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가망신을 염려하면서 - 왕달애비
조선시대의 영남지방에 글하는 선비들이 특히 많았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니까,
조금은 덜 알려진 선비의 글을 소개하는 것쯤은 별난 일이 아닐 터이다.
이백년 쯤 전 경상도 동북쪽 바닷가 고을인 영해(寧海)에 호가 면운재(眠雲齋)인 이주원(李周遠,1714∼1796)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이 선비는 영남지방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학자였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存齋)인 이휘일(李徽逸,1619~1672)의 증손자이니까, 생가 증조부는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1627~1704)이다.
증조부(曾祖父) 형제만큼 큰 명성과 학문적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이주원도 소년시절부터 문재가 있어 그 종조부(從祖父) 밀암 이재(密菴 李栽,1657~1730)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가 영남 남인들이 힘쓰지 못했던 때문인가, 그는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평생을 고향에서 독서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83세이던 1796년 어느 날 글을 보다가 책을 베고 잠자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책의 문집 이외에도 몇 편의 편저가 더 남아있으나, 학계에 주목을 받을만한 저작은 아닌 듯하다.
이 선비가 남긴 글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어 한 편을 소개한다. <단사삼기사(丹사* 三記事)>에 실린 세 편의 글 중 첫 대목이다.
원문을 풀어 보기로 한다.
왕 달 애비는 영해 바닷가 어부 이다. 본인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아들 이름이 왕달 이므로 왕달애비라고 부른다고 한다. 노인들에게서 들었는데, 그가 바다에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에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단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아득히 먼 곳, 하늘과 구름이 맞닿은 곳을 오래도록 살펴본단다.
그러고는 옷을 훌렁 벗고 수풀에 들어가서, 아침 이슬을 온 몸에 흠뻑 묻힌 뒤에야 배를 띄웠단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일이 있었다. 아들 왕달이를 함께 데리고 다녔는데, 두꺼운 종이로 왕달이의 두 눈을 가리고 목뒤로 단단히 묶어 풀지 못하도록 한 뒤에야 배를 출발시켰다는 거다. 바다 멀리 5, 6백리쯤 나아가서 어느 곳에 다다르면 물고기를 잡는데, 크고 살찌지 않은 놈이 없었고, 그래서 다른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보다 늘 곱절이나 비싼 값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놈들을 잡았는지 물어보면, 씨익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사나흘에 한번 나가거나 십여 일에 한번 나가거나 했는데, 그 때마다 왕달이 눈을 가리고 나갔단다. 그런 그도 늙고 병들어서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달이가 물고기를 잡아왔는데, 예전에 그 애비가 잡아온 것과 똑 같았단다. 애비가 놀라서 물었다.
“너, 이것들 어데서 잡아 왔나?”
왕달이가 대답하였다.
“예전에 고기 잡던 곳을 다녀왔지요.”
애비가 다시 물었다.
“번번이 네 눈을 가리고 갔었는데, 어떻게 그곳을 찾아냈나?”
왕달이 대답했다.
“오래도록 다니다보니, 저절로 그 자리를 알게 되데요.”
그러자 애비가 깊은 탄식을 하면서 말하였다.
“너 이제 큰 일 나겠다. 내가 예전에 물고기 잡던 곳은 바다 한가운데 중심이다. 파도가 하늘에 달라붙어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는 곳이고, 물 속 골이 깊어서 큰 물고기들이 모이는 곳인데, 사람들이 안가는 곳이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그물을 피할 줄도 모른다. 그 덕분에 나는 물고기를 잘 잡을 수 있었다.
내가 너에게 그 곳을 가르쳐주지 않은 이유는 네가 그곳을 만만히 보고서 쉽게 빠지는 화를 당할까 염려해서였다. 이제는 네가 이미 알아냈으니, 너는 종당에는 고기밥이 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웃들까지도 남아나는 이가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한 그는 그 날로 배와 더불어 어구 일체를 몽땅 팔아 버리고는 아들을 데리고 육지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다시는 배를 타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대대로 안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해 사람들은 그가 고기 잡으러 가던 곳을 어림짐작으로 가리키면서 ‘왕달애비물길’이라고 말하곤 한단다.
이상이 〈단사삼기사〉 첫 대목의 전문인데, ‘왕달애비 이야기’라는 제목은 필자가 편의상 붙인 것이다.
세상에서 소리를 가장 잘 듣는 사람이 사광이고, 누구보다도 맛을 잘 아는 사람은 역아라고 했던가.
맹자가 위 이야기를 알았다면 그 특유의 웅변으로 이 세상에서 물고기를 제일로 잘 잡는 사람은 왕 달 애비라고 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왕 달 애비는 그만의 고기잡이 비법이 있었다.
그 안목과 솜씨에 날씨만 좋으면, 매일같이 바다에 나가서 동해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그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알려주었다면 자손대대로 그 이익을 누릴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나흘에 한번, 열흘에 한번, 주기를 일정치 않게 한 것조차도 분명 왕달애비 만의 어로비법이었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물고기를 잡는 그의 태도이다.
남들이 가지 못하는 곳에 그 만의 어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물고기 씨가 마를까를 걱정하고, 눈앞의 독점적 이익에 몰입하다가 신세 망치는 일이 있을 것을 더욱 경계하였다.
요즘 세간에 패가망신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스컴을 통해 연일 들려오는 실망스런 사건이야 조금 더 기다려야 그 진상을 알 수 있겠지만, 탐욕으로 얼룩진 권력은 반드시 패가망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이미 알겠다.
왕 달 애비는 어부 이니까 상민이었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능력은 탁월하였지만 교육을 받은 이도 아니고 출세한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름 석 자 조차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왕달애비도 자신의 분수를 알고, 패가망신을 경계하여 마침내 자손들을 지켜내었다.
능력 있는 사람들, 특히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 이 다음날 두고두고 자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거든 모름지기 새겨볼 일이다.
↑대왕암_권기윤(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글쓴이 : 안병걸
◇안동대 동양철학과 교수
◇주요저서
*갈암 이현일: 경세의 뜻을 품은 큰 선비, 한국국학진흥원, 2008
*봉황처럼 날아오른 오미마을, 민속원, 2007
*서원, 한국사상의 숨결을 찾아서, 예문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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