刑曹佐郞活溪李公墓碣銘 幷序
(형조좌랑활계이공묘갈명 병서)
◇생졸년 : 1709년(숙종 35년)~1784(정조 2)
◇27世 이대유(李大㕀) / 익재공후 재사당공파
덕수 장유 찬(德水 張維, 撰)
(1587년∼1638년)
호남(湖南)에 은군자(隱君子)가 있었으니, 바로 활계(活溪) 이공(李公)이다.
학문을 독실히 하고 힘껏 실천하면서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지마는 사방의 인사들이 점점 소문을 듣고는 공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공이 죽자 향리의 부로(父老)와 자제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 선생이야말로 행실이 지극하고 덕성이 순후하여 향리의 모범이 되셨다. 옛날에 일컫던 향선생(鄕先生)은 바로 이런 분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마침내 서로 더불어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에 이르렀다.
그 뒤에 공의 아들 이순(以恂)이 또 묘갈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고는 소사도(小司徒) 이공(李公)을 통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지어 주기를 청했다. 가장을 상고해 보건대, 공의 휘(諱)는 대유(大㕀) 요, 자(字)는 경인(景引)이다.
가계(家系)는 계림(鷄林=慶州)으로부터 비롯되니 신라(新羅)의 대신 알평(謁平)의 후예요, 고려(高麗)의 재상 익재(益齋 이재현(李齊賢) 문충공(文忠公)의 10대손이다. 증조 원(黿)은 문장과 절행(節行)의 소유자로서 관직이 예조 좌랑에 이르렀고, 조부는 군수 수(洙)이고, 부친은 생원 종윤(悰胤)으로 문행(文行)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 모친은 창원 정씨(昌原丁氏)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외가(外家)에서 길러졌는데, 학문에 스스로 분발하여 책이라면 대개 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직 마음을 안으로 경주하여 궁행(躬行) 실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정 부인(丁夫人)을 섬김에 있어서는 곡면(告面=출타할 때 아뢰고 돌아와서 얼굴을 보이는 것)하고 정성(定省=잠자리를 봐 드리고 아침에 안부를 여쭙는 것)하는 것을 모두 법도에 맞게 하였으며, 집안이 아무리 빈한해도 시절따라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드렸고, 안색과 목소리를 그지없이 온화하고 곡진하게 하면서 모친의 뜻을 받들어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였다.
그 뒤 거상(居喪) 중에는 슬퍼하는 마음과 예식 절차를 모두 걸맞게 하였으며 묘소 옆에서 초막 생활을 하는 동안 한번도 치아를 드러내 보인 일이 없이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그리고 평소 아침에 일어나서는 반드시 사당(祠堂)에 참배를 드림은 물론 제사 때엔 정성과 공경하는 마음을 극진히 하였고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마치 상(喪)을 당했던 날처럼 처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살아 계실 때처럼 하고 멀리 계신 이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처럼 추모하는 마음에서 발로된 것으로서 몸을 마치도록 한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집 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엄하게 대하지 않아도 질서가 잡혔으며, 졸라매는 생활 속에 먹고 살기가 어려워 간혹 거친 밥마저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있었으나 늘 마음만은 평안하였다. 나라에 난이 발생할 때면 문득 전후에 걸쳐 받은 고신(告身)을 품에 안고 북쪽을 바라보면서 통곤하곤 하였고, 국기(國忌)를 만나면 마치 어버이의 기신(忌辰)처럼 여기면서 늙도록 이런 일을 폐하지 않았다.
이 와 함께 친척과 고구(古舊)들에게 돈후하고 온화하게 대하면서 각각 멀고 가까운 관계에 따라 은의(恩意)를 적절하게 베풀었으며, 특히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해 줄 때에는 남의 곤란한 처지를 자기 일처럼 급히 여기면서 집안 사정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크게 흉년이 든 때에 과객(過客)이 지나가다 공의 집에 들러 며칠 동안 묵은 일이 있었는데, 그가 떠나려 하자 쌀독을 모두 긁어 그에게 양식으로 내주었다. 이에 가인(家人)이 당장의 끼닛거리가 없다고 고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집에 있는 사람이야 양식이 떨어져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과객을 길바닥에 쓰러져 죽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공이 의리에 입각하여 남을 우선하고 자신을 뒤로 돌리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31세에 상사(上司=성균관)의 선발 시험에 입격(入格)하였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 성 선생(成先生)이 이조에 몸담고 있을 때 공의 명성을 듣고는 사옹원 참봉에 제수하였는데, 공이 마지못해 일어나 명에 응하였다가 곧바로 모친의 병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 뒤로 누차 참봉, 별좌(別坐), 찰방(察訪), 주부(主簿)에 이어 형조 좌랑에까지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으며, 죽은 뒤에 정랑에 제수하는 명이 내려졌다. 대체로 처음에 벼슬하러 나간 것은 어버이를 위해서 자기의 뜻을 굽힌 것이었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벼슬에 대한 뜻을 완전히 끊어 버린 것이었다.
공 이 살고 있는 곳은 수죽(水竹)이 볼 만하였는데 바로 집 뒤에다 초가집 한 채를 짓고 솔이며 대며 꽃과 약초들을 섞어 심어 놓고 감상하였다. 집앞에 흐르는 작은 시내로 내려가 갓끈을 씻고 즐거워하면서 활계(活溪)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으므로 학자들이 이 때문에 공을 활계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 런데 어느 날 밤 지팡이를 끌고 시냇가로 나가 이리저리 쳐다보고 소요(逍遙)하면서 우수에 잠긴 듯 감회에 젖다가 이날 밤은 외실(外室)에서 잠들었는데 다음 날 홀연히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때가 바로 기유년 3월 3일이었다.
공이 노년(老年)에 접어들고 나서는 수명의 장단에 말이 미칠 때마다 번번이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는데, 공이 죽었을 때의 나이가 마침 70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무척 기이하게 여겼다. 이해 모월 모일에 송림(松林 순천(順川))의 서쪽 산기슭에 안장(安葬)하였다.
남 쪽 지방 인사들은 공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탄식하며 서로 애도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슬프게 곡을 하였으며, 지금도 시골에서 말을 타고 공의 묘소를 지나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한다고 한다. 그래서 충신(忠信)함이 이렇듯 사람들을 심복시키고 있다고 말들을 한다.
공 은 승지를 증직받은 혼(渾)의 딸 완산 이씨(完山李氏)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이 바로 이순(以恂)으로서 유업(儒業)에 종사하여 가문의 전통을 제대로 잇고 있으며, 4녀는 모두 사족(士族)에게 출가하였다. 이순은 아들이 없어 동족(同族)의 아들 업(魚+業/ 生父→방경(方慶 : 評理公派)을 아들로 삼았다.
공 의 학문은 그 연원(淵源)이 대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조 문정공(趙文正公)으로부터 비롯된다. 문정의 문인 가운데 회산(檜山) 정환(丁煥)과 그의 아우 황(熿)이 있었는데 이들은 실로 을사(乙巳)의 명신(名臣)들이었다. 그 문하에 다시 정염(丁焰)씨가 있었는데 호는 만헌(晚軒)으로 공에게는 외당(外黨)이 된다.
공이 어려서부터 이분을 종유(從遊)하며 정암의 학문에 대해서 상당히 얻어듣게 되었는데, 조행(操行)과 수양 면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터득한 것이 많다고 한다. 명묘(明廟)와 선묘(宣廟) 때야말로 우리 동방의 문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노성(老成)한 선생들이 계속 뒤를 이어 나와 낙민(洛閩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함)의 가르침을 크게 펼친 결과 내용과 형식이 아름답게 조화되는 경지를 이루었다. 공처럼 훌륭한 자성(資性)을 가진 이가 만약 여러 선생들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면 아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덕업(德業)이 넓어지고 성문(聲聞)이 크게 떨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이 목표를 정한 것을 살펴보건대 어쩌면 은거하는 가운데 자신의 뜻을 구하려는 범주 속에 속하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분에게는 내가 명(銘)을 지어 드려도 충분하리라.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옛날부터 가르침 내려오나니 / 惟古有訓。
학문의 목적은 자기 충실 기하는 것 / 學以爲己。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 爲己伊何。
참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거지 / 誠之則是。
여기에 물으면서 배워 나가면 / 輔以問學。
안과 밖 아름다운 인물되리라 / 質文具美。
그런데 후학들 천박하게도 / 末學翦翦。
듣고선 곧장 입으로 내놔 / 出口入耳。
봄철에 핀 꽃처럼 휘황하지만 / 燁然春華。
알맹이는 그 때문에 손상된다네 / 本實以毁。
성인께서 선배들 장점 취하며 / 聖取先進。
번드르르하기보단 촌스러움 따랐나니 / 寧野無史。
내가 지금 그런 인물 찾아본다면 / 我求於今。
이씨가 여기에 해당되리라 / 爰得李氏。
성실한 그 성품 / 肫肫其性。
확고한 그 의지 / 斷斷其志。
겉치레하려는 학문 아니요 / 學不文采。
실천 궁행에 근본을 두었어라 / 本乎實履。
야릇한 행동 하나도 없이 / 行不詭奇。
효도와 우애에 바탕을 두고 / 自孝悌始。
어리숙한 듯 속으로 빛났으니 / 闇然而章。
안과 밖이 따로 어디에 있었으랴 / 何襮何裡。
아동기 때부터 뜻 두고 힘써온 일 / 童而俛焉。
몸을 마치도록 이어 오면서 / 訖于沒齒。
급기야 향리의 모범이 되어 / 儀刑鄕里。
사람들 선으로 이끌었으니 / 式穀蒙士。
이 또한 하나의 선정에 속하는걸 / 是亦爲政。
구태여 높은 벼슬 해야만 할까 / 奚其膴仕。
순천 서쪽 산기슭 / 松林之麓。
비스듬한 이 언덕 / 其原邐迆。
넉 자 높이 솟은 봉분 / 有墳四尺。
도덕 군자의 안식처로다 / 德人藏只。
[주01]향선생(鄕先生) : 옛날 치사(致仕)한 뒤 시골에 내려온 중대부(中大夫)를 태사(太師)로 삼고 치사한 사(士)를 소사(少師)로 삼아 향학(鄕學)에서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 노인들을 명명하여 향선생이라고 하였다. 《儀禮 士冠禮》
[주02]듣고선--- 내놔 : 음 미하고 소화하여 자기 몸을 아름답게 하지 못하고 그저 앵무새처럼 되뇌이며 자기 과시를 하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이 배우는 것을 보건대, 귀로 들으면 입으로 내놓는다. 입과 귀 사이는 네 치 밖에 안 되니, 어떻게 일곱 자 되는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 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 하였다.
[주03]성인께서---따랐나니 : 《논 어(論語)》 옹야(雍也)에 “본바탕이 겉모습을 이기면 촌스럽고 겉모습이 본바탕을 이기면 번드르르하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라 하였고,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지금 사람들은 예악(禮樂)에 대한 선배들의 태도를 보고 야인(野人)이라 하고, 예악에 대한 후배들의 태도를 보고 군자(君子)라 하나, 내가 예악을 행한다면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 하였다.
-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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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유(李大㕀) :1709년(숙종 35년) - 1784(정조 2)
조선의 학자.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 군수(郡守) 수(洙)의 손자. 1679년(숙종 5년) 31세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성혼(成渾)의 천거로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이 되었다. 어머니의 병으로 관직을 물러난 후 참봉(參奉), 별좌(別坐), 찰방(察訪), 주부(主簿), 형조 좌랑(形曹佐郞)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조광조(趙光祖)의 학통(學統)을 이었다. 남원(南原)의 영천서워(寧川書院)에 제향(祭享)되고 묘소는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에 소재한다.
옮긴이 : 야촌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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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故刑曹佐郞活溪李公墓碣銘 幷序
(고형조좌랑활계이공묘갈명 병서)
湖南有隱君子。曰活溪李公。篤學力行。不求知於人。四方之士。稍稍聞而知之。其沒也。鄕之父老子弟相與謀曰。李先生至行醇德。儀式鄕里。古所稱鄕先生者。非謂是耶。遂相與尸而祝之。旣其子以恂。又圖所以樹於墓者。介小司徒李公。以家狀請銘於維。按狀。公諱大㕀。字景引。系出鷄林。新羅大臣謁平之後。麗相益齋文忠公之十代孫也。曾祖黿。有文章節行。官禮曹佐郞。祖郡守洙。父生員悰胤。有文而蚤世。母昌原丁氏。公生穎秀異常。少孤。育於外家。能自奮勵爲學。於書蓋無所不窺。而專用心於內。以躬行實踐爲務。其事丁夫人。告面定省。悉遵法則。家雖貧。時節必具酒食。容色聲氣。極其和婉。務以承歡養志。居喪戚甚。而禮亦稱。廬於墓側。未嘗見齒者。三年如一日。平居晨起。必展拜祠堂。祭祀必誠必敬。忌日如處喪。蓋事亡如存。追遠如近。終其身不怠焉。治家有法。不嚴而整。處約食貧。疏糲或不給。而恒晏如也。國有難。輒抱前後告身。北望痛哭。遇國忌如私忌。至老不廢。敦睦於親舊。各隨疏戚。致其恩意。周窮濟乏。急人之困。不問家之有亡。嘗値歲大饑。客有過公留數日。比其歸。傾甁粟以資之。家人告無以擧火。公笑曰。居者雖乏。自不至餒死。奈何令客作路莩。其爲義。先人後己。多類此。年三十一。中上舍選。久之。牛溪成先生在吏部。聞公名。除司饔院參奉。公強起應命。旋以母病去。自後屢拜參奉別坐察訪主簿。至刑曹佐郞。皆不赴。旣歿而有正郞之命。蓋始仕而出。爲親屈也。親歿。絶意仕宦。所居有水竹之勝。卽屋後築草廬。雜植松竹花藥。前臨小溪。濯纓而樂之。名之曰活溪。學者以此稱爲活溪先生。一夕。曳杖溪上。消搖瞻眺。悄然若有感焉。是夕。寢於外。翌日。翛然而逝。乃己酉三月三日也。公旣老。語及脩短。輒曰。人生七十古來稀。及卒適七十。人頗異之。以是歲某月日。葬于松林之西麓。南州人士識與不識。無不咨嗟相弔。會葬者。哭之皆哀。村甿之騎過墓者必下。人謂忠信之能服人也如是。公娶完山李氏。贈承旨渾之女。生一男四女。男卽以恂。業儒能世其家。四女皆歸士族。以恂無子。子同宗之子。公之學。其源蓋出於靜庵趙文正公。文正之門人。有曰檜山丁煥及其弟熿。實爲乙巳名臣。其徒有丁焰氏者。號晩軒。於公爲外黨。公少而從游。頗聞靜庵之學。至其操履充養。多所獨得云。明,宣之際。我東文明極矣。諸老先生。接武勃興。大闡洛閩之敎。彬彬乎質有其文。以公資性之美。得周旋於諸先生。則其德業之崇廣。聲聞之隆振。殆有不可量者。然觀其所樹立。豈所謂隱居求志者非耶。是足以銘矣。其銘曰。
惟古有訓。學以爲己。爲己伊何。誠之則是。輔以問學。質文具美。
末學翦翦。出口入耳。燁然春華。本實以毀。聖取先進。寧野無史。
我求於今。爰得李氏。肫肫其性。斷斷其志。學不文采。本乎實履。
行不詭奇。自孝悌始。闇然而章。何襮何裏。童而俛焉。訖于沒齒。
儀刑鄕里。式穀蒙士。是亦爲政。奚其膴仕。松林之麓。其原邐迆。
有墳四尺。德人藏只。
계곡집> 谿谷先生集卷之十二> 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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