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몽량(李夢亮)

야촌(1) 2009. 8. 29. 13:33

■ 이몽량(李夢亮)/24世

 

[세계] 24世 상서공파(尙書公派)

[문과]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위(17/33)

[생원시]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9위(24/100)

[진사시]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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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년(연산 5)~1564년(명종 19), 조선의 문신, 자(字)는 응명(應明), 진사 예신(禮臣)의 아들이며, 항복(恒福)의 아버지로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1522년(중종 17)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8년(중종 23) 형(兄) 옹윤(夢尹)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제수 되었다.

 

이어 승정원 주서, 사가원 정언을 거쳐 1539년 경상도 어사로서 민정을 살피기도 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동부승지로 발탁되면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고, 대사간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도민의 진휼을 위하여 진력 하였다.

 

그 후 예조참의, 병조참지, 대사간을 역임하고 1550년(중종 5) 도승지에 올랐다.1551년 경상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대사간, 병조참판, 경기감사, 예조참판, 도승지를 지내고 1557년(명종 12) 한성부좌윤, 1560년(명종 15) 한성부판윤,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냈다.

 

형조판서 재임시 형률을 잘못 처리 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 되기도 하였다. 그 후 곧 서용되어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64년(명종 19) 다시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다.그는 평소에 학문에 입각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장 하였고, 조식(曺植)등 재야사람(在野士林)을 천거하는 등, 정치 기강을 쇄신하고자 노력 하였다.

 

「韓國人物考」에는 성품이 온유하고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했던 인물로 평하였다.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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