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 법조인 이승우
[생졸년] 1889년(고종 26) 8월~1955년. 8월. 27일
'이 땅의 황국신민들' -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입신출세로의 매진과 매국의 길
1889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출생. 본직이 변호사. 상류 지식층에 있는 처지에서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파렴치하고 극성스럽게 친일 반민족행위를 자행한 친일 법조인. 중추원 참의에까지 이르렀던 자.
친일 법조인 이승우는 일제하에서 식민 통치기구의 판사나 검사, 즉 친일 재조의 법조인이 아니라 재야에서 활약한 사람이다. 당시 지도급에 있는 변호사로서 반제·항일투쟁에 직·간접으로 지원을 하며 민족운동선상에서 노력한 재야 법조인으로는 이인, 김병로, 허헌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나 사회운동가를 비롯해 가난한 피해자들에게도 아끼지 않고 도움을 주었으며, 노동쟁의나 소작쟁의에 대해서까지도 지원을 했었다.
그러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일신의 안일과 부귀영화를 위해 민족을 배반하고 민족의 정기와 정신을 말살하며 조선의 젊은 남녀를 전쟁터로 몰아넣고 일제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던 자들 중에 가장 지탄받아야 할 자가 바로 이승우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승우는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나온 후 1919년에 경성변호사 등록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1919. 3. 12).
이때는 3·1 운동 직후로서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하며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만세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는 기운이 충천해 있었다.
특히 3·1 운동이 나던 해는 중국에서도 5·4 운동이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으며, 우리 독립운동 노선 상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서는 한편 독립투쟁 전선에서도 민족운동의 방법과 전략에서 시회주의반제혁명운동이라고 하는 새로운 노선이 정립되어가는 중대한 시기였다.
그런데 이승우는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에의 참여는 고사하고 친일쪽으로 기울어, 시세영합과 안일 그리고 매국의 길을 걸어 오면서 꾸준히 자신의 입신출세만을 위해 매진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친일행각이 사회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 기록되기 시작하는 것은, 변호사를 개업한 지 10년 만인 1928년 11월 16일 일제 총독부로부터 대례기념장을 수여받을 때부터이다. 1926년 다이쇼(大正) 일왕이 사망함으로써 그를 이어서 쇼와(昭和)가 일왕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행사의 일환으로 그것을 기념하는 대례기념장이 일제 공신이나 조선의 친일파들에게 수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그 동안 이승우가 저지른 친일행각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평가를 받는 하나의 사건이 아닌가 본다. 이어서 그는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1925년에는 조선박람회 평의원으로 취임한다.
사상범 보호관찰심사위원으로 활약
이승우가 친일파의 거물급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1936년 6월 13일에 총독부 최고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가 된 일이었다. 이 직책은 친일파로서는 일제에 의한 귀족작위의 수여 다음가는 고위 현직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해 11월 8일에는 경성 도매 물 시장 개설 조사위원으로 활약했는데, 이 또한 그가 사회적으로도 비중이 큰 유지로서 자리를 굳혔음을 나타내는 지위이다. 그런데 이승우의 친일행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회활동은 보호관찰심사위원이 된 것이다.
이 보호관찰 심사위원이라고 하는 관직은, 일제가 치안유지법에 의하여 '사상범'이라고 부르는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검거·기소·실형중인 인사나 미결인 인사를 '사상범 보호 관찰령'에 따라 감시·통제·관리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이 조직은 주로 '전향'을 강요하거나 유혹하고 애국자들의 반일 적 행동을 감시하며 일제의 탄압을 도와주는 반민족적 매국행위를 일삼았다. 이는 그가 재야 법조인으로서 씻을 수 없는 엄청난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한 죄과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사상범 보호관찰 령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일제하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탄압 악법인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치안경찰법(1900)이라는 것이 있어 항일정치운동을 엄중하게 단속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제가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공포한 목적은 그해에 보통선거를 인정하는 데 대응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운동에 대처하고 자본주의제도와 군주제도를 대중운동과 혁명운동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치안유지법은 사상 자체를 탄압·규제하는 악법으로서,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이 모이거나 접촉만 해도 죄로 인정하여 처벌할 수 있는 악법이었다.
이 법은 제정된 지 1년 만인 1926년에 더욱 개악되었으며, 1928년에는 일제의 정치경찰인 '특별고등경찰'을 공식적으로 창설하여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대한 더욱 악랄한 탄압의 고삐를 조이게 된다. 조선인 친일 매국역적으로 조선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악질배 노덕술도 바로 이 '고등계'에 속해 있던 자였고, 자유당 시절 이승만 밑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이익흥도 고등계 출신이었다.
이익흥은 박천경찰서장을 할 때 조선독립운동가를 고문·학살하고 여성운동가에게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가학행위와 학살행위를 저질렀던 자였다. 한편 1928년에는 일본에서 '3·15 사건'이라고 하는 일본공산당에 대한 일제 검거가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1931년에는 '만주사변'이라고 해서 중국 동북지구에 대한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으로 15년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렇듯 전쟁이 본격화함에 따라 일본의 파시스트 세력은 교토대학 다키가와 교수사건(1933)과 미노배 교수의 천황기관설 사건(1935) 등을 통해 자유주의적 성향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는 법률이론은 깡그리 그 싹까지도 도려내는 분위기로 상황을 몰고 갔다.
그러한 일제의 우익편향은 1936년 '2·16 사건'이라는 군대의 우익쿠데타 기도 사건이 일어나 일본 군부가 정국의 주도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됨에 따라 일제는 파시즘·군국주의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한 영향은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어 더욱 엄중한 탄압과 수탈이 강행되었다.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은 극심해지고 그러한 운동에 관련을 맺고 있는 인사들에 대한 이른바 '전향'공작이 치안유지법에 의한 사상범 보호관찰이나 대책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이승우는 '보호관찰위원'으로서 매국 행위를 자행하는 친일 법조인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보호관찰위원'이란 실제로 독립운동자나 사회 운동자를 가두는 형무소의 간수, 경찰, 검찰 그리고 재판관의 역할도 함께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직책을 지니고 조선민족의 반제 항일투쟁의 의기와 기백을 꺾으려고 일제주구로서 날뛰었다고 하는 일은 아무리 변명해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재야 법조계의 실력자로 친일행각 본격화
1937년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해이다. 즉, 만주침략에 잇따라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개시한 것이다. 따라서 이 해는 일제 침략과 그에 항거하는 중국이나 조선의 민중에게는 중대한 시련의 고비가 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우 에게는 이 해가 반민족적 친일 행각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일제는 이 해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 계획서 요강'을 고노에(近衛) 내각의 이름으로 공포하는 한편, 독일 및 이탈리아 파쇼 정부와 함께 '3국 방공(防共)협정'을 맺어 공산주의에 대처한다고 하는 파쇼국가끼리의 침략체제를 구축한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로서는 그 역량에 비해서 힘에 벅찬 침략전쟁을 확대·장기화시킨 꼴이 되고 일단 저질러진 전쟁을 자의로 중단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다. 인적·물적 자원이 딸리고 세계대세의 흐름이 일제를 고립화시켜 가게 됨에 따라 일제는 총력전·총동원체제를 강행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멸망으로의 불가피한 과정이 개시된 것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시련기에 처하여 이승우는 하루하루가 불 속에 뛰어들기 직전에 밝은 불꽃에서 한껏 춤추듯이 온갖 사회적 고위직을 만끽하며 일제주구의 반민족행위를 미친 듯이 날뛰며 자행한다. 이 해에 그는 경성 제1변호사회 상임위원이 되고 조선변호사회 이사가 되어 재야 법조계 실력자로서의 자리를 다시 확인했다.
아울러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1937년 7월 30일 경성군사 후원 면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8월과 9월에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고 이른바 '애국공채'(公債) 발기인이 되어 전쟁지원을 위한 자금 갹출에 발 벗고 나섰다.
나아가 자기 스스로 9월에 경성부회의 파견 군위문사로 북지(北支:북중국) 전선의 일본군 병사를 위문·격려하는 행각을 벌였으며 그 종군 위문체험을 강연이나 글로 발표하였다([북지의 황군을 위문하고]). 그리고 경기도 '애국기' 헌납 발기회라고 하는,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행사에도 참석하였다(1937. 9. 4).
중일전쟁이 개시된 이듬해인 1938년은 일제의 전쟁 진행이 점차 파시즘하의 총력전 체제로 본격화하는 시기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일제의 군대는 중국에서 승승장구하며 무패의 군대임을 자랑하는 것 같았으나 이미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으로 반제 항일전선이 구축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일제는 중국전선에서 해안도시나 철도를 점과 선으로는 장악했으나 광대한 농촌지역에서는 포위·고립되고 있었으며, 전쟁비용이 바닥 날 정도로 자원면에서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모든 경제를 국방경제라는 이름으로 정부통제하에 두고 개인의 사기업을 '산업보국연맹'이라는 하나의 단체로 묶어서 의무적으로 전쟁에 적극 협조하도록 어용화시켰다.
당시 고노에 내각은 그러한 아시아 침략을 '동아 신질서'라고 해서 침략전쟁을 미화시키고 정당화시키고자 했다. 동시에 일제는 침략전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인적 및 물적인 모든 자원을 약탈·징발하고, 전쟁에 식민지 민중을 동원하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하급관료 중의 친일파에서부터 총독부 고관 등 고급 친일관료에 이르기까지의 친일관료들과, 친일 자본가 그리고 사회유지라고 일컬어지던 친일파 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반민족적 죄악을 범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로서 이승우의 친일 반역행각은 이러하다.
그는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어용기관인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석하여 온갖 망녕된 반민족적·매국적 언동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것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신사참배를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이승우는 면단위로도 신사참배를 할 수 있도록 신사를 증설하라고 강요했으며, 조선의 풍속을 개량한다는 명목 하에 흰옷 입는 습관을 뜯어 고칠 수 있게 하는 방도를 제안하고 다녔다.
특히 '내선일체'라고 해서 일본의 풍속과 습관이 조선에 뿌리내려야 한다면서, 그 자신이 스스로 일본식 주택에서 일본식 음식을 들고 일본식 의복을 입고 일본식 모양새를 갖추고 일본말을 하고 살았다고 하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그가 열을 올린 '신사참배'는 '신사'라고 하는 일본 왕가의 조상을 모셨다고 하는 절에서 그를 공경하는 종교의식을 하는 것인데, 이는 조선 사람의 신앙·종교·양심의 자유와 자존심을 무참히 유린·모독하는 가장 치욕적이고 악랄한 만행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동조했고, 나아가 더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고 다닌 것이었다.
그 해에 그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장의 지위에 있으면서 각종 망동을 일삼았다.
그 중에도 한심스러운 것은 지원병제 실시 축하대회를 개최하여 적극 참가하고 그 실행위원이 되었으며, 경성부 육군지원병 후원회 임원으로서 조선의 청년을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내모는 일에도 앞장서서 날뛴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악랄한 반민족행위를 한 자는 이승우 하나만이 아니지만 그가 지도급에 있는 지식인이었고 남보다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는 지위에서 그러한 행위를 자행했다고 하는 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창씨개명 작업에 주동적으로 참여
1937년이나 1938년에 못지 않게 1939년에도 이승우의 죄악상은 잇따라 나타난다.
1939년 4월 2일 이승우는 그의 친일행각으로 인해 경성부회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듯, 친일 군인 김석원*의 무공을 찬양하는 모임인 '김석원 환영간담회'가 4월 5일에 일제의 주최로 개최되었을 때에도 이승우는 빠짐없이 얼굴을 내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엄청난 반민족적 행위는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 작업에 이승우가 주동적으로 참여한 사실이다. 조선사람의 성씨나 이름을 일본식 성이나 이름으로 바꾸게 호적제도를 고치는 일에 법률 자문을 해 주고 나아가서 이를 홍보·선전하는 데 앞장서고 자기 스스로 기리무라 세우우(梧村升雨)라 바꿔 남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민족에게 자행한 악질적인 만행 중에는 민족의 문화동질성과 조상의 뿌리를 뽑아서 자기 정체(正體)를 잃어버린 바보로 만들게 하려던 정책으로서의 조선어 사용금지정책과 창씨개명을 들 수 있다. 말과 글은 생각과 느낌, 생활방식의 언어·기호적 틀이다.
이를 없애 버리면 민족 자체가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자기 성과 이름은 사람이 민족으로서나 개인으로서나 동족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주요한 표지이고 상징이다. 따라서 감옥의 수인이나 포로나 노예에게서 이름을 빼앗고 기호를 붙여 처우·관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기 정체를 박탈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이러한 만행을 일제는 우리에게 창씨개명이라고 해서 자행했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도 그러한 작업에 앞장을 서서 주구노릇을 했었다. 1940년대 초는 일본제국주의가 미국과 영국 등에 선전포고를 하는 진주만 기습을 단행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일제는 이미 1940년 7월에 대정익찬회(大正翼贊會)를 만들어서 정당 사회단체 일체를 해산·통합하여 관제 어용단체로 단일화시켰다. 이에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승우 같은 친일 반역자들이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고 하는 총독부 어용단체를 만들어서 충성을 보였다.
이승우는 경기도연맹 주최 강연회 등에 참석하여 독려강연을 하였다. 더욱이 1941년 진주만 기습과 대미·영 선전포고를 하던 해에 일제는 4월에 '국민학교령'을 만들어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 나치식의 파시스트 국가주의적 교육체제를 마무리했다.
조선에서는 지원병제에서 학병으로, 징용보국대로, 나아가 '정신대'라고 해서 조선의 처녀를 일본군인 위안부로 끌어가는 인간사냥이 개시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때에 이승우 등 친일파 인사들은 학병제를 독려하여 조선의 청년에게 일제침략의 총알받이가 되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는 이른바 '임전대책회 위원'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감투를 쓰고 있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른 1945년 1월에 전쟁 지휘 총본부인 일제의 대본영은 '본토작전대강'이라는 것을 결정하기에 이르고 이미 도쿄가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1945년 2월에는 미국군이 필리핀 마닐라에 진입했고 4월에는 일본 본토의 코앞인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그런데도 일본제국 군대의 승승장구와 신국(神國) 일본제국의 불멸을 믿었던 소견머리 없고 민족적 양심 없는 친일파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를 자처하던 강패 박춘금의 주도하에 '대의당'을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 이승우는 대의당 위원으로 참여하여 말기까지 일제에 대한 충성을 보인다.
거기다가 어용단체 '언론보국회'에도 명예회원으로 이름을 올려 사회유지인 친일파로서 얼굴값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승우는 해방이 되어 세상이 바뀌자 충격을 받아, 은거하다시피 사회활동을 삼갔다.
그러다가 반민특위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체포, 구속, 심문을 받게 되었다. 반민특위에서 그가 한 발언을 보자.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친일을 했으며, 당시로서는 자기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조선민족에게까지도 그렇게 친일행위를 하는 것이 차선의 길이었기 때문에 친일행위를 했다고 변명하고 있다.
남은 자신의 목숨과 일가 처자를 버리면서까지 항일 구국과 혁명을 위해서 싸웠는데 친일매국에 대한 변명치고는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더욱이 한심스러운 것은 이들 반역자에 대한 처벌이나 심판이 단 한 번도 제대로 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해프닝'으로 그쳐온 것이 민족적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이다.
제2의 이승우를 낳을 사회적 토양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 자체가 우리 민족의 불행이 아닐까?
특히 친일 반민족의 재야 법조인에 대한 심판은 고사하고 재조 법조인으로서 일제하에서 판사나 검사로서 요직에서 친일 반민족행위를 한 행적에 대한 심판은 물론 조사·분석·비평조차도 거의 공백 상태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글쓴이 :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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