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제의례·제문

포저 조익선생의 부인에 대한 제문.

야촌(1) 2009. 11. 8. 22:01

■ 포저 조익 선생의 부인에 대한 제문

   (浦渚 趙翼 先生의 夫人에 대한 祭文)

 

포저 조익 찬(浦渚 趙翼 撰)

 

아!

그대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지금 어느덧 53년의 세월이 흘렀소!.

동년(童年)에 서로 만나 서로 아끼고 중히 여기면서 함께 백발이 되었는데, 지금 그대를 잃고 말았으니 나의 비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소!.

 

그대가 이제 영원히 모습을 감추고 이 세상을 떠나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 애통한 것은 물론이요,

나의 신세를 생각해 보아도 고독하게 외로운 그림자만 남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슬픈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고 눈물을 금치 못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오.


그대가 힘들게 낳아 기른 자식이 모두 여덟인데, 아이 때에 죽은 자식이 둘이고 장성해서 일찍 죽은 자식이 또 둘이었소. 게다가 집안이 항상 빈한해서 평생토록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에 의식(衣食)을 마련하려고 애를 썼지만, 상하 대소 모두 합쳐 10여 인의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언제나 부족한 형편이었지요. 이것이 비록 부인(婦人)의 일상적인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너무도 고생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것이외다.

 

아, 슬프오이다.
그대는 사람됨이 질실(質實)하여 꾸미는 일이 적고 남을 속이는 마음이 없었으며, 성품이 또 간중(簡重)하고 깨끗해서 비록 가난해도 구차하게 얻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남에게 빌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한 번도 비속한 말을 하는 법이 없었고 음란한 행동을 하는 비복(婢僕)을 보면 반드시 마음속 깊이 혐오하곤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그대의 장점으로서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이었소.

 

아, 슬프오이다.
그대를 이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내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그대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나의 나이도 지금 벌써 칠십에 가까우니 세상에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겠소.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를 그리워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 죽어서 같은 묘혈(墓穴)에 있는 시간은 멀리 만세토록 이어질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또 무슨 유감이 있겠소이까.

 

아, 슬프오이다.
금년 정월에 와촌(瓦村)에서 염병(染病)을 피해 그대가 먼저 읍내(邑內)로 들어갔고, 나는 읍내의 민가 중에 노친을 모실 만한 넓은 방이 없었으므로 노친을 모시고 서야(瑞野)의 새집으로 돌아왔지요.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도 채 되지 않았건만 인마(人馬)가 갖춰 지지 않은 적이 많아서 자주 찾아가 보지 못했는데, 그대가 병중에 여러 차례나 나를 보고 싶어 하였지요.

 

그러다 지금은 영원히 헤어지고 말았는데, 그대도 혹시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나를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겨 있을지도 모르겠구려. 아, 마음이 쓰리고 아플 따름이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집안의 운세가 험난하기 그지 없어서 자녀와 여서(女婿)와 손자 등 모두 8인을 잇따라 잃었으므로 항상 비애에 젖어 나날을 보내곤 하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이 때문에 그대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만약 비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면 나는 어찌하여 유독 죽지 않고 살아 있단 말이오.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외다. 아니면 기혈(氣血)에 강약(强弱)과 허실(虛實)의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길고 짧은 수명에 일정한 한계가 있어서 이런 결과를 빚은 것은 아닐는지요.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한 것은 우리 부부가 똑같았지요.

지금 그대는 지하에 가서 죽은 아이들을 만나 보고는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회포를 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또 어느 때나 그대를 따라 지하에 내려가서 그대와 죽은 아이들을 만나 볼 수 있을는지요.

 

이 인간 세상에 임시로 붙어사는 나의 목숨이 앞으로 혹시 10여 년이나 길게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마치 승려와 같은 처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다고 하리이까.


지금 대흥(大興)에 새로 장지(葬地)를 얻었소마는 연월(年月)이 이롭지 못하다고 하기에 마침내 정식으로 장례를 행하지 못한 채 그 지역에 임시로 장사 지낸 뒤에 내년의 길일(吉日)을 기다리기로 하였는데, 지하에 내려갈 날이 가까워 오기에 한 잔의 술로 이렇게 영결을 고하게 되었소이다.

 

그대는 이 사실을 아는지요, 모르는지요.

아, 슬프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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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익(趙翼, 1579~1655)

 

본관 풍양(豊壤). 자 비경(飛卿). 호 포저(浦渚)·존재(存齋). 시호 문효(文孝). 음보(蔭補)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고, 1598년(선조 31) 압운관(押運官)으로 미곡 23만 석을 잘 운반하여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16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11년(광해군 3)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23년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고, 1625년(인조 3)부호군(副護軍).형조참의를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때예조판서로서 달아난 죄로 처벌받은 뒤 1643년 재기용되어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이조·예조의 판서,대사헌이 되고, 1648년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우의정으로 인조의 행장찬집청찬집관(行狀纂輯廳纂輯官)을 겸한 후 좌의정에 올랐다.

 

그 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김육(金堉)의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고,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禮學)에 밝았으며,음률·병법·복서(卜筮)에도 능하였다.

 

개성의숭양서원(崧陽書院),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에《포저집(浦渚集)》.《서경천설(書經淺說)》.《역상개략(易象槪略)》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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