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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전 전례

야촌(1) 2007. 9. 4. 20:45

■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전 전례

 

1.고려말 성리학의 전래 – 안향. 백이정. 권부. 이제현 주도

 

성리학이 원나라에서 처음 고려로 들어온 것은 서기 1298년 8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과 유학 제거(儒學提擧)를 지내고 첨의참리(僉議參理)였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 연경에서 주자 전서(朱子全書)를 구입. 필사하여 1299년에 돌아온 경우와, 충선왕을 같이 호종한 권부「權溥, 1262년(원종 3)~1346년(충목왕 2)」의 아들 준「準, 1280년(충렬왕 6)~1352년(공민왕 1)」이 주희 사서 집주(朱熹 四書集註)를 구입하여 돌아와 권부「權溥 : 이제현의 스승이요, 장인」가 간행하기를 건의한 것이 최초의 일이다,

 

이재 백이정「彝齋 白頤正 : 1247년(고종 34)~1323(충숙왕 10), 운와공의 장인, 익재공의 사돈」역시 충선왕을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성리학을 접하여 배우고 연구하여 서기 1308년 충성왕과 함께 귀국하여 치암 박충좌「恥菴 朴忠佐, 1287년(충렬왕 13)~1349년(충정왕 1)」,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1287년(충렬왕 13)~1367년(공민왕 16)」, 담암 백문보「淡庵 白文寶, 1303년(충렬왕 29)∼1374년(공민왕 23」 등에게 소개하고 가르친 것이 효시이다.

 

안향「安珦, 1243년(고종 30) ~ 1306년(충렬왕 32)」의 건의로 1304년 5월 1일(충렬왕 30)에 국학에 섬학전을 설치하였고, 공자와 70 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고 제기, 악기, 육경, 제자 사기를 사들였으며 이산과 동암공 이진「東菴公 李瑱, 1244년(고종 31)~1321년(충숙왕 8), 익재 공의 선친)」을 경사 교수도 감사(經史敎授都監使)에 임명하기를 청하였고, 6월에 대성전을 준공하였다. 따라서 안향(安珦)과 권부(權溥)는 초기 성리학의 전래와 유학의 부흥발전에 큰 공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 성리학의 정치적 수용

 

고려 말 원나라 간섭 기는 정치적으로 권문세족이 부원(附元) 하고 불법적 수탈과 매관매직을 자행하여 왕권을 약화시켰는데 신라 때부터 민중에 뿌리 깊이 내린 불교가 너무 타락하였고, 오랜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경제적 폐해는 새로운 사조의 사상인 성리 설을 수용하는데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당시 과거를 통하여 새롭게 등장한 신흥 사대부 집단은 유교적 학문의 소양을 구비하고 좌주와 문생의 관계로서 적극 적으로 성리학을 수용하고 이들 권문세족을 타도하는데 선봉이 되었으며,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개혁정책에 깊숙이 관여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펴 나갔다.

 

처음 유경「柳璥, 1211년(희종 7) ~ 1289년(충렬왕 15)」의 문생(門生)인 안향(安珦)과 이존비「李尊庇, 1233년(고종 20)~1287년(충렬왕 13)」, 원부「元傅, 1220년(고종 7)~1287년(충렬왕 13)」, 허공「許珙,1233년(고종 20)~1291년(충렬왕 17)」 등과 백이정(익재공의 스승이요. 사돈), 권부(익재공의 장인), 우탁「禹倬, 1263년(원종 4)~1342년(충혜왕복위 3),」. 덕재 신천「德齋 辛蕆, 미상~1339(충숙왕복위 8)」, 윤선좌, 이조년, 박전지, 이진(익재공의 선친), 안석, 김태현, 조간, 김륜(익재공의 사돈), 백원항, 최성지 등은 성리학과 유학의 발전을 위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고, 이들의 문생으로 익재 이제현, 박충좌(동암공의 문생), 백문보(익재공의 문생), 이곡(익재공의 문생), 박원계(익재공의 사돈), 최문도, 최해. 민사평(동암공의 문생), 한종유, 권준(국재공의 아들), 전신, 홍언박, 이암, 윤택, 박보, 이인복, 안축, 안보 등의 이상 8명은 익재공의 문생이다,

 

김광재, 김광철, 김영돈 등의 인물들이 대부분 과거를 통하여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 신흥사대부로서 하나의 정치집단을 형성하였으며, 민지(閔漬), 오잠(吳潛), 고세(高世), 박연(朴連), 최안도(崔安道), 강윤충(康允忠), 신청(申靑), 배전(裵佺), 신시용(申時用), 김지경(金之鏡), 박인수(朴仁壽), 고겸(高謙), 양재(梁載), 조륜(祖倫), 이청(李靑), 박청(朴靑), 기씨일가(奇氏一家)등의 부원권문세족과 부정축재및 인사권의 폐단을 일으킨 원흉들의 척결에 앞장 섰고, 자주적인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공민왕을 보좌하고 왕권을 강화 시켰으며 개혁의 선봉에 서서 보다 적극적인 성리학 보급에 앞장 섰다.

 

3. 학문적 연원도

 

안향은 유경(柳璥)의 문생이고 안향의 문하생인 국재 권부(菊齋 權溥)는 유경의 손서이다.

이제현은 권부의 사위로서 문하생이고 백이정의 문하생이기도 하며 그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은 백이정의 사위이다. 즉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하생인 동시에 사돈간이다.

 

담암백문보(淡庵 白文寶)는 백이정과 족친이며 그의 문하생으로 이제현과는 권부와 백이정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 동시에 이제현이 좌주(座主)로서 또한 그의 문생(門生)이다.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부자(父子)는 이제현의 문생으로 모두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렇듯 문생과 동문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초기 주자학은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 함양박씨), 백문보(白文寶 :익재공의 문생), 이인복(李仁復 : 이제현의 문생), 이곡(李穀(익재공의 문생으로, 목은의 선친), 박원계(朴元桂 : 익재공의 사돈), 권준(權準 : 국재공의 아들), 최원우(崔元遇), 최문도(崔文度), 전신(全信 : 익재공의 同榜), 한종유(韓宗愈), 노승관(盧承官 :익재공의 동방), 윤택(尹澤 : 익재공의 문생), 金진, 홍의손(洪義孫), 박보(朴珤), 송천봉(宋天), 최재(崔宰), 민사평(閔思平 : 동암공의 문생), 안축(安軸), 박인간(朴仁幹), 최해(崔瀣), 안보(安輔 : 익재공의 문생), 박리(朴理), 안진(安震), 김광재(金光載), 김광철(金光轍), 이암(李巖), 李達尊(익재공 아들), 박상충(朴尙衷 : 익재공의 문생), 정추(鄭樞 : 익재공의 문생), 李誠中(국당공 천의 아들), 이집(李集), 최용갑(崔龍甲 : 익재공의 문생), 이숭인(李崇仁), 유백유(柳伯濡), 김구용(金九容), 윤소종(尹紹宗), 이무방(李茂芳), 홍언박(洪彦博), 전녹생(田祿生), 김득배(金得培),김희조(金希祖 : 익재공의 사위), 허백(許伯), 김영돈(金永旽), 이공수(李公遂), 황석기(黃石奇), 안목(安牧 : 동암공의 문생) 등의 학자들에 의하여 발전하였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대에 이르러 권근(權近 : 국재공 증손),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이종학(李種學 : 목은공의 아들), 하륜(河崙), 길재(吉再), 김자수(金自粹), 맹사성(孟思誠), 박의중(朴宜中), 유창(劉敞), 유백유(柳伯濡), 변계량(卞季良), 이문화(李文和), 이담(李擔 : 익재공의 증손), 이종덕(李種德 : 목은공의 아들), 조신(趙愼), 심온(沈溫), 박인을(朴仁乙), 송문중(宋文中), 민안인(閔安仁), 이양중(李養中), 조호(趙瑚), 이우(李愚), 정가종(鄭可宗), 이연보(李廷甫), 염정수(廉廷秀), 이종선(李種善 : 목은공 아들), 金潛, 이존오(李存吾 : 석탄공),이승상(李升商 : 국당공의 증손), 김시용(金時用), 조준(趙浚), 권사복(權思復), 권중화(權仲和 : 익재공의 문생), 성사달(成士達), 김진양(金震陽), 신군평(申君平 :소부윤공 부인 의 외조부), 이달충(李達衷 : 국당공의 아들), 조신(曺信), 한수(韓脩), 문익점(文益漸), 이강(李岡), 고경(高慶), 노서(魯舒), 염흥방(廉興邦), 민제(閔霽). 한공의(韓公義), 이자을(李資乙), 하을지(河乙沚), 이인임(李仁任), 우현보(禹玄寶), 김경직(金敬直), 김인관(金仁琯), 정습인(鄭習仁), 원천석(元天錫), 염국보(廉國寶), 유숙(柳淑), 이인(李靭), 안을기(安乙起), 안경공(安景恭), 안종원(安宗源), 안원용(安元龍), 유량(柳亮)과 같은 신흥사대부들에 의하여 더욱 활발히 연구되고 발전 되었다.

 

양촌 권근(陽村 權近) 왈(曰)

吾家文正公 始以朱子四書 建白刊行 勤進後學 其甥 益齋 李文忠公師事親炙 以倡義理之學 爲世儒宗 稼亭,樵隱諸公 從而興起(오가문정공 시이주자사서 건백간행 근진후학 기생 익재 이문충공 사사친자 이창의리지학 위세유종 가정 초은제공 종이흥기)

 

淡庵白公 闢異端尤力焉 吾座主牧隱先生 早承家訓 ....儒士皆宗之.

(담암백공 벽이단우역언 오좌주목은선생 조승가훈......유사개종지)

 

1. 圃隱 정몽주의 학통연원도

   백문절(白文節 : 백이정의 선친)→이존비(李尊庇 : 백문절의 외삼촌)→채홍철(蔡洪哲)→김득배(金得培)→정

   몽주(鄭夢周)→조용(趙庸)→윤상(尹祥)→김숙자(金叔滋) <고려사 김득배 卒去 관련 참조>

 

2. 고려말의 사대부는 대부분 별동 윤상(別洞 尹祥)의문하에서 배웠으나 자료의 미비로 그 학문적 연원을 소상

     밝히지 못함이 아쉬운 일이다.

 

3.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학문적 연원은 정포은의 문인이 아니라 양촌 권근과 목은 이색의 문인임은 명백한 일이

    다. 포은 문집에 길재가 문인인 기록은 없으며 길재와 권근은 서로가 사제간임을 명시하였다. < 포은집, 목은문

    집, 야은문집, 양촌집 참조 >

 

4. 益齋 이제현은치암 박충좌와 함께 이재 백이정의 문인이라고 하였으며 그가 직접 서술한 그의 장인인 국재 권부

    의 묘지명을 참고하면 "그 사위요 스승으로 모신지 어언 47년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백이정이 충선왕을 따라 원에 갔을 때가 서기1298년이고 고려로 다시 귀국한 것이 1308년이었는데, 익재의 년보

   에 28세인 1314년에 백이정의 문하생이 되어 수업한 것으로 기록 하였다.

 

   그는 이미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 등의 문인과 사귀며 충선왕의 만권당에서 학문적 토론을 하였으며, 이어 1316

   년, 1319년, 1322년 세차례나 원에 간 기록이 있다.

 

   고려말의 정치적 개혁을 배후에서 주도하였고 시와 문장에 능하였으며, 이색이 찬하기를 " 도덕의 元首요 문장의

   正宗이며 태산북두와 같기는 韓退之(한유)요. 光風霽月은 주염계(周廉溪-주돈이)와 같다고 극찬하였다.

   ※ 정도전의 삼봉집 서문(序文)

 

   안축, 이곡과 함께 편년강목을 편수 하였고 백문보, 이달충(국당공 아들)과 함께 자신의 사가에서 고려 국사를 찬

   수하기도 하였다. 불교에 대하여 관대한 편으로 후학의 비판을 받았다.

 

5. 牧隱 이색은 그가 지은 여러 묘지명에 학문의 연원을 스스로 밝혔는데 그는 익재 이제현의 문생이며 초은 이인

    복, 복재 한종유, 급암 민사평, 형재 이공수, 송당 김광재, 행촌 이암, 父인 가정 이곡, 율정, 윤택에게서 직접 배웠

    고 이곡의 동년(同年)인 담암 백문보에게서도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의 정치적, 학문적 종장이며 정포은, 이도은과 함께 高麗三隱으로서 성리학의 조종사(祖宗師)라 칭했

   나 평소 우유부단하고 불교에 관심이 많아 후세의 지탄을 받았다.

 

6. 초은 이인복(樵隱 李仁復)은 그의 묘지명과 담암 백문보의 문집, 초은집, 목은집 등에 의하면 안향의 高弟인

    덕재 신천과 송재 권준, 익재 이제현, 이재 백이정의 문인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 이재 백이정이 경남 남해로

    양가서 卒한 시기가 서기1323년(충숙왕10년) 12월로서 당시의 이인복 나이가 16세 정도이니 그 보다 몇년 일찍

    귀양간 백이정에게 성리학을 배웠다는 것은 후세의 가필이 아닌가 의심 되는 바이다.

 

   양촌 권근은 그를 국제 권부의 문인이라고 적었다. 이색이 문장의 정종(正宗)이며 익재의 학문적 연원을 계승하

   였다고 하였으며 호정 하륜은 박학다식하다고 평했다. 안진, 안축, 이곡과 함께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을 찬

   수하였으며, 품행이 엄숙하고 헌거(軒擧)하였다.

 

7. 담암 백문보(淡庵白文寶)는 처음 역동 우탁에게서 역학을 배웠고 곧 국재 권부와 동종인 이재 백이정의 문하에

    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익재 이제현을 座主로 하는 문과에 급제하여 그의 문생(門生)인 동시에 동문이었다.

 

   또한 근재 안축의 문하에서도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다. 역학에 정통하고 강력한 척불론을 주장 하였으며 정치도

   감사로서 공민왕대 개혁정치의 선봉에 섰다.

 

   문장을 잘 짓고 청렴결백 하였으며 史官으로서 목숨을 건 직필을 서슴치 않았다. 이제현, 이달충과 함께 익재의

   사가에서 고려 국사를 찬수하기도 하였으나 마치기도 전에 홍건적의 난으로 모두 산일 되었다.

 

8. 급암(及庵 閔思平)은 이색이 찬하기를 " 자품이 청수하고 학문이 정민하며 문학이 넓고 행검이 돈독했으며 성리

    학에 힘쓰고 후생을 길러 사문(斯文)을 흥기함에 학사.대부가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렀다"라고 평했다.

 

9. 일재 권한공(一齋 權漢功)의 학문적 계통은 하나의 거대한 학단을 이루었으나 심왕인 고를 세우려 하였다가

    이 성사 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하여 그 문하임을 모두가 숨겨 자세한 자료가 전하지 못한다.

 

10. 근재 안축(謹齋安軸)은 동생 안보(安輔)와 안집(安輯) 삼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안보와 함께 원제과에

       격하여 안동권씨, 성산이씨, 경주이씨 등과 함께 고려말 최대의 명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쾌헌 김태현동암

       이진의 문하서 수업 하였고 용모와 풍채가 근엄하고 언행이 방정하였으며 평생을 근검하게 생활하여 당시 사

       대부의 모범이 되다.

 

      이제현, 이곡과 함께 편년강목을 편수, 안진, 이곡, 이인복과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을 찬수함.

 

11. 국재 권부(菊齋 權溥)는 조간(趙簡)과 함께 박항(朴恒)의 문생이며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 간행을 건

       의하였으며 후진양성과 성리학 보급에 공헌을 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력과 구봉군가(九封君家)로 유명하며 그의 아들 권겸(權謙)이 기철과 난을 일으켜 주살 되고

     문은 치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사위인 이제현과 당시 권력을 장악한 문생들의 힘으로 멸문의 화를 면했다.

 

     후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과 지재 권제(止齋 權蹄), 일재 권채(一齋 權採), 매헌 권우(梅軒 權遇), 소항당(권

     람(所閑堂 權擥)같은 인물이 조선조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고려사 열전에 이르기를 주자사서집 주간 백간행

     동방성리지학자부창주은 대집...효행록 저행우세(朱子四書集註建白刊行 東方性理之學 自溥倡註銀臺集 ...

     孝行錄 著行于世...) 라고함.

 

12. 가정 이곡(稼亭 李穀)은 안축에게 배웠고 익재 이제현을 좌주로 그 문생이 되었다.

       문장이 유창, 아담 하였으며 그 뜻이 오묘하였다.이제현 , 안축과 함께 편년강목을 편수 하였고 안진, 안축,

       인복과 함께 충렬 이후의 3조 실록을 찬수하였으며 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13. 고려말 성리학의 전래 시기와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간 년대와 누가 처음으로 성리학을 전래하였는 가에

       대하여 여러가지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안향이 원에 간 시기를 서기1298년 8월로 봄이 가장 타당하

       다.

 

      충렬왕24년 1월에 세자인 충선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는데 다시 8월 임신일에 사신 발로올이 국왕의 인신(印信

       )을 빼앗아 전왕인 逸壽王 충렬에게 돌려주고 충선왕을 원나라로 소환 하였고 원나라 성종(成宗)이 힐문하되

       그곳 승상호종한 신하 중에 우두머리가 대답하라 하니 첨의참리(僉議參理) 안향이 대답하였는데, 성종이 적

        절한 대답에 탄복하고 더 이상 충선왕을 문책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충렬왕25년 9월에 안향을 수국사(修國史)

        에 임명한 사실, 1299년 5월에 장군 백효주(白孝珠)가 원나라에 새매를 받치러 간 것은 그의 형인 백이정을 만

        나러 간 것으로 보인다.

 

      안향은 1243년생인데 당시 56세로 첨의참리였고,백이정은 출생년대가 명확치 못하다.

      그의 동생이 당시 장군이면 적어도 백이정은 1260년 前後生이며 그의 장인인 김순(金恂)이1258년생이니

      1270년 後生이 되어야 하는 모순이 있다.

 

      백씨구보에는 백이정의 출생시기를 1247년 정미년으로 기록하고 1275년(충렬왕 원년)에 韓康과 朴恒을 좌주

      로 하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는데 권부의 부친인 권단(權단)의 열전에 의하면<判衛尉寺事 掌試取士多知

      名士權漢功, 金元祥崔誠之, 蔡洪哲, 白이正 後皆爲名相...>이라 하였으니 백이정은 충렬왕10년(1284년)

      10월에 치러진 지공거 金周鼎, 동지공거 권단의 문과에서 趙宣烈, 권한공, 김원상, 최성지, 채홍철과 급제한 것

      으로 보면 서기1267년생으로 32세에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으며 만 10년 뒤인 1308년에 돌아온 것이

      다.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로 남해에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1323년 12월에 57세의 나이로 졸한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고려사 열전 안향의 記에 < ....僉議參理忠宣卽位拜參知機務行東京留守 集賢殿大學士 鷄林府

      復爲參理 及烈復位 忠宣如元珦從行...興學養賢爲己任...建議置 贍學錢...>과 열전 白文節 記에 <子이

      正 孝珠. 이正 僉議評理 商議會議都監事 後封 上黨君 時程朱之學 始行中國 未及東方 이正在元得而 學之

     東還 李齊賢 朴忠佐 首先師受 ...>의 내용을 참고하면 성리학을 최초로 원에서 전래한 사람은 안향과 권준이며

     백이정은 직접 배워와서 그 후에 가르쳤고, 권부와 이제현은 많은 문인을 배출하고 부흥시킨 인물이라 할 수

     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