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영가군부인 권씨 묘지명(永嘉郡夫人權氏墓誌銘)

야촌(1) 2009. 7. 26. 16:26

■ 영가군부인 권 씨 묘지명

   (永嘉郡夫人 權 氏 墓誌銘)

    (익재 이제현 선생 부인)

 

최해 찬(崔瀣 撰)

 

지순(至順) 3년(1332, 충숙왕 복위 1) 3월에 고려국(高麗國) 광정대부(匡靖大夫)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공 제현(李公 齊賢)의 처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권씨(權氏)가 병에 걸려 이달 28일 정유일에 양제방(楊堤坊-고려시대 개성부의 동부에 소속된 행정 구역 동)의 집에서 졸하였는데, 장례 지낼 것을 상의하여 4월기미일로 길일(吉日)을 잡았고, 장지는 옛 임진현(臨津縣) 장화사(章和寺) 남쪽 언덕이 또 길하다고 하였다.

 

이에 이공이 눈물을 흘리며 같은 고을 사람인 최모(崔某)를 찾아와서, “아, 내가 불행히도 갑작스레 아내를 잃고 말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영혼을 위로할 길이 없네. 자네가 나와 가장 오랫동안 사귀었고 또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나를 위해 묘지명을 지어주지 않겠나.”하기에, 내가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물러나 부인에 대한 사실을 모아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부인은 지원(至元) 무자년(1288, 충렬왕 14)에 태어나 올해 임신년(1332, 충숙왕 복위 1)까지 살았으니 나이 45세가 된다. 증조부 휘 위(韙)는 고(故)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조부 휘 단(㫜)은 고(故)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시호가 문청공(文淸公)이며, 부친 부(溥)는 지금 삼중대광(三重大匡)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있다.

 

영가부원군이 시령 유씨(始寧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에 봉해졌으며 고(故) 지첨의(知僉議) 휘 승(陞)의 따님이다. 이분이 부인을 낳았다. 권씨는 실로 영가(永嘉)의 망족(望族)으로 친인척 여러 사람들이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다.

 

부인은 시집가기 전에 온순하고 총명하여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15세에 남편을 택하여 이 씨 집안에 시집을 왔는데, 이공(李公 이제현)은 연우(延祐) 연간 초부터 연경에 있는 태위선왕(太尉先王 충선왕)을 수종(隨從)하기 위해 원나라를 오가느라 집에 있지 않은 기간이 10여 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부인은 남편의 집안을 섬기면서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여 시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들의 마음을 매우 기쁘게 해 드렸다. 부인은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다루는 일과 살림살이와 손님 접대하는 일을 반드시 신중하게 처리하여 모두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평소에 까닭 없이 바깥채에 나가지 않았고, 안방에 있을 때에는 하루도 길쌈을 손에서 놓고 노는 적이 없었다.

 

친족들을 대할 때에도 화기애애하게 지냈으나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에 허물없이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규문(閨門)에서 남녀의 구별을 엄격히 하는 것을 본디 배웠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공이 젊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한 이후로, 나라의 관리에 오르기까지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나라의 명신이 된 것은 부인의 내조로 말미암아 그리 된 것이다.

 

아,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반드시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 반드시 화가 미치는 것도 아니니, 하늘이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하늘에게 책임이 있다. 부인의 아름다운 행실로 수명이 오래가지 못하고 여기에서 그치고 말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자식으로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 서종(瑞種)은 통직랑(通直郞) 전(前)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이고, 다음 달존(達尊)은 승봉랑(承奉郞) 봉거서 영(奉車署令)이고, 막내는 돌도 되기 전에 부인이 병이 나는 바람에 젖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여 열흘 만에 죽었다. 딸 넷을 낳았는데, 맏딸은 좌우위 호군(左右衛護軍) 임덕수(任德秀)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셋은 아직 어려서 시집가지 않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름난 가문에 시집와서 / 生盛族配名家
대대로 내려온 덕을 쌓고 규문을 잘 다스리며 / 積世德董閨門
예법을 지키고 여자의 도리를 따랐다네. / 有禮法順女則
아, 부인 같은 분이 홀로 일찍 돌아가시니 / 嗟若夫人兮獨靳年
하소연할 곳 없어 막막하기만 하여라. / 討之無所兮惟漠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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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내용]

 

[주 01]  이공 제현(李公齊賢) : 1287-1367.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실재(實齋)ㆍ역옹(櫟翁),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최해와는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최해의 본관 역시 경주이다.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자 백이정(白頤正)의 문인으로 1301년(충렬왕 27)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고, 이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趙孟頫)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9년(충숙왕 6)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고하여 1323년(충숙왕 10)에 풀려 나오게 했으며, 1325년(충숙왕 12)에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56년(공민왕 5)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주 02]  영가(永嘉) : 안동(安東)의 옛 지명이다.

[주 03]  연우(延祐) : 원나라 인종의 연호로 1314년-1320년 이다.

 

참고 : 졸고 천백(拙 藁) 제1권 최해(崔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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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永嘉郡夫人權氏墓誌銘(영가군부인권씨묘지명)

 

至順三年三月。高麗國匡靖大夫。前政堂文學李公齊賢之妻永嘉郡夫人權氏感疾。以是月廿八日丁酉。卒于楊堤坊之第。謀所以藏。卜日得四月己未吉。其兆古臨津縣北章和寺之南原又吉。於是李公泣謂同郡人崔某曰。嗟予不幸。遽喪良媲。顧無以慰藉其魂。子知予最久且詳。盍爲我銘其藏。某不敢辭。退摭其實而敍之曰。夫人生於至元戊子。至今壬申。年四十有五。曾大父諱韙。故翰林學士。大父諱㫜。故僉議政丞諡文淸公。父名溥。今三重大匡永嘉府院君。君受室始寧柳氏。封卞韓國夫人。故知僉議諱陞之女也。是生夫人。權氏實永嘉之望。親姻列位。旣貴且盛。夫人在室。以柔婉聰慧。爲父母所鍾愛。年十五。擇 其歸適李氏。李公自延祐初。從大尉先王居都下。往來不在家者有十餘年之久。而夫人事夫家盡婦道。逮舅姑之終。甚得其懽心焉。其承上御下。制資用奉賓客。必謹必飭。俱有常法。平生。無故足不至堂。處於閤中。未嘗一日捨紅而嬉。其待宗戚。雖克敦雍睦。亦不與之相狎。蓋其閨門嚴內外之別。自有受之。非強之也。李公自少年從仕。至登政府。不以家事爲累。專其學問。爲國名臣者。由內助致之焉耳。嗚呼。爲善者未必受福。爲惡者不必及禍。天之任此。責其有矣。孰以夫人之令。年不克永而止於此耶。其不可知也已。凡生子男三人。長曰瑞種。通直郞。前弘福都監判官。次曰達尊。承奉郞。奉車署令。季未周歲。夫人病。乳哺失節。後十日而亡。女四人。一適左右衛護軍任德秀。三處且幼。銘曰。
生盛族配名家。積世德懂閨門。有禮法順女則。嗟若夫人兮獨靳年。討之無所兮惟漠然

참고 : 졸고 천백(拙 藁) 제1권 최해(崔瀣)

 

拙藁千百卷之一 雞林後學崔氏彥明父 /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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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인 소개

 

최해 [崔瀣, 1287-1340]

 

본관 경주(慶州). 자 언명보(彦明父)·수옹(壽翁). 호 졸옹(拙翁)· 예산농은(猊山農隱). 문과에 급제, 성균학관(成均學官)을 거쳐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1320년(충숙왕 7) 장흥고사(長興庫使)로 원나라에 가서 1321년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으나 신병을 핑계로 5개월 만에 귀국, 검교(檢校)·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집이 가난하여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고, 고려 명현(名賢)의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수했다.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 삼아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문집에 《졸고천백(拙藁千百)》(2권), 《농은집》 등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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