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금산군수 이대수선생 묘갈명(錦山郡守 李公 墓碣銘).

야촌(1) 2009. 9. 21. 04:50

생졸년 : 1547년(명종 2) ~ 1603년(선조 36)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행 통훈대부 금산군수 이공 묘지명  병서

(贈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行 通訓大夫 錦山郡守 李公 墓誌銘) 幷序    

                        

 상촌 신흠 찬(象村 申欽 撰)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 이공 양구(李公養久)씨가 그의 백부인 군수공(郡守公)의 묘에 지문(誌文)을 쓰고, 그 지문을 기록하여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우리 백부를 알고 있으니 묘도(墓道)의 명(銘)을 새기는 일을 그대가 힘써 도모해다오.” 하였다.


아, 내가 어려서 남동(南洞)에 노닐 적에 군수공을 알게 되었고 이어 외람되이 시랑공의 알아줌을 입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부자(父子)분에게 다 친분을 맺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군수공이 늘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아우 하나가 있었는데 재주와 행실이 사류(士流) 중에 으뜸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니 내가 누구를 믿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내가 이 말을 들을 적마다 슬퍼하며 공의 타고난 효성과 우애에 감복하였다.

 

하나의 아우란 분은 바로 시랑공의 선부군인 것이다. 시랑공은 약관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중외(中外)에 명성을 떨치며 지금 한창 세상에 크게 쓰임을 받고 있는데, 그의 선부군을 섬겨보지 못한 것 때문에 군수공에게 효성을 바치고 있으니, 군수공 같은 분은 또한 효제(孝悌)의 보답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행장을 상고해보니, 공의 휘는 대수(大遂)요. 자는 여성(汝成)인데 계림(鷄林)의 대성(大姓)이다. 비조(鼻祖) 알평(謁平)은 신라(新羅)의 시조를 보익하여 창업하였으므로 훈적(勳籍)에 책록되었고, 그 후 휘가 제현(齊賢)인 익재(益齋)란 분이 있었는데 덕업(德業)과 문장으로 고려의 종신(宗臣)이 되었으며 근 30년 동안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하였다. 졸하자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는데 공의 10대조가 된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윤인(尹仁)이 관찰사를 지냈고, 그 후 공린(公麟)이란 분에 이르러서는 현령이었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원(黿)은 충신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으로서 연산군(燕山君) 때에 예조 좌랑으로 사화(史禍)를 입어 적소(謫所)에서 죽었는데, 중종(中宗)이 즉위하고 나서 특별히 도승지를 증직하여 그의 억울함을 씻어주었다.

 

조부 발(渤)은 숙부 타(鼉)의 양자로 갔는데, 여러 형제가 가문의 화란을 당하여 모두 외지에 윤락되어 그대로 제천(堤川)에서 살았다. 아버지 경윤(憬胤)은 좌승지에 증직되었는데 선대의 훌륭한 덕을 계승하였으며, 부인 원주 이씨(原州李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은(垠)의 딸이다.


가정(嘉靖) 정미년(1547, 명종2)에 공을 낳았다. 15세에 모친을 여의고 종조부에게 글을 배웠으며 학문에 잠심하여 날로 진취함으로써 마침내 아름다운 명성이 드러났고 경오년에는 태학(太學)에 올랐다. 무인년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공이 양친을 여의고 나서는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어 과거 공부를 폐하고 고향에서 소요하며 일생을 마칠 듯이 하였다.

 

갑신년에 음직(蔭職)으로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에 천거 제수된 후 사포서 별좌(司圃署別坐)ㆍ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역임하였다. 임진년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은 제천(堤川)에 있으면서 군사를 모아 한 고을을 방어하였다.

 

계사년에는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과 수운 판과(水運判官)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대신이 수령직을 감당할 만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아뢰었으므로 이 선발에 뽑혀 지평현감(砥平縣監)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지평은 경기도의 작은 고을로서 왜적에게 박해를 입은 뒤였는데, 공의 부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다음해 여름에 후모(後母)의 상을 당했는데 복제(服制)를 마치고서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기용되었다가 익찬(翊贊)으로 옮겨졌고, 형조ㆍ공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금산 군수(錦山郡守)가 되었다가 계묘년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얼마 후 병으로 별세하였는데 향년이 57세였다. 제천의 동북쪽 송광(松廣)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이곳은 선영이다.

 

조정에서 공이 일찍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막은 공적이 있다 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하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준수한데다가 품성도 온화하고 진실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모두 극진하였다. 3년 거상에 있어서는 예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였고 후모(後母)를 모실 적에는 온화한 기색으로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탁월한 식견과 재능으로 사리 판단에 뛰어나서 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능숙한 솜씨로 여유있게 다스렸다.

 

칠원 윤씨(漆原尹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찰방(察訪) 신(信)의 딸로서 조행이 단정하고 정숙하여 내조(內助)를 잘했는가 하면 근면과 검소로써 가정을 부지하였다. 종족에게 화목하고 자녀를 교훈시키고 조상의 제사를 공경히 받드는 데에도 모두 볼만한 법도가 있었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공보다 3년 뒤에 별세하였는데 향년이 60세이다. 공의 작질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봉(追封)하였고 공과 같은 언덕에 장사하였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시진(時振)은 병난(兵難)에 죽었고, 다음은 시정(時挺)ㆍ시수(時授)이며, 장녀는 김시언(金時言)에게 출가했는데 김시언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이 되었고, 차녀는 권이직(權以稷)에게 출가하였다. 시진은 윤면(尹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다.

 

시정은 윤경성(尹儆性)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복선(復先)이고 딸들은 어리다. 김시언은 자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시랑공의 이름은 시발(時發)이요, 양구(養久)는 그의 자이다. 내가 이상과 같이 그의 행장을 서술하고 이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조행은 복 받을 만했는데 / 視履則祥
쓰임을 받지 못하고 / 而用之嗇
그대로 지니고 돌아갔으니 / 歛之而歸
천도가 어긋난 것이로다 / 而天之忒
남겨놓은 복록은 / 所其遺餘
후손에게 끼쳐지리라 / 詒後之祿 

 

상촌고 > 象村稿卷之二十三 >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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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通訓大夫錦山郡守李公墓誌銘 幷序.

 

兵部左侍郞李公養久氏。旣誌其伯父郡守公之壙矣。錄其誌謂欽曰。子知吾伯父。其賁于墓道者。子勉圖之。噫。欽少游南洞。得契於郡守公。仍辱侍郞公之知。蓋所謂得交於父子間者也。其敢辭諸。郡守公恒言吾早孤。有一弟。才與行。爲士流冠冕。不幸夭歿。吾何恃而爲生。欽每聞而愴然。而服其孝悌之鍾於天也。一弟卽公之先府君也。侍郞公弱冠決科。馳騖中外。方大用於時。以不及事其先府君者。移孝於郡守公。若郡守公。其亦食孝悌之報者非耶。按狀公諱大遂。字汝成。鷄林大姓。鼻祖謁平。翊羅祖創業策勳。後有益齋公者諱齊賢。以德業文章。爲高麗宗臣。繫國安危者迨三十年。卒諡文忠。於公爲十代祖。入本朝有諱尹仁。觀察使。傳至公麟。官縣令。寔公高祖也。曾祖黿。忠臣朴彭年之外孫也。燕山時以禮曹佐郞。被史禍謫死。至中廟臨御。特贈都承旨。以雪其冤。祖渤出後叔父鼉。諸昆季罹家難。皆淪落于外。仍居堤川。考憬胤。贈左承旨。能世其德美。配曰原州李氏。秉節校尉垠之女。嘉靖丁未生公。十五。失所恃。就學於從祖潛。學日進。遂著華間。庚午。登上庠。戊寅。丁內艱。公旣喪二親。無意進取。棄擧子業。倘佯枌楡間。若將終身者。甲申。薦授蔭職造紙署別坐。歷司圃署別坐,尙衣院直長。壬辰。倭賦入寇。公在堤縣。聚兵爲一邑杆蔽。癸巳。除內資寺直長,水運判官。時大臣白才堪守令者待以不次。膺是選。拜砥平縣監。砥乃畿輔小邑。新刳於賊。民得公始穌。翌年夏。遭後母喪。服闋。徵以翊衛司司禦。移翊贊,刑,工兩曹正郞,錦山郡守。癸卯。解綬歸。未幾病卒。得年五十有七。窆于堤川東北松廣原先塋也。朝廷以公曾有起義禦倭之績。錄宣武功臣原從勳。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公容儀端秀。稟質溫良。由孝而友。俱盡其則。三年守制。毀必踰禮。奉侍後母。色而無違。達識通方。長於辦理。當官處事。擧恢刃有餘地。娶漆原尹氏。察訪信之女。履行端淑。克內相。能以勤儉持家。和宗族。訓子女。敬先祀。俱有法可觀。與公同年生。後公三年卒。年六十。追封淑夫人。視公秩也。葬同公原。生三男二女。男長時振。死於兵。次時挺,時授。女長金時言。文科佐郞。次權以稷。時振娶尹勉女。無子。時挺娶尹敬性女。生一男二女。男復先。女幼。金時言有子女幼。侍郞公名時發。養久其字也。欽已敍其狀。綴以銘曰。視履則祥。而用之嗇。斂之而歸。而天之忒。所其遺餘。詒後之祿。

 

[묘지 소재지]

충북 제천시 송한면 송한리  계좌(癸坐)

 

[수록문헌]

상촌고 > 象村稿卷之二十三 >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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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伯父 錦山郡守府君 墓誌 

(백부 금산군수부군 묘지) 

 

이시발 지음(李時發 撰)

 

伯父郡守府君。姓李氏。諱大遂。字汝成。系出鷄林。新羅始祖赫居世佐命功臣謁平之後。有諱齊賢。號益齋。諡文忠。仕麗朝。德業文章。震輝今古。是爲府君十世祖。自文忠以後趾美舃奕。五代祖諱尹仁。仕本朝觀察使。高祖諱公麟。縣令。曾大父諱黿。及第。朴彭年之外孫。官禮曹佐郞。與金馹孫等同罹史禍。謫戊午。死甲子。中廟反正。愍其忠賢。贈都承旨。大父諱 渤。贈左通禮。後叔父生員鼉。家禍之餘。諸兄弟散住外莊。家于堤川。自生員始。考諱憬胤。左承旨贈。世濟德美。士之稱家風者歸焉。配原州李氏。秉節校尉垠之女。以嘉靖丁未二月二十二日。生府君于陳夜里。歲辛酉。喪先妣。甲戌。與仲氏吾先君就學于淸州從祖叔父參奉諱潛之門。數年。文與行俱進。金昆玉友。壎唱篪和。名聞大著。庚午。中進士。吾先君亦以癸酉中司馬。相繼于國庠。一時四方賢士。求與之友。甲戌。吾先君下世。戊寅。又失所怙。遂無意於進取。不致志擧業。故不第焉。甲申。薦授造紙別坐。乙酉。換移司 圃署。辛卯陞尙衣院直長。壬辰倭亂。募提鄕兵。禦忠原之境。堤民賴焉。癸巳。大駕還朝。除內資寺直長。未久辭歸。乙未。除水運判官。有大臣建白。薦才堪守令者。不次除拜。府君膺薦。陞拜砥平縣監。砥本殘薄。經變蕩柝。府君拊摩吹煦。甚有惠政。百姓懷之。明年夏五月。奔後母喪而歸。戊戌。服闋。除翊衛司司禦不就。庚子九月。除翊衛司翊贊。十一月。陞司禦。辛丑春。病免歸。八月。除刑曹正郞。旋換工曹。將赴朝拜命。在道又拜錦山。錦山郡守三月。賦歸于堤川。是月十八日。病卒于長樂之第。享年五十有七。五月四日。葬 于縣東北松漢原先塋之側。府君稟性溫良。篤於孝義。事親也盡其愛敬。及丁外艱。廬三年。哀毀踰節。奉侍後母申氏。極其承順懽豫。古人之所難也。祭先竭其誠敬。冀格神明。與兄弟怡怡和樂。友愛隆至。撫敎諸孤姪。有加於己子。小子之粗有成立。實所賴焉。容貌端秀。識量通達。長於卞理事務。又善射藝。朋儕咸推其才器。以當大任期之。配漆原尹氏。平丘察訪諱信之女。生三男。長時振。死壬辰兵。次時挺。次時援。二女。長適金時讓。次適權而稷。皆儒業。時振娶善山府使尹勉女。無後。時挺娶忠義衛尹敬性女。生恢先, 復先及二女。恢先爲時振嗣。二女幼。金時讓有子女。幼。嗚呼㗢哉。小子小孤。移其孝於伯父。天將窮我。而又見棄背。職藩于南。不敢奔哭。罔極之痛。無以舒焉。聞葬得日。禮當有誌。謹取譜系年月志行履歷之梗槪。輟哭濡血而記之如右。嗚呼。至哀無文。故闕其辭。

 

[문헌자료]

碧梧遺稿集 卷之 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