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풍천도호부사 이시득 묘갈명 병서.

야촌(1) 2009. 9. 21. 04:25

■ 행 풍천도호부사 이공 묘갈명 병서

   (行 豐川都護府使 李公 墓碣銘 幷序)

 

  풍천공 생졸년 : 1574년(선조 7) 5월 18일~1640년(인조 18) 5월 2일]

  ※벽오 이시발 선생의 아우임)

 

은진 송준길 지음(恩津 宋浚吉 撰) /號 : 東春堂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 형부상서(刑部尙書) 이공 시발(時發)에게 시득(時得)이란 아우가 계셨는데, 소년기에는 형님에게 수학(受學)하며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얼마 뒤에는 문필(文筆)을 버리고 무예(武藝)를 익혀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병오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를 거쳐, 청하(淸河)ㆍ흥덕(興德)ㆍ무장(茂長) 등 세 고을의 현감을 지냈고,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 풍천도호부사(豐川都護府使)와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내고서 67세로 별세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인후(仁厚)하여 어버이와 형님을 섬김에는 효도와 공경이 나무랄 데 없었고, 관리가 되어 직무를 봉행(奉行)함에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다. 처음으로 청하에 부임하여서는 오랫동안 적체(積滯)되었던 옥사(獄事)를 너그럽게 처리하여 고을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고, 흥덕(興德)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가장 사랑을 끼쳤다 하여 비석을 세워 추모하기까지 하였다.

 

상서공이 일찍이 찬획사(贊畫使)의 임무를 받고 서관(西關)으로 가니, 광해군(光海君)은 그 어버이가 늙은 것을 딱하게 여겨 특별히 공을 풍천도호부사에 제수하여 상서공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공이 낙안 군수가 되었을 때 고을에는 백성의 전지를 권귀가(權貴家)가 강점(强占)한 일로 여러 해 동안 처결되지 않은 송사(訟事)가 있었는데, 공이 부임하여서는 즉시 판결하여 그 전지를 백성에게 돌려주니, 당시 그 도(道)의 안찰사였던 백강(白江) 이 상국(李 相國=李敬輿)이 극찬하였다.

 

병으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는 향리(鄕里)에서 생활하면서 벼슬에 뜻을 끊었다.

그러다가 경진년(1640, 인조 18) 5월 2일에 별세하였다. 처음에는 청주(淸州)의 청천(靑川)에 장사 지냈는데, 기축년(1649) 10월에 문의읍(文義邑) 동쪽 이성동(李盛洞) 오향(午向)의 언덕으로 천장(遷葬)하였다.

 

공의 자는 덕구(德久)이고 보계(譜系)는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의 대승상(大丞相)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고조 원(黿)은 박공 팽년(朴公 彭年)의 외손으로 호가 재사당(再思堂)이며,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죽었는데, 중종(中宗)이 신원(伸冤)하고 증직(贈職)하였다.

 

증조 발(渤)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고, 조(祖) 경윤(憬胤)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고(考) 대건(大建)은 진사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3대가 추증된 것은 상서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妣)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부사직(副司直) 도(燾)의 따님이다. 공은 유복자(遺腹子)로 찬성공(贊成公)이 서거(逝去)한 석 달 뒤에 태어났으므로 대부인(大夫人)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상서공은 변방의 관직에 있는 날이 많았으므로 공이 원(員)으로 있는 고을로 대부인을 모시고 가서 지물(志物)의 봉양을 지극히 하였다. 무진년(1628)에 대부인이 78세의 나이로 별세하니, 이때 상서공은 이미 먼저 별세하였고, 공의 나이도 이미 늙었다.

 

그런데도 3년 동안 시묘(侍墓)하니 온 고을이 칭찬하였다. 공은 평소에 한미한 선비처럼 행동하여 조정의 고관(高官)을 찾아가서 명예를 구한 적이 없었으므로 벼슬이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

 

배위(配位) 유씨(柳氏)는 문화(文化)의 대성(大姓)으로 부사직 희연(希淵)의 따님인데, 어질고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보다 3년 먼저 출생하고 공보다 9년 뒤에 별세하였는데 공과 합폄(合窆)하였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회(慶會)이고, 딸은 별좌(別坐) 권잉(權䚮), 한진영(韓震英), 이환(李 )에게 시집갔고, 측실(側室)의 아들은 경복(慶復)이다. 경회는 도사(都事) 권필중(權必中)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는데, 인량(寅亮), 인형(寅馨), 진사(進士) 인빈(寅賓)이다.

 

한진영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우원(宇元), 우주(宇柱), 우대(宇大), 우홍(宇弘), 우웅(宇雄)이고, 딸은 홍수륭(洪受漋)에게 시집갔다. 이환은 1남을 두었는데, 행우(行雨)이다. 내외(內外) 증현손(曾玄孫)이 모두 40여 인이다.

 

공이 만년(晩年)에 의술(醫術)을 직업으로 삼았는데, 나는 젊어서부터 병을 자주 앓았으므로 항상 공을 찾아가서 치료하다 보니 정의(情誼)가 매우 깊어졌다. 공이 죽은 뒤에 경회 씨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승낙만 해놓고 지어주지 못했는데, 경회 씨의 무덤에 풀이 이미 여러 해 묵었다.

 

상서공의 아들 이부시랑(吏部侍郞) 경휘(慶徽)와 지신사(知申事) 경억(慶億)씨가 공의 여러 손자들과 함께 거듭 청하기를 “죽은 분에게 한 승낙을 묵히지 말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므로 생사(生死)를 생각해 보니 한 줄기의 슬픈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감히 고루하고 졸렬함도 잊고 그 개요(槪要)를 대략 서술하여 현검(懸劍)의 마음을 부쳤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의 재주는 적을 무찌르고 막기에 충분하고 / 公之才足以折衝禦侮

덕은 사람을 구제하고 사물에 은택 끼치기에 충분하였네 / 德足以濟人澤物

 

하늘은 왜 풍부한 자질을 주고서 펼치지 못하게 막았는가 / 胡賦之豐而施之窒

집안 명성은 조카들에게서 커지고 / 家聲大於諸姪

 

남은 경사는 후손에게 피어날 것을 / 餘慶發於後嗣

밝게 증명할 수 있네 / 昭哉徵乎

 

멀어질수록 더욱 창성하리니 / 愈遠而彌昌

이것이 선자(善者)에게 복을 주는 이치이네 / 福善之理在是

 

[각주]

[주-01]찬획사(贊畫使) : 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조정에서 파견하여 그 지방의 주장(主將)을 도와 전술(戰

             術)ㆍ전략(戰略) 등의 일을 계획하게 하는 군직(軍職)을 말한다.

 

[주-02]지물(志物)의 봉양 :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

             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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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行 豐川都護府使 李公 墓碣銘 幷序

恩津 宋浚吉 撰

宣仁朝有名臣。曰刑部尙書李公時發。有弟曰時得。 少從長公學。治博士業。旣而。投筆用武藝。薦授宣傳官。俄登丙午武科。由內資寺主簿。監淸河,興德,茂長三縣。進秩通政。爲豐川府使。守樂安郡。年六十七而歿。公天資仁厚。事親從兄。孝敬無間。當官奉職。竭心盡誠。始莅淸河。疏久滯之獄。伸邑子之枉。興民最有遺愛。至立石追思。尙書公嘗受贊畫之任。赴西關。光海愍其親老。特授公豐川以慰之。其守樂安也。郡有民田。爲權貴家所占。訟未決有年。公至立折而歸之民。白江李相國方按道亟稱之。因病罷歸。浮湛鄕里。絶仕進意。其歿在庚辰五月二日。始葬淸州之靑川。 己丑十月。遷于文義治東李盛洞午向之原。公字德久。系出慶州。高麗大丞相益齋文忠公齊賢之後。高祖黿。朴公彭年之外孫。號再思堂。官禮曹佐郞。死於甲子之禍。中廟洗冤贈官。曾祖渤。贈左承旨。祖憬胤。贈吏曹參判。考大建。進士贈左贊成。三世推恩。以尙書公貴也。妣貞敬夫人安東金氏。副司直燾之女。贊成公卒三月而公生。最爲大夫人所鍾愛。尙書公多在邊任。公奉侍板輿。志物之養甚備。歲戊辰。大夫人年七十八而卒。時尙書公已先歿。公年亦耆艾。而廬墓盡制。鄕邦稱之。平生操履如寒士。未 嘗謁朝貴干名譽。以是官不達。媲曰柳氏。文化大姓。副司直希淵之女。賢有婦道。先公三年生。後公九年歿。與公同壙。生一男三女。男曰慶會。女適權䚮別坐。韓震英,李O 側室有一子。曰慶復。慶會娶都事權必中女。生三男。寅亮,寅馨,寅賓進士。韓震英有五男一女。男曰宇元,宇柱,宇大,宇弘,宇雄。女適洪受漋。李 有一男曰行雨。內外曾玄孫。摠四十餘人。公晩業黃岐家。余少善病。常從公求治。誼情甚厚。公旣歿而慶會氏袖家狀來托墓銘。余諾之而未成。慶會氏墓草又累宿矣。尙書公之胤吏部侍郞慶徽,知申事慶億 氏與公之諸孫申請曰。願毋宿諾於逝者。感念存歿。爲之愴然一涕。乃敢忘其陋拙。略敍其槩。以寓懸劍之懷。系之以銘曰。公之才足以折衝禦侮。德足以濟人澤物。胡賦之豐而施之窒。家聲大於諸姪。餘慶發於後嗣。昭哉徵乎。愈遠而彌昌。福善之理在是

출전 : 同春堂文集 卷之 十七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