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이병철회장(湖巖李秉喆會長)

야촌(1) 2009. 7. 26. 04:49

39世 호암 이병철 선생(湖巖 李秉喆 先生) *경주이씨 판전공파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일념으로 삼성그룹을 창업하다.

 

 

   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호암 이병철(湖巖 李秉喆)선생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 1938년 일제치하의 암흑기에 사업에 투신, 한국 최고의 기업, 삼성을 창업하여 성장시킨 한국 기업인의 대명사이다.


또한 당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앞서가는 경영인으로서,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해온 재계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호암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로 대변되는 철학을 가진 경영자로 가시적 업적에 못지 않게, 신념과 경륜을 가진, 경영의 여러 분야에 걸쳐 원칙을 제시하고 또 일관된 실천을 보여 줌으로써 많은 교훈을 남겼다.

선생은 1910년 2월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부친 이찬우 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생은 강직한 가풍 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선생은 다섯 살 때 부터 조부(祖父)인 문산 이홍석(文山李洪錫) 공이 세운 서당 문산정(文山亭)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고, 열한 살 되던 해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 편입, 이듬해에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옮겨 수학했다.

 

그 후 중동중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926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박씨 박두울 여사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학업에 전념하던 선생은 1930년 4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 무렵 세계적인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심한 경제혼란이 빚어 낸 사회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이병철 선생은 느끼고 생각한 바가 많아 동경의 유학생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병철 선생은 몇 년 동안 깊은 사색과 구상 끝에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경제의 건설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1938년 3월 1일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중국과 만주 등을 상대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삼성상회는 무역업 외에도 국수 제조업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성장 가도를 달렸고, 삼성상회의 성공에 힘입어 1339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자본금 3만원으로 창립된 삼성상회를 이전의 사업경험을 살려 단기간에 급성장시켰고, 삼성상회가 바로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주춧돌이 된 것이다. 기업경영의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던 선생은 개화기의 혼돈과 일제치하의 태평양전쟁, 한국동란 등 민족의 수난을 겪으면서도 사업보국의 염원은 한결 같았다.

 

전란으로 폐허가 된 황량한 땅에 빈손으로 피난하여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대구에서 제일모직을 세워 그 시대에 이미 수입 대체산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선생은 최고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새로운 경영기법을 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기업이었다.

 

평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선생은 1961년 한국의 대표적인 경영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한국경제인협회를 발의했고 초대회장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직을 맡았다.

 

이때 비로소 우리나라는 경제부흥의 기운을 찾게 되었고, 중요한 경제정책들이 수립되는가 하면 모든 경제인들의 창의력과 추진력이 발휘되어 5천년 민족사의 숙원인 빈곤 추방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농업의 자급자족을 통한 민생안정의 방안을 구상했던 이병철 선생은 1967년 세계최대의 단일비료생산시설인 한국비료공장을 세워 오랜 숙원을 이루었다.

 

또한 중앙 매스컴을 설립해 신문, 방송, 출판을 통해 한국언론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언론문화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동양최대의 사립 호암미술관을 세워 후세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는 한편, 삼성미술문화재단을 통한 도의문화진작과 예술문화 창달에도 정성을 쏟았다.

 

선생의 탁월한 경영능력과 미래를 통찰하는 선견력, 강인한 지도력은 우리 시대 최첨단의 개척분야인 유전공학과 우주항공산업에서도 빛을 내기 시작해 후세들에게 미래의 꿈과 무한한 번영의 교훈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위업들을 남기고 선생은 1987년 11월19일 오후5시 향년78세로 영면 했다.

선생의 공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일본 정부는 훈일등서보훈장을 추서하였다.

 

호암 이병철 선생의 열정과 혼이 담긴 삼성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三男인 이건희(李健熙)회장이 경영을 맡아 새로운 사업과 경영방식을 개척하여 우리나라 총수출의 20%, 시가총액의 27%를 차지하는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발전시켰다.

 

나아가 이건희 회장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일등 제품을 개발하여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을 뿐만 아니라 사회공헌사업에도 힘을 쏟아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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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432페이지에서 발췌 /역사학자 48인 지음 | 푸른역사 | 2005.12.30

 

이병철은 유교적 경제관을 실천한 기업가

 

이병철!

그는 먹을걱정, 입을 걱정을 해본적이 없는 부잣집 아들로 1910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 부터 조부 문산(文山) 이홍석(李洪錫)이 세운 문산정(文山亭) 서당에서 6년간 천자문과, 통감, 논어,를 배웠다.

 

이처럼 학자풍의 선비 가족이면서도 남달리 이재에 밝은 집안 내력 덕분에, 그는 평생 부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유교적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 그는 만년을 보낸 이태원 한옥으로 손자들을 불러 모아 논어를 손수 가르쳤다.

 

사업을 하던 무엇을 하던 사람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사후 셋째 이건희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에서 이 한옥을 승지원(承志園)이라 제명했다.

 

이병철은 상하관계나 장유유서의 관행도 중시했다. 일례로 박정희대통령 집권시절 , 그는 정초에 박대통령에게 세배를 가지 않는 기업인으로 유명했다. 세배 가지않는 이유는 자신이 박대통령 보다 일곱살이나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상대가 비록 대통령이 기는 하나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세배할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항간에는 "한국비료 사건" 이후 박정희에 대한 불신이 생겨서 그런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유교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쪽이 더 우세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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