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신도비명

月川府院君 李廷馣 神道碑銘 幷序

야촌(1) 2009. 5. 10. 01:59

[생졸년] 이정암『李廷馣, 1541년(중종 36) ~ 1600년(선조 33)』

[세계] 국당공 후 문정공파

 

월천부원군이공신도비명 병서

(月川府院君李公神道碑銘 幷序)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임진년에 연안(延安) 싸움은 그 사실이 국사(國史)나 야사(野史)에 기재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말하는 이들이 모두 그 일과 그 충성을 장하게 여기면서, 마치 그 사람을 직접 만나 보는 듯이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공의 행장(行狀)을 보건대, 공의 충성과 용맹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요 평소부터 수양한 것이지, 하루아침에 난(亂)을 만나서 강개(慷慨)하여진 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공의 휘는 정암(廷馣), 자는 중훈(仲薰)인데, 시조 알평(謁平)이 신라시조를 도와 경주(慶州)로 사적(賜籍)된 이후로 고려를 거쳐 본조(本朝)에 이르는 사이에 이름 있는 인물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증조의 휘는 거(莒)로 과거에 급제, 헌납(獻納)이 되어 간신(諫臣)의 풍도가 있었는데 감정(監正)으로 별세하였으며, 조부의 휘는 달존(達尊)으로 진사(進士)였고, 아버지의 휘는 탕(宕)으로 사직령(社稷令)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훈도관(訓導官)으로서 성취한 것이 많았다. 어머니 의성김씨(義城金氏)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응신(應辰)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혜하여 겨우 8세에 능히 글을 지었고 12,13세에 벌써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18세에 진사에,19세에 과시(課試)에 장원하고, 21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을 거쳐 한림(翰林)ㆍ주서(注書)가 되었고,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명종이 승하하였을 때 마침 명나라에서 조사(詔使)가 이르자, 공이 제공(諸公)을 위하여 길흉 의절(吉凶儀節)에 대해 많이 강정(講定=강론하여 결정하는 것)해 주었다. 병조좌랑으로 전임되었고, 전라ㆍ함경ㆍ경기의 도사(都事)를 역임하는 사이에 예조ㆍ병조ㆍ형조의 정랑(正郞)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명을 받들어 강원ㆍ경기의 재해(災害)를 복심(覆審)하였다.

 

정언(正言)이 되어서는 을사사화 때에 받은 위훈(僞勳=사화를 일으켜 옳지 못하게 받은 훈호(勳號))들에 대해 삭제하기를 청하였고, 지평(持平)이 되어서는 집정자의 불법 사실을 논핵하려 했는데 집정자가 미리 알고 논박 체직시키므로 직강(直講)으로서 춘추관(春秋館)의 직무를 겸하여 《명종실록》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이 후부터 나가서는 연안(延安)ㆍ장단(長湍)ㆍ양주(楊州)ㆍ평산(平山) 등 지방의 수령이 되었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제사(諸司)의 직무를 맡아 13년 동안 말없이 한산(閒散)으로 지냈다. 그중 연안에서 큰 송사(訟事)를 처결한 것에 대하여 권귀(權貴)들이 원한을 품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양주로 돌아와서 향교(鄕校)와 도봉서원(道峯書院)을 크게 수축하였다.

 

계미년에 율곡선생의 건백(建白)으로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고 문학 높은 사람들을 초치하였는데, 공이 여기에 참여하여 장령(掌令)ㆍ사성(司成)ㆍ장악원 정(掌樂院正) 등에 제수되었다. 상(喪)을 당하여 복을 마치고 나서 다시 제사(諸司)의 정(正)에 제수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왜노(倭奴)를 걱정하여 공을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제수하였는데 풍신수길이 사신을 보내왔다. 이 보다 앞서, 왜인(倭人)이 본국에 들어오면 관리들이 뇌물을 많이 주었는데, 공이 변장(邊將)과 약속하여 단호히 단절시켰고, 또 왜인에게 주는 세미(稅米)는 으레 물을 부어 불려서 그 수량을 채웠으므로 바다를 건너고 나면 문드러져 썩어서 먹을 수 없게 되곤 하였는데, 공이 이는 성신(誠信)으로써 교린(交隣)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여 즉시 금단시켰다.

 

만기(滿期)에 의해 판결사(判決事)로 전임되어서는 송사를 처리하는 데 세력이 있는 집이라 하여 사정을 두지 않았다. 대사간ㆍ승지ㆍ공조 참의 등에 제수되었고, 이후부터는 정원(政院)에 많이 있으면서 승지가 되었다.

 

임진년 4월에 왜구가 갑자기 쇄도하였다. 마침 공이 이조참의로서 부인에게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예 자진(自盡)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말하고 방 안에서 목을 매었다가 구하는 이가 있어 죽음을 면하였다.

 

이때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떠났으므로 공이 뒤를 따라 송도(松都)에서 만났는데, 공의 아우 정형(廷馨)이 송도유수(松都留守)로서 상에게 ‘신의 형에게 직무가 없으니, 신이 함께 일하기를 바랍니다.’고 청하므로 이를 윤허하였다.

 

대가가 관서(關西)로 떠난 뒤에 공이 송도를 끝내 고수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모부인을 업고 연안을 지나자, 연안사람들이 기꺼이 맞이하면서 ‘이분은 우리의 옛날 사군(使君)이다.’고 하였다.

 

이때 왜적이 해서(海西) 지방에 침입하여 열읍(列邑)에 통문을 돌려서 ‘우리를 환영하는 자는 상을 주고 도망친 자는 목을 베겠다.’고 달래므로 이민(吏民)들이 술과 고기를 마련해 가지고 공에게 돌아왔다.

 

이에 공이 원근에 격서(檄書)를 돌려서 순역(順逆)의 이치를 들어 효유하고 의병을 부르자, 김 공 덕함(金公德諴)과 조공 정견(趙公 廷堅) 등이 모여들어 드디어 수천 명의 관병(官兵)이 소집되었다. 왕세자가 이 소문을 듣고 편의에 따라 공에게 초토사(招討使)를 임명하므로, 공이 연안성으로 들어가 ‘분충토적(奮忠討賊)’ 네 글자가 쓰인 대장기(大將旗)를 세웠다.

 

왜장이 아군의 정비가 덜된 틈을 타 모든 둔(屯)에 배치된 적들을 모두 철수해 가지고 공격해 오므로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렀다. 사람들이 다 공에게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이 분연(奮然)히 나서서,

“경연(經筵)의 늙은 신하로서 이미 말고삐를 잡고 임금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한 방어선을 지키는 데 목숨을 바쳐야 한다.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더욱이 백성들을 효유하여 입성(入城)시켰는데, 어찌 차마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성안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모두 떠나라고 영을 내린 다음, 하인에게 풀을 쌓아 놓도록 하고 그 위에 앉으면서, “성(城)이 함락되거든 너는 바로 불을 놓으라.” 하니, 온 성안이 모두 감분(感奮)되었다.

 

적군이 드디어 사방으로 몰려들어 그 기세가 천지를 진동시켰으나 공은 더욱 차분하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가 밤중을 기하여 호각을 불도록 하자, 제군(諸軍)과 노약(老弱) 남녀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호응하여 금방 출전하려는 기세를 올렸다. 적군이 이를 매우 의아하고 두려워하여 비루(飛樓)를 만들어 성안을 내려다보므로 공이 대포를 쏘아 비루를 부숴버리게 하였다.

 

적군이 다시 풀을 쌓아 참호(塹濠)를 메우고 사방으로 달라붙었다. 공이 미리 철(鐵)을 달군 큰 횃불을 준비했다가 일제히 투하하는 순간에 갑자기 동풍이 크게 일어나 연기와 불꽃이 세차게 일어나니 적군이 크게 좌절되므로 공이 정예군을 뽑아 돌격하여 많이 참획(斬獲)하였다.

 

적군이 다시 온갖 전술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공이 기회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여 수없이 살상자를 내니 적군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사체를 불태우고 퇴각하므로 공이 군사를 보내어 추격하여 적군이 노략질한 물건을 노획하여 밤중에 사졸들에게 나눠 주었다.

 

상이 특지(特旨)를 내려 공에게 품계를 뛰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고 공의 아버지에게 관작을 추증하였으며, 왕세자도 친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처음에 공이 첩서(捷書)를 올릴 때, 다만 적군이 아무 날에 성을 포위하였다가 아무 날에 물러갔다고만 기재하였으므로 논하는 이들이 공로를 과시하지 않는 공의 마음에 신복하였다.

 

이로부터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저마다 영루(營壘)에 웅거하여 적군을 막자 적군이 배천(白川)으로 물러나 웅거하며 가을부터 그 이듬해 봄까지 날마다 와서 도전하다가 끝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배천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병조참판으로 불러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는데, 이윽고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전라감사가 되었다. 명나라 장수 고양겸(顧養謙)이 왜국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풍신수길을 왜왕(倭王) 에 봉해주기를 황제에게 주청하려하면서, 우리 측에서도 함께 주청하기를 요구하므로 공이 그 일을 보고하자, 상이 노하여 공을 죄주려 하다가 우계(牛溪)와 모든 재신(宰臣)들의 만류로 인하여 공을 체직(遞職)만 시켰다.

 

바로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어서는 토적(土賊)을 사로잡아 베고 숨은 간인(姦人)들을 색출하여 국문하였다. 이어 충청도감사가 되어서는 마침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이미 평정된 뒤인데, 대간(臺諫)이 공에게 사람을 마음대로 죽였다고 탄핵하였으나, 얼마 후에 상이 품계를 뛰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하고 황해도도순찰사(都巡察使)를 겸임시켰으며, 공이 하직을 고할 적에는 가까이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입었던 초구(貂裘 돈피로 만든 갖옷)를 벗어 하사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사건에 의해 파직되었고, 모부인이 우사(寓舍)에서 별세하였는데, 마침 왜구가 다시 발작하여 공에게 기복(起復)을 명하므로 이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연안(延安)을 지키게 하였으니, 공이 차자를 올려 10조목의 시사(時事)를 논하였으나 반응이 없었다.

 

왜구가 물러간 뒤에 다시 상차(喪次)로 돌아왔고 복(服)을 마친 뒤에도 제수되는 벼슬을 여러 차례 사양, 그대로 향리(鄕里)에 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조복(朝服)을 입고 대궐을 향하여 배례(拜禮)를 올렸다.

 

경자 년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자, 상차(喪次)에 나아가 곡배(哭拜)하고 돌아왔다가 이해 9월 10일에 별세하였는데, 임종 시에 1장의 만사(輓詞)를 손수 써서 자신의 뜻을 보였으며, 나이는 60세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충효대절이 있었고 총명이 뛰어났으며 안광(眼光)이 빛나서 글을 보는 데 다섯줄이 함께 내려갔고 또 다섯 번을 넘겨 읽지 않아도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장가들기 이전에 추문(醜聞)이 있는 권귀(權貴)가 사위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공이 승낙 하지 않았고, 윤원형(尹元衡)이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 서로 만나기를 요구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다.

 

또 정여립(鄭汝立)의 흉패(凶悖)함을 환히 간파하여, 온 세상이 다 그를 추허(推許)하였으나 공은 단호히 거절하다가 마침내 벼슬길에 장애가 많았지만, 이를 후회하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공에게 백금(白金)을 증정하였으나 이를 감히 받을 수 없어 조정에 봉납(封納)하였고 벼슬에 있은 지 40여년이 되었으나 별세하는 날에 한 섬의 비축도 없었다. 저서로는 《상례초(喪禮抄)》ㆍ《독역고증(讀易考證)》ㆍ《왜변초(倭變抄)》와 시문(詩文) 몇 권이 있고, 나머지 저술은 다 병화(兵火)에 없어졌다. ‘사류거사(四留居士)’로 자호(自號)하였다가 뒤에는 ‘퇴우(退憂)’로 고쳤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광부(光富)의 딸로서 천성이 인선(仁善)하여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으므로 이제야 공과 한곳에 부장(祔葬)되었으며, 공의 효(孝)에 대하여 사람들은 공더러, 옛날 노래자(老萊子)가 다시 났다 하였지만, 공은 모두 내자(內子)의 도움이었다고 하였다.

 

아들 화(澕,1562년 명종 17~1614년 광해 6)는 현감, 남(湳)은 증 형조정랑(贈刑曹正郞), 준(濬,/출계 伯父)은 직장(直長), 위(湋)는 증 공조좌랑(贈工曹佐郞), 면(沔,1574년 선조 7~미상)은 봉사(奉事)였고, 두 딸은 송정광(宋廷光)ㆍ윤서(尹漵)에게 출가하였다.

 

현감의 아들은 경장(慶長)ㆍ경성(慶成)이고 사위는 수문장(守門將) 손호신(孫虎臣)ㆍ조정견(趙庭堅)ㆍ문과(文科) 출신 신이우(申易于)이다. 형조정랑의 아내 민씨(閔氏)는 왜적을 만나 절사하였고, 아들은 경윤(慶胤), 사위는 오경여(吳慶餘)이다. 직장의 사위는 사예(司藝) 정도형(鄭道亨)ㆍ심의(沈誼)이다.

 

공조좌랑의 아들은 경란(慶蘭)이다. 봉사의 아들은 경구(慶久)ㆍ경후(慶厚)ㆍ경륭(慶隆)이고 사위는 나효창(羅孝彰)ㆍ집의(執義) 성태구(成台耈)ㆍ정유호(鄭維頀)이다. 송정광(宋廷光)의 아들은 이륭(以隆)ㆍ이창(以昌)ㆍ이형(以亨)이고 사위는 김자약(金自躍)ㆍ임무(林茂)ㆍ이심근(李深根)이다. 윤서(尹漵)의 사위는 유기증(兪企曾)이다.

 

공은 별세한 뒤에 훈적(勳籍)에 책록(策錄), 좌의정에 추증되고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수봉(受封), 충목(忠穆)이란 시호가 내렸다. 또 특명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연안 사람들이 사우(祠宇)를 세우 춘추(春秋)로 제사를 올린다.

 

공의 후손은 매우 많다. 장증손(長曾孫)은 무과(武科) 승지(承旨) 정현(靖賢)인데, 아들이 없으므로 그 후사(後嗣)가 되어 공의 제사를 맡은 이는 경란(慶蘭)의 손자 희현(希賢)이고, 지금 나에게 글을 청하여 비(碑)를 세운 이는 경륭(慶隆)과 사예(司藝)의 아들 경력(經歷) 정면(鄭勔)이다. 나의 선인(先人)이 늘 말하기를,

 

“임진년 4월 13일 새벽에 내가 장차 입궐하려 하였는데, 공이 말[馬]을 몰아 서쪽으로 달려가며 ‘대가(大駕)가 거둥하면서 우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하기에 나는 그제야 주상(主上)이 밤중에 출발한 줄 알았다.” 하며, 눈물 어린 표정으로 당시의 일을 이야기하곤 하였는데, 지금 내가 공의 비명을 쓰게 되니, 마치 어제새벽의 일과 같은 감이 들어 그윽이 창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은 집에 있을 적엔 / 公始在家

문예와 효우 뛰어났고 / 文藝孝友

 

조정에 있을 적엔 / 其在王朝

이를 말없이 고수하다가 / 頽然固守

 

난세를 만나서는 / 逢世之亂

온 역량 분발하여 / 乃奮身手

 

시와 서로 방패삼고 / 詩書干櫓

인과 의로 갑옷투구 삼아 / 仁義介冑

 

활용하는 데 결여됨이 없어 / 用不缺折

그 공로 더할 수 없으므로 / 功莫與懋

 

성주께서 크게 표창하였으나 / 聖主褒加

공은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네. / 而公不有

 

공이야 진정 그러하였건만 / 雖不有之

끝내 중간의 저해 때문에 / 卒遌其垢

 

사로(仕路)의 진출에 / 故於登庸

언제나 남보다 뒤졌고 / 人先己後

 

난리가 겨우 평정되어서는 / 喪亂纔平

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네. / 長城遽頽

 

임금이 그 충성 그리워 / 上思其忠

영애하는 뜻 표시하고 / 聿有榮哀

 

단서 철권에다 / 丹書鐵券

그 이름 운대에 기록하니 / 追上雲臺

 

이는 공이 평소 바라던 게 아니라 / 非公所期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일 세 / 實惟倘來

 

지금 공의 성취를 인연하여 / 我觀厥成

그 근원 추구해 보건대 / 以究根基

 

만약 그 효가 없었다면 / 苟無其孝

충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 忠焉用移

 

이미 그 덕 완성되었으니 / 旣全其德

좋은 명성 그 지 없네 / 慶譽無虧

 

저 전포 동쪽 / 錢浦之東

절 앞 강물에 비친 달이 / 寺前江月

 

바로 공의 유사이니 / 是公遺詞

천만년 환히 비치리 / 千古瑩澈

 

[주-01]

장성이---무너졌네 : 송 문제(宋文帝) 때, 명장(名將) 단도제(檀道濟)가 무제(武帝)를 도와 대공(大功)을 세운 후 위명(威名)이 대단하여 온 조정이 그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므로 문제가 조서를 내려 그를 체포하여 베려 하자, 그가 너무 분개하여 눈을 횃불처럼 부릅뜨고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내던지면서 “이제는 너의 만리장성이 무너진다.”고 한 데서 인용된 말. 《宋書檀道濟列傳》

 

[주-02]

영애 하는 뜻 : 자공(子貢)이 “부자(夫子)께서 살아 계실 적에는 사람마다 존친(尊親)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사람마다 슬퍼한다.”고 공자(孔子)를 그리는 데서 인용된 말. 《論語 子張》

 

[주-03]

단서철권 : 서약문(誓約文)을 쇳조각에 지워지지 않도록 주서(朱書)해서 공신(功臣)에게 주어 그 자손 대대로 죄를 면하게 하던 것.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6권

 

옮긴이 : 야촌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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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月川府院君李公神道碑銘幷序

 

壬辰延安之戰。載在國乘。野史至今談之者。莫不壯其事偉其忠而如見其人焉。今觀李公行狀一通。又知公之忠勇。性於天養於素。而非一朝臨亂慷慨者比也。公諱廷馣。字仲薰。上世有謁平佐羅祖。賜籍于 慶州。歷高麗入本朝。世有聞人。曾祖諱莒。登第。嘗爲獻納。有諫臣風。卒官監正。祖諱達尊。進士。考諱宕。社稷令。始爲訓導官。多所成就。妣義城金氏。通政應辰之女。公生而聰慧。八歲。能屬文。十二三。已有能詩聲。十八。進士。十九。魁課試。二十一。及第。由槐院爲翰林注書。陞典籍。爲工禮曹佐郞。明廟薨。適詔使至。公爲諸公所任。吉凶儀節。多所講定。改兵曹郞。歷全羅咸鏡京畿都事。間爲禮兵刑正郞。兼知製敎。奉命覆審江原京畿災傷。爲正言。請削乙巳僞勳。爲持平。欲論當路不法事。當路覺之。駁遞之。以直講兼春秋館。與修明廟實錄。自後出爲延安,長湍,楊州,平山。入則爲諸司官。低徊宂散者十三年。其在延安。決大訟。權貴人銜之。卽棄歸。在楊州。大修鄕校及道峯書院。癸未。栗谷先生建白設纂修廳。招集文學人。公與焉。拜掌令,司成,掌樂正。遭喪服除。復正諸司。朝廷以倭奴爲憂。拜公東萊府使。秀吉遣使來。先是倭人之來。官吏多賂賄。公與邊將約束痛絶。又所給倭人稅米。例和水使脹。以足其數。過海則爛不堪食。公以爲此非誠信交隣之道。卽禁切之。瓜遞。爲判決事。折訟不顧勢力家。拜大司諫,承旨,工曹參議。自後多在113_348d政院爲承旨矣。壬辰四月。倭寇猝至。公時爲吏曹參議。語夫人曰。國事至此。不如自盡。遂經于房裏。賴救者不死。時大駕已西幸。公追及於松都。公弟廷馨爲松都留守。請曰。臣兄無職事。願與同事。許之。大駕旣向關西。公知松都難守。負母夫人過延安。延安人喜迎曰。是我舊使君也。時賊入海西。通誘列邑曰。迎者賞逃者斬。以是吏民牛酒市歸。公遂傳檄遠近。諭以逆順。仍招集義旅。金公德諴,趙公廷堅等來會。遂得數千官兵。王世子聞之。以便宜拜公招討使。公遂入延安城。建大將旗。書奮忠討賊四字。賊乘未113_349a備。悉收諸屯賊來攻。煙焰漲天。人皆勸公避去。公奮曰。經幄老臣。旣不得執靮從君。則當乘一障以效死。豈可苟活。況諭民入城。何忍棄之。遂下令曰。不願留者皆去。仍令奴積草而坐曰。城陷。汝便火之。城中皆感奮。賊遂四合。聲振天地。公益安閒無怖色。夜半令吹角。諸軍及老弱男女。皆吶喊以應之。若將出戰然。賊甚疑懼。乃作飛樓。俯臨城中。公以大砲中碎之。賊又積草塡塹。四面蟻附。公預作灼鐵大炬。一齊投下。忽東風大作。煙난焰衝發。賊大挫却。公簡銳突出。斬獲甚多。賊復百道攻城。公隨機應變。殺傷無數。賊不能支。焚尸宵熸。公遣兵追之。獲其所掠。以與士卒。特旨超授同知中樞府事。贈官其考。王世子亦下書褒美。初公獻捷。只曰賊某日圍城。某日解去。論者服其不伐。自是遠近聞風。皆據營壘以禦賊。賊退據白川。自秋至翌年春。日來索戰。知不可犯。遂棄白川遁去。以兵曹參判。召至行在。俄拜全州府尹。旋爲全羅監司。天將顧養謙主和。將奏封秀吉。欲令我同奏。公上其事。上怒欲罪公。賴牛溪及諸宰。只遞職。旋復授全州府尹。擒誅土賊鞫僞伏。移按忠淸道。會李夢鶴叛旣平。臺諫劾公濫殺。已而上超加知中樞府事。兼黃海道都巡察使。陛辭。引見慰諭。解賜貂裘。丁酉。以事罷。母夫人歿于僑居。會倭寇再逞。有命起復。辭不許。俾守延安。公上箚論時事十條。不報。賊退。還喪次。服闋。屢辭除命。仍居鄕里。每朔望。朝服望闕拜。庚子。懿仁王后薨。入臨還。其年九月十日卒。將卒。自書二挽以見志。享年六十。公自少有忠孝大節。聰明秀發。目光炯然。觀書五行俱下。讀不過五遍。終身不忘。未娶。有醜而貴者。求以妻之。公不許。尹元衡居比隣要相見。亦不肯。又知鄭汝立兇悖。擧世推許。而公痛絶之。坐枳仕途而不悔也。天將劉綎贈公白金。公不敢受。封納朝廷。立朝四十餘年。而卒之日。無甔石之資。有喪禮抄,讀易考證倭變抄,詩文若干卷。其餘著述。皆失於兵火。自號四留居士。後改以退憂。夫人坡平尹氏。光富之女。仁善好施與。先沒而祔焉。公事親。人稱老萊子復生。而公則曰。繄內之助云。男澕縣監。湳贈刑曹正郞。濬直長。湋贈工曹佐郞。沔奉事。二女適宋廷光,尹漵。縣監男慶長,慶成。壻守門將孫虎臣,趙庭堅,文科申易于。刑曹妻閔氏。遇賊死節。男慶胤。壻吳慶餘。直長壻司藝鄭道亨,沈誼。工曹男慶蘭。奉事男慶久,慶厚,慶隆。壻羅孝彰,執義成台耇,鄭維頀。宋廷光男以隆,以昌,以亨。壻金自躍,林茂,李深根。尹漵壻兪企曾也。公沒後。錄勳追贈左議政月川府院君。諡忠穆。又特命旌閭。延安人爲立祠。春秋俎豆焉。公後承甚多。長曾孫武科承旨靖。賢而無嗣。爲其後而主公祀者。慶蘭孫希賢也。今請文樹碑者。慶隆及司藝男經歷鄭勔也。余先人每言壬辰四月十三日曉。將詣闕下。公策馬西走謂曰。大駕出。而亦使吾輩不知矣。於是始知上夜發也。因涕泣言當時事矣。今茲序公。怳如隔前晨矣。竊不勝愴然而悲也。銘曰。

 

公始在家。文藝孝友。其在王朝。頹然固守。逢世之亂。乃奮身手。詩書干櫓。仁義介胄。用不缺折。功莫與懋。聖主褒加。而公不有。雖不有之。卒遌其垢。故於登庸。人先己後。喪亂纔平。長城遽頹。上思其忠。聿有榮哀。丹書鐵券。追上雲臺。非公所期。實惟倘來。我觀厥成。以究根基。苟無其孝。忠焉用移。旣全其德。慶譽無虧。錢浦之東。寺前江月。是公遺詞。千古瑩澈。

 

[난-001]煙 : 煙一作火

 

宋子大全卷一百五十六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