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조익(趙翼) 선비(先妣)의 숙인(淑人) 묘지문(墓誌文)

야촌(1) 2009. 8. 8. 02:32

조익 선비(趙翼 先妣)의 숙인(淑人) 묘지문(墓誌文)

 

 아들 조익 찬(子 趙翼 撰)

 

선비 숙인의 성은 윤씨(尹氏)이다. 그 선조는 해평현(海平縣) 사람이다. 고려조에 수 사공 상서 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된 군정(君正)이라는 분이 그 비조(鼻祖)인데, 그 뒤 대대로 저명한 후손들이 배출되었다.

 

조부 휘(諱) 변(忭)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인데, 두 아들인 영의정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문정공(文靖公) 두수(斗壽)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문정공(文貞公) 근수(根壽)가 공훈을 세우고 귀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해징부원군(海澄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고(考) 휘 춘수(春壽)는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공주 이씨(公州李氏)이다. 선비는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 13) 4월 26일에 공주(公州)의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휘는 모(某)요 성은 조씨(趙氏)인 우리 가군(家君)에게 시집왔다. 아들과 딸을 모두 합쳐서 7인을 낳았는데, 기른 자식은 오직 1남 1녀였다. 아들은 나이고, 딸은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이정망(李廷望)에게 출가하였다.

 

나는 영천 군수(永川郡守) 현덕량(玄德良)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몽양(夢陽)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이고, 다음 진양(進陽)과 복양(復陽)과 내양(來陽)은 모두 장가들었고, 현양(顯陽)은 아직 관례(冠禮)를 행하지 않았다. 딸은 어리다. 외손으로는 손자 이명담(李命聃) 1인이 있는데 아직 관례를 행하지 않았다.


집안이 대대로 경성 안에서 거주하였는데, 임진왜란 뒤에 광주(廣州)의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가군이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가 되었다. 기해년(1599)에 천장접대도감(天將接待都監)의 낭청(郞廳)이 되어 가족을 이끌고 경성으로 들어갔다가, 경자년(1600) 가을에 도감이 없어지자 광주로 돌아왔다.


임인년(1602)에 내가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 선조고(先祖考)가 계셨는데 매우 기뻐하여 선비(先妣)에게 술잔을 내리면서 “손자를 잘 낳아 준 자부에게 축하 술잔을 내린다.”라고 하였다. 나는 운수가 기박하여 불우하게 지내면서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서만 6년을 보내다가 기유년과 경술년 사이에 잠깐 현직(顯職)에 있게 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외방으로 나가 고산 찰방(高山察訪)이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는 더 이상 벼슬하지 않은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다.그러다가 계해년에 반정(反正)이 이루어지면서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에 가군은 보은 현감(報恩縣監)이었는데, 그해 겨울에 그만두고 돌아왔다가 을축년(1625, 인조 3) 봄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갑자년(1624) 겨울에 직제학을 거쳐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승지가 되었다.

 

병인년(1626) 가을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간청하여 허락을 받고는 선비를 모시고 부임하였다. 선비는 평생토록 가난한 생활을 하였는데, 내가 벼슬한 지 20여 년 만인 이때에 와서야 조금이나마 영예롭게 봉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정묘년(1627) 겨울에 대사간(大司諫)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기사년(1629) 여름에 가군은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서너 해 동안 삼사(三司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와 국자(國子 성균관)와 은대(銀臺 승정원)와 양전(兩銓 이조와 병조)을 차례로 거친 뒤 금년 봄에 이조 참판으로 대사성을 겸하게 되었는데, 선비가 3월 10일에 주자동(鑄字洞) 우사(寓舍)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74세였다.


선비는 마음가짐이 정직하여 조금도 삐뚤어진 생각이 없었고, 성격이 염담(恬淡)하고 간결하여 외물(外物)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않았으며, 실없이 희롱하는 비속한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특출하게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나이 7세에 언서(諺書)를 통하였고, 바느질 등 여성의 일을 배워 모두 솜씨가 좋았으며, 내외의 친족 및 인척이 되는 집안의 기일(忌日)을 모두 잘 기억하였다.

 

외조(外祖)인 참찬(參贊) 부군(府君)이 여러 딸들 중에서도 가장 예뻐하였으며, 재예(才藝)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던 큰외숙 첨정(僉正) 휘 호(皥) 역시 여러 누이동생들 중에서 가장 예뻐하며 항상 선비의 뛰어난 점을 친족들에게 말하였으므로 친족들이 모두 남다르게 여겼다.


선비는 친척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깊었으며, 제사를 받드는 일을 매우 성실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남의 위급한 상황을 보면 친소(親疎)와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불쌍하게 여기면서 반드시 구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두가 성심에서 우러나왔고 거짓으로 꾸미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얻는 것이 있으면 꼭 남에게 주었는데, 항상 말하기를 “별미(別味)를 얻을 때마다 친척에게 주고 싶어서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소싯적에 부모의 집에 있을 때 여러 형제들은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선비만은 유독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형제들이 얻은 것을 더러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비가 평생토록 가난하게 산 것은 집안의 재산이 본래 넉넉하지 못해서일 뿐만 아니라 탐내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비는 그렇게 사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면서 부호(富豪)의 생활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평생토록 부녀자의 일을 손에 쥐고 놓지 않았으며,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오히려 불안하게 여기곤 하였다. 여러 족질(族姪) 중에 빈궁한 자가 있으면 항상 걱정해 마지않았다.

 

언젠가 기근이 들었을 때에 어떤 족질이 선세(先世)에 분할하지 않은 전지(田地)를 팔려고 하자, 가군(家君)이 “선세의 재산은 종손(宗孫)이 처분하는 것이 마땅하니, 다른 후손들이 멋대로 팔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선비가 말하기를 “자손이 굶어 죽을 처지에 놓여 있는데, 조상의 전지를 팔지 않으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비가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빈궁한 자를 불쌍하게 여긴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가군이 어떤 때 노여워하는 일이 있으면 선비가 반드시 너그럽게 풀어 주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런 과정에서 호되게 꾸지람을 받는 한이 있어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척과 비복은 물론이요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도 모두 선비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시종일관 한 사람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시비(是非)와 호오(好惡)와 관련해서는 정대하기 그지없었으며, 고금에 걸쳐 본받을 만한 사람들의 선행을 마음속으로 항상 경모(敬慕)하면서 때때로 이야기하곤 하였다.

 

선비는 광해(光海)의 시대를 당하여 시사(時事)를 들을 때마다 참고 견딜 수 없을 것처럼 비분강개하면서 애를 태우곤 하였다. 그때에 집안 형편이 매우 빈궁한 처지에서 내가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차라리 함께 곤궁한 생활을 할지언정 세상의 쓰임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척이 어째서 이처럼 고통을 자초하느냐고 말하면, 선비는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벼슬하면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당시에 숨어 사는 것을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기면서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은 것도 사실은 부모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아, 우리 모친의 인후(仁厚)한 덕성과 단결(端潔)한 성품으로 말하면, 부인 중에서 찾아보기가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글을 읽고 도리를 아는 남자들이라 할지라도 따라가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나는 우졸(愚拙)하고 불초(不肖)한 점에 있어서 사람들 중에 가장 형편없다고 할 것인데, 그래도 마음을 먹는 것이 회휼(回譎)할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이익에 대해서도 그다지 탐욕을 부리지 않았는데, 이것 역시 사실은 근본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재주도 없이 외람되게 총애를 받아 현요직(顯要職)을 역임하였는가 하면 자손들도 제대로 기를 수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선비가 인후하고 선량했기 때문에 하늘이 말없이 보살펴 준 덕 아닌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장차 5월 10일에 광주(廣州) 하도(下道) 북방리(北坊里) 직동(直洞)이라고 하는 산의 정좌계향(丁坐癸向)의 언덕에 장례를 행하려 하니, 이곳은 실로 증조인 찬성(贊成) 부군(府君)의 묘소 뒤쪽이다.

 

 금년은 숭정(崇禎) 4년 신미년(1631, 인조 9)이다. 4월 갑진삭 22일 을축일에 불효자 가선대부(嘉善大夫) 전 이조참판 겸 성균관대사성 익(翼)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묘지(墓誌)를 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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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先妣淑人墓誌文

 

先妣淑人。姓尹氏。其先海平縣人。麗朝有爲守司空尙書左僕射。曰君正。其鼻祖也。世有聞人。祖諱忭。軍資監正。以兩子領議政,海原府院君,文靖公斗壽。海平府院君,文貞公根壽勳且貴。 贈議政府領議政,海澄府院君。考諱春壽。牙山縣監。 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妣公州李氏。以嘉靖戊午四月二十六日。生于公州外家。年十八。歸于我家君諱某。姓趙氏。凡生男女七人。所育唯一男一女。男翼也。女適漢城府參軍李廷望。翼娶永川郡守玄德良女。生五男一女。男長夢陽。廣興倉主簿。次進陽,復陽,來陽。皆已娶。顯陽未冠。女幼。外孫男一人。命聃。未冠。家世居京中。壬辰亂後。歸廣州村舍。至丙申。家君爲典設司別坐。己亥。爲天將接待都監郞廳。挈家入京。庚子秋。都監罷。乃還廣州。壬寅。翼幸登第。是時先祖考在。喜甚。以觴屬先妣曰。慶善生子婦也。翼奇蹇不偶。滯槐院六年。己酉庚戌間。稍得顯仕。其明年。出爲高山察訪。又二年。謝病歸。因不復仕。至十年餘。値癸亥 反正。以銓郞召。而家君爲報恩縣監。其冬罷歸。乙丑春。爲 社稷署令。而翼已於甲子冬。由直提學陞通政。爲承旨。丙寅秋。由都承旨 特除漢城府右尹。乞得開城留守。奉先妣以行。先妣平生食貧。翼釋褐二十餘年。至是始粗得遂其榮養之志。丁卯冬。以大司諫召還。己巳夏。家君遷繕工監僉正。而翼三四年間。歷踐三司國子銀臺兩銓。今年春。方以吏曹參判兼大司成。而先妣以三月十日。終于鑄字洞寓舍。享年七十四。先妣秉心正直。少無回曲之念。恬淡簡潔。於物無所愛惜。不喜爲俚俗戲慢之語。幼聰悟出人。性行端淑。異於凡兒。年七歲。通諺書。學針線女事皆能之。內外族黨及其姻家忌日。皆能記之。外祖參贊府君於諸女中最愛之。長舅僉正諱暭。以才藝名於世。亦於諸妹中最愛之。常言其賢於門族中。門族皆異之。待親戚。恩意甚深。奉祀事甚勤。見人窘急。無親疏遠邇。無不矜憫。必欲救之。然皆出於誠心。少無矯飾。凡有所得必與人。常曰。每得異味。思與親戚。不欲食也。少時在父母之家。諸兄弟有所請求於父母。先妣獨無所求。以是。兄弟之所得者或不得也。其平生貧居。非但貲財本不裕。亦由無所貪吝而然也。且處之安焉。不以富豪爲羨也。平生。手執女工不釋。無事則以爲悶也。諸族姪貧乏者。憂念不已。嘗於饑歲。一族姪賣先世未分田。家君以爲先世之財產。宗孫當處之。衆孫不可擅賣。先妣謂子孫飢餓。不賣祖田。何以生活。其輕財哀窮類如此。家君或時有所怒。必寬解之。雖被呵責不避也。自親戚婢僕。隣里皆服其惠。終始無一人怨者。然於是非。好惡極其正。古今人善行可法者。心常敬慕。時時言之。方光海時聞時事。輒慷慨憤悶。如不能堪。時貧窘方甚。而翼累被除拜。寧同於困窮。不欲其爲世用也。親戚有言何自苦如此。先妣謂時不可仕也。翼當時甘心潛伏。無意於世者。實承父母之志也。嗚呼。吾母仁厚之德。端潔之性。非但在婦人極鮮。雖男子讀書知理者。亦所不及多矣。翼愚拙不肖。最在人下。然其處心不至回譎。於利不甚貪冒者。實有所本。而其匪才叨寵。揚歷顯要。又能繁育子姓。無非先妣仁善陰騭有以致之也。將以五月十日。葬于廣州下道北坊里山曰直洞丁坐癸向之原。實曾祖贊成府君墓後。今年崇禎四年辛未歲也。四月甲辰朔二十二日乙丑。不孝男嘉善大夫,前吏曹參判兼成均館大司成翼。泣血謹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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