가니 때는 추운 겨울밤 9시였고 인조께서는 민익진(閔益震)에게 명하여 삼남(三南)에서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출전하라 하였다.

이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충청도내의 병마를 불러 모으고 각 읍 수령(各邑守令)들과 찰방(察訪)들도 불러 모아 남포현감 이경선(李慶善)을  참모관(參謀官)으로 삼고 전(前) 참판(參判)이었던 무인 최진립(武人 崔震立)을 좌영장으로, 심일민(沈逸民)을 우영장(右營將)으로, 별장에 황박(黃珀), 중군에 이건(李楗),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에 이상재(李尙載), 군기 차사원(軍器 差使員)에 연산현감  김홍익(連山縣監 金弘翼), 심약(審藥)에 이시량(李時亮)을 삼고 출전했는데 벼슬한 사람이 140명이고 잡색군(雜色軍)이 2,432명이였다.

수원산성으로 들어가 적정을 정찰하며 전진하여 12월 26일 헌인 능으로 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적세가 크게 떨쳐, 더 나가지 못하고  광주 험천(廣州 險川)에 진(陣)을 치고 있었다.

그 이튼 날, 12월 27일 이른 아침에 적병은 높은 봉우리로 부터 내려오는 짙은 안개를 타고 급습 해왔다. 불의에 급습을 당한 아군은 혼란에 빠져 지탱을 못하고 감사 정세규(監司 鄭世規)는 절벽 아래 구렁으로 굴러 떨어졌으나 간신히 살아났고 이상재, 최진립, 황백, 이건, 이시량은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이경선과 김홍익만은 여전히 적과 싸우며 손에 잡고 있던 칼로 거추장스런 옷자락과 옷 소매를 잘라버려 몸 놀리기에 편하게 하고 몸을 바쳐 나라를 돕고 여기서 죽자는 결심 이였던 것이다.

군량미를 쌓아놓고 노적(露積) 가리로 올라가 우뚝 히, 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독전(督戰)하였고 물러서는 병사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칼로 쳐버렸다.

창 끝과 살촉이 서로 마주치는 데서도 흩어 지지 않고 적을 무찌르며 버티고 싸운 것은 이경선과 김홍익의 힘이었던 것이다.

군중(軍中)이 놀라고 어지러워진데다 이미 주장(主將)을 잃었으므로 서로 밟고 밟히며 흩어지기 시작 했다. 이경선은 큰소리로 병마절제사가 여기 있다.

도망가는 자는 참한다고 외치며 몸을 날려 뒤 쫒아가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겁에 질려 전의(戰意)를 잃고 무너지는 진세(陳勢)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전세를 알아 차린 공(公)은 여기서 죽자 결심하고 곧바로 노적(露積) 가리위로 되돌아와서 칼을 고쳐 잡고 달려드는 호병 십여명(湖兵十餘名)을 치고서 말 아래로 떨어졌다.

급히 다시일어나 또 수명의 호병을 쳐 죽이니 호병들도 두려워서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이렇게 싸우던 중 불행히도 칼이 부러지는 바람에 적에게 살해(殺害)되었고 김홍익도 여기서 전사(戰死)하였으니 때는 12월 27일이였고 이는 군중에서 직접 눈으로 본 병사들이 전(傳)한 말이다.

이듬해 1637년 1월 19일에 가서야 형(兄) 경충 공(兄 慶忠公)이 소식을 듣고 시신(屍身)을 모아 거두어 본적, 온몸이 창 자국 투성이었고 성한 곳이라곤 없어서 형용(形容)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차고 있던 혁낭(革囊)과 병부(兵符)가 시신과 같이 있었고 노적가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판별(判別)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진중(陳中)에서 죽은 사람이 늘려 있었건만 유독 이경선과 김홍익의 시신만이 이같이 참혹(慘酷)하고 잔인(殘忍)하게 창에 찔린 것은 싸움에서 시종(始終) 물러서지 않고 독전(督戰)하며 많은 호병을 쳐 죽였기 때문에 앙 갚음으로, 죽은 뒤에도 난자(亂刺)한 것이 틀림없고 여러 백명(白名)이 전하는 바도 이를 밑 바침 해주고 있다.

대군(大軍)이 이미 무너지고 주장(主將)의 통솔(統率)도 없는데 이경선과 김홍익은 지방의 말단(末端) 관료(官僚)로서 죽어 마땅할 때, 죽지 않고 욕(辱)되게 살기를 탐하여 살기를 꾀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이 생각하고 더욱 굳게 적에 대항한 숭고(崇高) 한 뜻과 몸에는 수십군데나 창에 찔리면서도 죽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가벼이 생각 하였으니 공(公)의 죽음은 어찌 그리도 장열 하였던가!  

공의 나이 37세로 한참 일할 나이였건만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경술 1730년(영조 6) 9월에 왕명으로 정려(旌廬)를 세워라 명하여 그해 11월 용인 공세곡 동구(龍仁貢稅谷 洞口)에 정려(旌閭)를 세우다.   

- 찬인미상(撰人未詳) - 

[참고문헌]    
◇조선왕조 실록,       
◇송자대전(宋子大全)   
◇상산지(常山誌)  
◇경주이씨금석록(1868년간).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간행 표암지 8편.  
◇나만갑. 저. 병자록(羅萬甲. 著. 丙子錄)  
◇남한일기(1992년간 광주 문화원)  
아들(子) 1. 진사 이인섭(進士 李寅燮).  2. 진사 이인형(進士 李寅炯)
   
  충신문
(忠臣門)
1730년(영조 6년) 11월에 왕명으로 오늘날의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마을 입구에 충신 정려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왜정시대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신문화 말살 정책에 따라, 소실되고 없던 것을 2005년 11월 진천군에서 진천읍 산척리 산22-18 산직마을의 공의 묘소 아래, 새로이 건립하고 현판은 12대손인 재훈(在薰)이 원판을 탁본해서 천연기념목인 후박나무로 이음매 없이 주문 제작했다.
묘(墓) 묘(墓)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22-18. 산직마을 숭렬사(崇烈祠) 앞의 신좌원(申坐園)에 있고, 우암 송시열이 찬한 묘표(尤庵 宋時烈 撰 墓表)와 죽산후인(竹山後人) 안형열(安亨烈)이 찬(撰)한 묘비(墓碑)가 있다. 

[묘표(墓表)]
此李君慶善之墓。君初名慶徵。後改慶善。始以進士捷文科。歷校書。校理。禮曹佐郞。成均館典籍。出監藍浦。翌年丙子。領兵從巡察勤王。至廣州。遇虜兵潰。君與連山縣監金弘翼死之。朝廷贈禮曹 參議以酬之。丁丑。尋尸歸葬故判書碧梧公墓西十里。君其出也。其氏出世德。俱載碧梧公墓碑。君少業文有才藝。若將有爲。而年三十七而死。人皆惜之。第觀居此世危辱者。何如也。可爲榮矣。可謂不忝所生矣。二子寅燮,寅炯。皆進士。歲崇禎戊戌。恩津宋時烈旣銘碧梧公。仍復記此。使後 人知爲李慶善之墓。歲崇禎戊戌(1658 효종 9) 恩津 宋時烈 撰   
기타(其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