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야촌(1) 2009. 9. 11. 03:34

경향신문 >매거진X> 책 2002. 5. 17

 

[천년벗과의 만남] 스스로 쓴 묘지명

 

큰 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검토하다 보면 좀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문집에서는 그 문집 주인공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명이 실려 있게 마련인데 다산의 경우에는 그 묘지명을 자기 자신이 써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은 묘지명이란 뜻의 이 글은 남이 내 생애를 정리하고 평가하지 않고, 내 스스로 내 생애를 정리하고 자신을 평가한다는 특별한 행위를 담아내고 있다. 다산이 그렇게 자신이 썼다는 점을 밝힌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묘지명이란 본래 타인이 죽은 자를 위해 쓰는 글이기에 굳이 그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을 때에는 묘지명을 학자와 문사에게 받아서 그 글을 사기에 새겨 넣고 불에 구워서 시신과 함께 묻었다.

 

묘지명을 새겨넣은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후세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증거물인 셈이다.

그러나 이 지석은 그러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평생 행적에 대한 준엄한 평가를 담게 된다.

 

묘지명은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역사를 위해서도 중요한 실용적인 문체로 그 의미가 깊다.

그런 묘지명을 남이 아닌 죽은 자 자신이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고 미리 써놓아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특히 후기에는 스스로 자기 묘지명을 쓰는 일이 적지않게 일어났다. 그 연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무엇보다 남들이 쓰는 묘지명이 죽은 자를 위한 맹목적 예찬의 글이 되어 거짓된 내용으로 꾸며지는 극단적 폐단까지 낳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름과 가계 등 내 용의 일부만 바꾸면 어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묘지명, 그러한 죽은 글, 생명력 없는 평가를 거부하려는 반발의식에서 아예 자기 자신이 묘지명을 쓰고자 하였다.

 

남들의 허황된 찬사나 듣지 않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를 기록하려는 의식은 자의식이 강한 학자와 문사들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다. 기묘사화 때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음애(陰厓) 이자가 쓴 자찬묘지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 또 사후에 묘지명을 남에게 부탁할 자식이 없는 경우에도 스스로 묘지명을 썼다. 남학명(南鶴鳴)이나 남공철(南公轍)이 그 사례다.

 

또 내가 역사에 무슨 큰일을 남겼다고 남에게 묘지명을 받겠는가 하는 겸손한 생각에 의하여 스스로 쓰기도 하고, 또 자기가 영위한 삶과 개성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안다고 하여 자신이 쓰기도 한다. 조선후기 들어 이러한 일은 일부 학자와 문사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중국 문단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명대의 저명한 문인인 서위(徐渭)나 장대(張岱)의 ’자위묘지명(自爲墓誌銘)’은 우리 문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게 살아온 예술가의 삶을 마음껏 표현해내었다.

 

이렇게 스스로 묘지명을 쓴 인물들 가운데에는 유척기(兪拓基), 남유용(南有容), 서유구, 강세황(姜世晃), 박세당(朴世堂), 김택영(金澤榮)이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글은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삶과 의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안대회 :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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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데 왜 그들은 이런 글을 썼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 마저도 뛰어넘어 자신을 냉철한 시선

    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을 지닌 선비였다는 점이야. 세상의 시선이든 죽음이든 훗날의 평가든 상관없

   이 눈감는 날까지 난 나의 삶을 살겠다는 자기다짐의 표현은 혹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