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신도비명

춘전 이공 신도비명. 시장(春田李公神道碑銘. 諡狀)

야촌(1) 2009. 4. 25. 14:44

■ 이조판서 춘전 이공 신도비명

   (吏曹判書 春田 李公 神道碑銘)

  [생졸년] 1617년(광해 9)~1669년(현종 10)

 

  명곡 최석정 찬(明谷崔錫鼎 撰)

(명곡은 춘전의 아우 화곡 경억의 사위다.)

 

신라(新羅) 초기에 이알평(李謁平)이 혁거세(赫居世)를 도와 경주(慶州)에 적(籍)을 두었으니, 바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춘전(春田) 이공(李公, 이경휘)의 비조(鼻祖,=始祖)이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휘(諱) 금서(金書)란 분이 있었는데 삼한공신(三韓功臣)이요, 

그 후에 휘 제현(齊賢)은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시호(諡號)가 문충(文忠)인데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고 부르며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아주 드러났다.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휘 윤인(尹仁)이 창평 현령(昌平縣令) 휘 공린(公麟)을 낳았는데, 박팽년(朴彭年)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팔구(八龜)의 상서(祥瑞)가 있어 아들 여덟 명을 길렀다.

 

그중 셋째 이원(李黿)이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호(號)가 재사당(再思堂)인데 갑자사화(甲子史禍)에 화를 당했으니, 공의 5대조이다. 그 아우 생원(生員) 이타(李鼉)가 아들이 없어 재사당의 아들 이발(李渤)을 후사(後嗣)로 삼았으니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휘 경윤(憬胤)을 낳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집안의 화난(禍難) 때문에 벼슬하지 않았다. 이분이 휘 대건(大建)을 낳아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젊어서 태학(太學)에서 공부하여 사람들이 ‘관중안자(館中顔子)’라고 일컬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시발(時發)을 낳으니 호가 벽오(碧梧)로, 선조(宣祖)의 간발(簡拔)을 입어 재망(才望)이 세상에 으뜸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후 오랫동안 서북(西北) 변방을 다스리고 인조(仁祖) 초기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 받아 원수(元帥) 장만(張晩)을 도와 역적(逆賊) 이괄(李适)을 토벌하여 중흥명신(中興名臣)이 되었다.

 

시호가 충익(忠翼)인데, 작은 아들 화곡공(華谷公, 이경억(李慶億)의 귀현(貴顯)으로 인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승지(承旨) 신응구(申應榘)의 딸로 유명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현숙(賢淑)하고 글을 잘하였는데,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 2월 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경휘(慶徽)이고, 자(字)는 군미(君美)이다. 이보다 앞서 아버지 충익공(忠翼公, 이시발)이 바다에 해 두개가 아름답게 떠오르는 꿈을 꾸고서 마음에 이상하게 여겼는데 공의 형제가 잇따라 출생하였다. 

 

모습이 준걸스럽고 노는 것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으며, 문리(文理)가 일찍 성취되어 여섯 살 때 항우전(項羽傳)을 읽을 정도였다. 이때 아버지가 서관(西關)에 있을 때였으므로 방백(方伯) 박엽(朴燁)이 와서 뵈었는데 공이 옆에서 모시고 있었다. 

 

아버지가 박엽에게 절을 하라고 명하자, 공은 즉시 서서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방백께서 포학하여 살인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어찌 절을 하겠습니까?” 하니, 아버지가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아버지가 졸(卒)하였다. 

이때 공의 형제가 아직 어렸는데, 대부인(大夫人)이 스스로 스승이 되어 밤낮으로 게으르지 못하도록 독려하여 학업이 날로 진취되었다. 

 

나이 17세(1633년)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시(進士試)에 제4인(第四人)으로 합격하였고,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에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였다.

 

이보다 한 달 앞서 아우 화곡(華谷, 이경억)이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뽑혀 동시에 크게 명성을 울려 대부인을 영광스럽게 하니, 한 세상이 부러워하며 칭송하였다.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뽑혔고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으로 들어가 설서(說書)를 겸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예(例)에 따라 6품(品)으로 오르니, 성망(聲望)이 일세(一世)에 알려졌다.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으니,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지평(持平)을 두 번, 집의(執義)를 세 번, 도헌(都憲)을 여섯 번, 헌납(獻納)을 네 번, 사간(司諫)을 한 번, 대간(大諫, 대사간(大司諫))을 두 번 역임하였고,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에서 수찬(修撰)을 세 번, 교리(校理)를 여섯 번, 응교(應敎)를 다섯 번, 부제학(副提學)을 네 번 지냈다.

 

병조에서는 좌랑(佐郞)ㆍ정랑(正郞)과 참지(參知)를 각기 두 번 지내고 또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이조(吏曹)에서는 좌랑과 정랑을 각기 두 번, 참의(參議) 다섯 번, 참판(參判) 네 번을 지내고 판서(判書)로 승진하였다.

 

경조(京兆, 한성부(漢城府)에서는 우윤(右尹)을 지냈고, 정원(政院,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번을 지냈다.

 

성균관(成均館)에서는 전적(典籍)ㆍ직강(直講)ㆍ사예(司藝)ㆍ사성(司成)을 지내고 대사성(大司成)을 두 번 지냈다. 또 이조참판으로 가끔 사복시(司僕寺)와 장악원(掌樂院)의 정(正)을 겸대하고 검상(檢詳)ㆍ사인(舍人)ㆍ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냈으며, 실록청(實錄廳)ㆍ춘추관(春秋館)ㆍ중학(中學)ㆍ남학(南學)과 한학 교수(漢學敎授), 지제교(知製敎), 교서 교리(校書校理), 춘방(春坊,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 직(職), 괴원(槐院)과 주사(籌司, 비변사(備邊司)의 부제조(副提調)의 직함을 겸하고, 2품(品)에 이르러서는 동지경연춘추교서관사(同知經筵春秋校書館事)와 상의원(尙衣院)ㆍ와서(瓦署)ㆍ사포서(司圃署)의 제조(提調)의 직함을 겸하였다. 외직으로는 고산 현감(高山縣監)ㆍ강화 유수(江華留守)ㆍ경기 감사(京畿監司)를 지냈으니, 이것이 공이 전후로 역임한 관직이다.

 

공은 사람됨이 순정(醇正) 돈중(敦重)하고 기국(器局)이 크고 넓었다. 

평상시에는 말이 간략하고 모습이 엄격하고 의연하여 범접하지 못할 듯하였다. 

그러다가 사람을 응접할 때에 미쳐서는 너그럽고 관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조정에서의 일 처리는 한결 같이 충신(忠信)과 공평(公平)을 위주로 하고, 기강(紀綱)을 세우고 대체(大體)를 지녀 작은 일을 세밀하게 따지지 않았으며, 지론(持論)이 과격하지 않았다. 

 

사정(邪正)을 구분함에 이르러서는 소신이 확연하여 제공(諸公)들이 분분하게 의논을 다투다가도 공이 천천히 한마디하면 그대로 정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모두 공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 일을 잘못 처리한 수령(守令)과 법을 어긴 내시(內侍)를 탄핵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무술년(戊戌年, 1658년 효종 9년)에는 응교(應敎)가 되어 일찍이 재이(災異)가 나자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하니, 효종(孝宗)이 즉시 공을 불러 이르기를, “차자의 말이 절실하다. 

 

비답(批答)이 면담만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사대(賜對)한 것이다.” 하니,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천총(天聰)의 밝으심은 우리 백성의 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천명(天明)의 두려워하심은 우리 백성의 두려워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본원(本原)의 일에 마음을 더 쓰시어 수성(修省)의 방도를 다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천재(天災)가 아주 참혹하여 밤낮으로 걱정하였다. 

이제 유신(儒臣)의 말을 듣건대, 도움 된 바가 참으로 많다.” 하였다.

 

또 응지(應旨)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군도(君道)는 매우 광대하지만, 요컨대 수신(修身)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학문을 하지 않으면 몸을 수양할 수가 없으며 정사(政事)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어진선비들을 인접하여 성학(聖學)을 더 발전시키고 공안(貢案)을 고치고 전정(田政)을 닦을 것이며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주기에 힘쓰신다면, 몸이 수양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훌륭한 말이 비단 약석(藥石)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고는 특별히 포장(襃獎)하였다.

 

가을에 호남(湖南)을 염문(廉問)하고 인하여 여러 고을의 군량과 무기를 살피고 돌아와 매우 자세하게 아뢰었다. 인하여 바다 방비가 매우 허술하고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을 겹쳐 복역하는 폐단을 논하니, 특별히 사대(賜對)하여 이르기를, “서계(書啓)에서 조목으로 진달한 바가 대부분 합당하여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663년 현종 4년)에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儒生)들이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두 현인(賢人)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청하자 영남(嶺南)의 유생 김강(金鋼) 등이 상소하여 두 현인을 헐뜯었는데, 현종이 가부를 명시(明示)하지 않았다.

 

공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울분해 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 청대(請對)한 것은 그 일을 위해서인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사정(邪正)을 구분하고 시비를 분명하게 하는 일에서 국가의 치란(治亂)이 판가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천하에 어찌 공의(公議)가 펴지지 않고 사설(邪說)이 횡행하고서 나라가 잘 다스리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허락하지 않은 것은 두 현신의 도덕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언제 일찍이 김강을 옳다고 하였는가?” 하였는데, 이에서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이 정해진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사설을 하던 자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소하여 뜻을 가다듬어 정사에 부지런하기를 논하여 아뢰기를, “재이(災異)가 겹쳐 보이는데 나라에 미더운 일이 없습니다.

 

직언(直言)이 들리지 않고 대소 관원들은 게으름만 피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권강(權綱)을 총람하시고 충성스러운 간언을 받아들이시고 병(病) 때문에 스스로 막지 마소서. 인순(因循)하여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마시고 대신(大臣)을 책려(責勵)하고 백관을 경칙(警飭)하소서. 무릇 폐단을 개혁함에 백성을 구제하기를 마치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 구하듯 하소서.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여러 신하들을 책면(責勉)하시기를, ‘조정 신하들이 설사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유독 그 자신도 사랑하지 않겠는가?  하루아침에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가 되면 그 신세가 어떻겠는가?’ 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어 전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외어드립니다.”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현종이 온천(溫泉)에 거둥하였을 때 ‘삼남(三南,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의 세선(稅船)이 안흥(安興) 앞 바다에서 자주 파선하니 태안(泰安)에 포구를 파야 한다는 의논이 있게 되었다.

 

행조(行朝)에서 재신(宰臣)을 보내 형편을 살펴보고 계획이 이미 정해졌는데, 공이 상소하여 불가함을 진달하기를, “‘이런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조운(漕運)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이 한 설(說)이며, ‘지세가 순하지 못하므로 마침내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또 한 설입니다.

 

옛날 신숙주(申叔舟)가 역사(役事)를 시작했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으며 김육(金堉)이 건의하여 창고를 설치하려고 하다가 다시 중지했는데, 창고를 설치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는데 더군다나 포구를 굴착하는 것이겠습니까?

 

옛 말 에 이르기를,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일으키는 것이 한 가지 해(害)를 제거하는 것만 못하며, 한 가지 일을 일으키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공사를 일으켜 꼭 유리하다고 하더라도 경솔히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군다나 이해(利害)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경솔히 대중(大衆)을 일으켜 조종조(祖宗朝)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하겠습니까?

 

상년(上年)의 기황(饑荒)이 호서(湖西) 지방의 내포(內浦)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다행히 굶어죽기를 면한 자들이 거가(車駕)가 임행(臨幸)한다는 말을 듣고 모두 잠시라도 죽지 않고 은택 입기를 생각하고 있는데, 도리어 매를 때리며 모집하여 반드시 이루지 못할 역사(役事)에 노동하게 하여 목을 빼고 은택을 기다리던 백성들로 하여금 고개를 내저으며 괴로워하며 원망하도록 하겠습니까? 신은 그윽이 민망하게 여깁니다.” 하니, 그 일이 이 때문에 중지되었다.

 

경자년(庚子年, 1660년 현종 원년)에 이조 참의가 되었는데, 현종이 정청(政廳)에서 묻기를, “의관(醫官) 양제신(梁濟臣)을 일찍이 수령(守令)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지금 의망(擬望)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의관(醫官)을 수령에 제수하는 것은 일이 상격(常格)과 다르기 때문에 비록 성명(成命)이 있더라도 감히 갑자기 의망할 수 없습니다.” 하고는 임금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으나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그러자 양제신을 특지(特旨)로 금천 현감(衿川縣監)에 제수하고 공을 체직시켜 오랫동안 낙점을 하지 않았는데, 찬성(贊成) 송시열(宋時烈)과 전적(典籍) 이수인(李壽仁)이 진언(進言)하여 논구(論救)하였고 임금 역시 곧 후회하였다.

 

현종이 영상(領相) 정태화(鄭太和) 공에게 묻기를 “이경휘 형제 중 누가 더 나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할 수 있는데 형이 더 그릇이 큽니다.” 하였다.

 

좌상(左相) 홍명하(洪命夏)공이 아뢰기를, “그 형이 풍도(風度)와 역량(力量)이 나은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춘방(春坊)에서 이경휘의 사람됨을 보았는데 대체로 장자(長者)였다.” 하니, 조정 신하들이 모두 그 말을 시원하게 귀담아 들었다.

 

이조참의로서 승진하여 강화유수(江華留守)에 탁배(擢拜) 되었는데 조정에서 그가 외임으로 나가게 된 것을 중히 여겨 즉시 이조참판으로 옮겼다.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에 10여 년 동안 있으면서 공도(公道)를 넓히고 청탁을 막았으며 명기(名器)를 신중히 하고 추장(推獎)하고 억제하기를 한결 같이 그 재망(才望)만을 보아 한미(寒微)한 훌륭한 선비들이 발탁되고 요행을 바라는 자들은 저절로 그치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공이 등급을 매긴 바를 보고 그 승침(升沈)을 정하게 되었다. 

이상진(李尙眞)공 같은 분은 낮은 관직에 묻혀 있어 누구도 그 재능을 알지 못했으나 공이 한원(翰苑, 예문관)에 있으면서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천거했는데, 이공이 마침내 명상(名相)이 되어 세상에서 더욱 공의 밝은 지인지감(知人之鑑)에 탄복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있으면서 큰 흉년을 만났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진구(賑救)하고 연달아 장계를 올리자 임금이 공을 묘당(廟堂)으로 불러 함께 조세(租稅)를 감면하고 역(役)을 견감할 방책을 강구하여 백성들이 거기에 힘입어 크게 소생할 수 있었다.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 정월에는 아전(亞銓, 이조 참판)에서 전장(銓長, 이조 판서)으로 승진하였는데, 임금의 권우(眷遇)가 더욱 융숭하고 공의 명망이 흡족하였다. 오래지 않아 눈썹 부위에 종기(腫氣)가 나서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임금이 의관(醫官)을 보내 진맥하게 하고 연달아 약물(藥物)을 하사하고는 자주 병세의 경중을 물었는데 마침내 6월 17일 공이 세상을 떠났다고 고(告)하니, 향년(享年) 53세였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의례(儀禮)대로 하였다.

 

아! 효종(孝宗)과 현종(顯宗)의 성대한 시대에 성스러운 임금이 위에 계시고 어진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다. 공은 덕량(德量)과 기식(器識)이 위아래로부터 가장 중함을 받아 화곡공(華谷公, 이경억)과 함께 사류(士流)의 으뜸으로 일컬어져서 마치 대각성(大角星)과 장경성(長庚星)이 여러 별들 가운데서 반짝이듯 빛을 내었다.

 

그러다가 회천상(懷川相,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의 권위가 더욱 융중(隆重)하기에 미쳐서 그의 한마디 말에 사람을 진출시키고 내쳐서 온 세상이 모두 거기에 쏠리게 되었다. 

 

그러나 공만은 스스로 소신을 지켜 풍파 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으면서 일찍이 뜻을 굽혀 구차하게 따르지 않았으며 세상에서도 역시 감히 털끝만큼도 간여하지 못한 것은 공이 공다운 바가 있었기 때문이니, 공 같은 분이야말로 화락하면서도 아첨하여 동조하지 않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서필원(徐必遠)공과 김시진(金始振)공이 시속과 어긋나서 맞지 않아 비난하는 말이 시끄러웠다. 그래서 평생의 친우들도 시의(時議)를 두려워하여 배척하면서 돌보지 않았는데 유독 공의 형제만은 전의 우정을 온전히 지켜 시종 변치 않으니, 군자(君子)들이 그 우정을 칭송하였다. 

 

공은 이미 붕당(朋黨)을 일삼아 명예를 구하지 않으면서 강직하게 정도(正道)를 지키며 봉공(奉公)하며 직책을 다하였다. 현종께서 공을 깊게 아셨기 때문에 혹 뜻을 거스를 때가 있어도 후에 반드시 그의 일을 논한 말이 극진하고 성의가 간곡한 것을 살폈다. 

 

그래서 매양 장주(章奏)를 올리면 문득 총애하여 받아들였으며 마침내는 총재(冢宰, 이조 판서)로 발탁하여 나라의 정사(政事)를 맡겨 중외(中外)에서 조석(朝夕)으로 탁배(擢拜)되어 나라를 밝게 다스려서 나라가 번영하는 경사가 있기를 바랐는데, 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정 상공(鄭相公, 정태화)이 시(詩)로 애도하기를, “행실에 어찌 바른 길을 어길 것인가? 몸을 단속하여 종신(終身) 맑은 이름 보존하였네. 하늘이 마침내 어진 분의 장수(長壽)를 허락하지 않으니, 후일 나라가 기울면 그 누가 부지하랴?” 하였으니, 그 뜻은 대배(大拜)를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함이다.

 

전에 공이 나 최석정(崔錫鼎)에게 말하기를, “병자호란과 정묘 호란 이후 나라가 편안한 지 거의 30년이 지났는데, 세상의 운수란 오래 다스려져 오래 편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변란이 일어나 쟁탈하게 되는데 그런 조짐이 이미 나타나 나라의 근심이 바야흐로 크다. 우리는 혹 미처 그때를 보지 못하겠으나 그대들은 알아 두라.” 하셨다.

 

아!

갑인년(甲寅年, 1674년 현종 15년) 이후 조정에 더욱 변고가 많고 용사(用捨)가 정상이 아니어서 조정의 의논이 날로 분분하고 어지럽게 되었다. 공으로 하여금 수명을 늘려 오랫동안 그 지위에 있게 하고, 나라를 바로잡고 조화시켜 국론(國論)을 재단(裁斷)하게 했더라면 세도(世道)가 오늘날처럼 심하게 어지럽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군자가 실제로 마음을 잡음에 다툼이 없으니, 누가 화(禍)의 계제(階梯)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러 병들게 하였는가[君子實維 秉心無競 誰生厲階 至今爲梗]”라고 하였는데, 후세의 군자가 공의 세대를 논하면 반드시 세 번 거듭 크게 한숨을 쉴 자가 있을 것이다.

 

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모부인(母夫人)을 효성으로 섬겼다. 형제가 이미 귀현(貴顯)하여서도 항상 곁에서 모셨으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하여 기쁘게 해 드렸다. 

 

한 해가 넘도록 병 수발을 들면서 약물(藥物)과 반찬을 반드시 친히 올렸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예(禮)를 다해서 상복(喪服)을 몸에서 벗지 않았다. 내외(內外)의 법이 엄격하였고 아우 화곡공(華谷公, 이경억)과 더불어 머리가 희게 셀 때까지 함께 살면서 우애가 돈독하였다. 

 

집안 살림이 검소하여 입는 옷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부녀(婦女)들에게 비단옷을 입고 주옥(珠玉)을 차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명위(名位)가 점차 성(盛)해져서 형제가 번갈아서 전형(銓衡)을 맡았으며 아들이 또 과거에 급제하자 집안이 가득 차서 넘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항상 전리(田里)로 돌아갈 뜻을 두었다.

 

처음에 호를 묵호(默好)라 하다가 만년에 춘전 거사(春田居士)로 고쳤다. 공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자부하지 않았으나 시문(詩文)이 전아(典雅)하고 섬세하였으며 사부(詞賦)에 작풍(作風)이 적고 음조(音調)가 시원하여 ≪이소(離騷)≫나 ≪문선(文選)≫의 체(體)를 얻었다고 한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은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광흥수(廣興守) 윤게(尹垍)의 딸이요

영의정 윤방(尹昉)의 증손녀이다. 단정하고 정숙하여 시어머니를 성경(誠敬)으로 모시고 여공(女功)에 부지런하여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천품(天稟)이 청한(淸寒)하여 귀현(貴顯)한 집안사람 같지 않았으며 수용(需用)과 시여(施與)를 공의 뜻을 각별히 따라서 하여 자주 양식이 떨어진 것을 사람들은 몰랐다.

 

공보다 18년 뒤에 졸하니, 수(壽)가 72세였으며, 청주(淸州) 천내(川內)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처음에 인천(仁川) 도리현(桃李峴)에 장사지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모셔다가 합폄(合窆)하였다.

 

아들 여섯을 두었으니, 이인환(李寅煥)은 문과(文科) 출신으로 이조 참판인데 백부(伯父) 이경연(李慶衍)의 후사가 되었고, 다음 이인혁(李寅爀)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인데 후덕(厚德)하고 식견이 높아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고 있으며, 다음 이인욱(李寅煜)과 이인찬(李寅燦)은 모두 요절(夭折)하였으며, 다음 이인희(李寅熺)는 남원부사(南原府使)요, 다음 이인식(李寅烒)은 통덕랑(通德郞)이다.

 

이인환은 아들이 없어 이인식의 아들 이태곤(李泰坤)을 후사로 삼았다. 딸은 다섯인데 감사(監司) 남정중(南正重), 교관(敎官) 민백기(閔伯基), 좌랑(佐郞) 유봉일(柳鳳逸), 정언(正言) 윤성시(尹聖時) 및 윤성(尹宬)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 아들은 이대곤(李岱坤)이요, 딸은 여문익(呂文翊)에게 시집갔다.

이인혁의 네 아들은 이정곤(李定坤)ㆍ이후곤(李厚坤)ㆍ이제곤(李濟坤)ㆍ이철곤(李澈坤)이요, 세 딸은 현감(縣監) 최창익(崔昌翼) 및 홍득복(洪得福), 유태원(柳太垣)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인욱은 아들이 없어서 조카 이영곤(李永坤)을 아들로 삼았으며, 딸 하나는 현감 서명세(徐名世)에게 시집갔다. 이인찬은 아들이 없어서 조카 이제곤(李濟坤)을 아들로 삼았다. 

 

이인희의 네 아들은 이지곤(李至坤)ㆍ이영곤(李永坤)ㆍ이현곤(李顯坤)ㆍ이적곤(李迪坤)이며, 네 딸은 한중엽(韓重燁)ㆍ권처신(權處信)ㆍ정치겸(鄭致謙)ㆍ곽성제(郭聖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인식은 아들이 셋인데 이성곤(李成坤)은 지금 해주 판관(海州判官)이요, 이태곤(李泰坤)은 참봉(參奉)이요, 이원곤(李元坤)은 진사(進士)이며, 두 딸은 교리(校理) 홍치중(洪致中)과 곽희적(郭熙績)에게 각각 시집갔다.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은 모두 1백여 명이나 된다.

 

나 최석정이 젊어서 화곡공(華谷公, 이경억)의 집안으로 장가를 들어 공의 형제에게 경시(輕視) 당하지 않아 공이 한가할 때면 모실 수 있었다. 

 

그래서 한두 가지를 엿볼 수 있어 매양 공을 태산(泰山) 대하(大河)의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 공로(功勞)가 만물에 미치는 것이 넓은 것처럼 우러렀는데, 아! 이 세상에서 어찌 다시 뵐 수 있겠는가?

 

일찍이 ‘공은 대개 송조(宋朝)의 인물들과 같아서 침착하고 후한 기질(氣質)은 왕 자명(王子明, 송(宋)나라 태조ㆍ진종(眞宗) 때 왕단(王旦))과 같고 정대한 마음씨는 범 희문(范希文, 송나라 인종(仁宗) 때 범중엄(范仲淹))과 같으며 깊고 원대한 식려(識慮)는 이 태초(李太初, 북송의 명신 이항(李沆))와 같고 간중(簡重) 과묵(寡默)하여 사물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여 회숙(呂晦叔, 송나라 인종 때 여공저(呂公著))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론이지 내가 사사로이 한 말이 아니다.

 

전(傳,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작은 일은 몰라도 큰 일은 맡을 만하고, 6척(尺)의 고아(孤兒)를 맡길 만하고 백리(百里)의 땅을 위임할 만해야 하며, 큰 절조(節操)에 임하여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어야 한다.” 하였는데, 이런 분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공이 일찍이 화곡공(華谷公)에게 말하기를, “사위 최석정은 상서로운 기린(麒麟)이나 봉황(鳳凰) 같다.” 하셨는데, 나는 어른께서 기려주신 이 한마디 말씀을 평생 동안 잊지 못하고 있다. 

 

사복시 정 이인혁군이 외람되이 나에게 묘비명(墓碑銘)을 청하여 스스로 지은 행장(行狀)과 함께 영광스럽게 하려고 하므로 글을 못한다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서술하여 명(銘)을 쓴다. 내가 일찍이 화곡공의 묘갈(墓碣)에도 명을 지었으니, 서로 참고하여 보면 되겠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이씨(李氏)는 신라 혁거세(赫居世)를 도와 표암(瓢巖)에서 발상(發祥)하였네. 알평(謁平)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덕업(德業)이 있고 고려말엽에 훌륭한 이름이 끊임없이 이어졌네.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은 팔구(八龜)의 한 분으로 사화(士禍)를 입어 사책(史冊)에 이름 전하고,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는 우리 선조(宣祖) 때를 만나 그 명성이 어진 분들과 짝하였네.

 

공은 화곡(華谷)과 함께 걸출하게 뛰어나셨네. 

공은 황하(黃河)처럼 넓고 오악(五嶽)처럼 높으며, 

뛰어난 기상(氣象)은 실로 나라의 정간(楨幹)이셨네. 

풍도(風度)는 묵직하고 말씀은 간결하고 신중한 큰 그릇이셨네.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시대에는 여러 현인들이 모여 태평을 누렸네. 

영매(英邁)한 형제가 조정의 영수(領袖)로서 덕망이 나란하였네. 

임금이 누가 더 나은가 물으시니, 재상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말하였네.

따뜻한 임금의 말씀, 공을 장자(長者)라 포장(襃獎)하였네.

 

10년 동안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사사로운 청탁 물리치니 품류(品類)들이 청선(淸選)에 진출하였네. 

태재(太宰)를 형제가 번갈아 맡으니 다시없는 영광이었네. 

공은 준결(峻潔)하여 임금을 보좌할 재목으로 백관의 모범이었으니,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어찌 기울어진 것 부축하여 연장시킴이 적었겠는가? 

 

공의 효우(孝友)를 보면 화순(和順)하고 담락(湛樂)하게 몸소 행하였고, 조정에서는 논의를 주장하길 한결같이 충신(忠信)과 성의(誠意)로 하였네.

 

경기 감영에서 정사를 개혁하니, 교활한 자들이 충심(衷心) 바치고, 다툼이 진정되었네. 

세상이 바야흐로 허탄한 데로 달리니, 중인(衆人)과 함께 하기 부끄러워 나의 절조 지켰네. 

 

벗과 의리로 사귀어 곤경에 처해도 우정 저버리지 않았네. 

그 후덕하고 단아한 마음은 오탁(汚濁)한 지금 세상의 모범이 되네. 

공이 서거한 후 풍속이 날마다 갖가지로 무너지네.

 

나라에 군자(君子)가 없으니, 그 누가 이 근심 늦추어주나? 

천도(天道)가 선한 사람에게 후한 경사(慶事) 베풀어주네. 

상당(上黨) 서쪽 산과 물이 굽어 도는 곳에 공의 무덤 있네. 

내 말이 아첨 아니니, 영원히 이 아름다운 제사 전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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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吏曹判書春田李公神道碑銘 - 明谷崔錫鼎 撰

 

新羅初。李謁平實佐赫居世。著籍慶州。卽吏曹判書春田李公之鼻祖也。至高麗。有諱金書。官三韓功臣。其後諱齊賢。門下侍郞。諡文忠。世稱益齋先生。文章德業最著。入本朝。平安道觀察使尹仁。生昌平縣令公麟。娶朴公彭年女。有八龜之祥。育八子。第三曰黿。禮曹佐郞。號再思。沒於甲子史禍。公之五世祖也。弟生員鼉無子。取再思之子渤爲嗣。贈左承旨。生憬胤。贈吏曹判書。以家難不仕。生大建。以學行名。少游太學。人稱館中顏子。贈左贊成。生諱時發。號碧梧。被宣廟簡拔。才望冠世。當倭亂後。久掌西北邊事。仁廟初。拜刑曹判書。與張元帥協討逆适。爲中興名臣。諡忠翼。以季子華谷公貴。贈領議政。卽公之皇考也。妣貞敬夫人高靈申氏。承旨應榘女。襲訓名父。賢而能文。以萬曆丁巳二月七日生公。諱慶徽。字君美。先是忠翼公夢。海日雙麗。心異之。旣而公兄弟繼降。公生而俊偉。嬉戲異凡兒。文理夙詣。六歲。誦項籍傳。時先公在西關。方伯朴燁來見。公時在側。命之拜。公却立曰。吾聞方伯暴虐多殺人。何拜爲。先公大奇之。丙寅。先公卒。於是公兄弟方小。大夫人身自爲師。日夜敎督不怠。學業日就。年十七。中司馬第四。甲申。中文科別試。先一月。華谷擢庭試壯元。同時大鳴。以爲大夫人榮。一世艶稱。選槐院薦。入翰苑。兼說書。丙戌。例遷六品。聲望伏一時。遍歷淸要。於兩司。再爲持平。三爲執義。六爲都憲。四爲獻納。一爲司諫。再爲大諫。於玉堂。修撰者三。校理者六。應敎者五。副學者四。兵曹則佐郞,正郞,參知各再。又爲參判。吏曹則佐郞正郞各再。參議五。參判四。陞爲判書。京兆則右尹。政院則同副至右副凡五。入國子則典籍,直講,司藝,司成。而大司成則再。又以吏參兼帶。間爲司僕掌樂正,檢詳,舍人。戶議兼銜則實錄春秋,中學南學漢學敎授。知製敎,校書,校理。春坊諸職。槐院籌司副提調。至二品。同知經筵,春秋校書尙衣瓦署司圃提調。外則高山縣監,江華留守京畿監司。此公前後官歷也。公爲人醇正敦重。器度弘遠。平居辭簡而貌嚴。毅然若不可犯。及接人應物。恢然寬裕。人皆畏而愛之。其立朝處事。一主於忠信公平。引綱維持大體。闊略細苛。持論不矯激。至邪正之分。所守確然。諸公言議雖紛爭。公徐一言以定。以故事皆咨決於公。其在臺閣。劾守令不職及內侍踰法者。上皆從之。戊戌。爲應敎。嘗因災異陳箚。孝廟卽召公謂曰。箚辭切實。批答不如面談。故特賜對。公進曰。天聰明。自我民聰明。天明畏。自我民明威。惟殿下加意本原之地。以盡修省之方。上顧謂承旨曰。天災孔慘。夙夜憂懼。今聞儒臣之言。裨益良多。又應旨箚曰。君道至廣。要在修身安民。學不講則身不可得以修。政不擧則民不可得以安。御經筵接賢士。益進聖學。改貢案修田政。務寬民力。則身修而民可安矣。答曰。昌言不啻藥石。特加褒諭。秋。廉問湖南。仍審列邑餉械。歸奏甚悉。仍論海防疏虞。水陸軍疊役之弊。特命賜對曰。書啓條陳。擧皆合宜。予甚嘉之。癸卯。太學諸生請配享成,李兩賢於文廟。嶺儒金鋼等疏毀兩賢。顯廟不明示扶抑。公以副學入對言。是非不明。群情皆鬱抑。上曰。今日請對。乃爲此事耶。對曰。辨邪正明是非。國家治亂所由判。古今天下。安有公議不伸。邪說肆行。而能國其國者乎。上曰。先朝不許。非以兩賢臣道德爲不足也。予何嘗以鋼爲是。於是群下曉然知上心之有定。而邪說者不復作。疏論勵志勤政之道曰。災異疊見。國無可恃。而讜言不聞。大小偸惰。宜摠攬權綱。容受忠諫。毋以病憂自沮。毋以因循自安。責勵大臣。警勅百僚。凡於革弊救民。有若捄焚拯溺之爲。先大王嘗責勉群臣曰。廷臣縱不愛國家。獨不愛其身耶。一朝爲亡國大夫。奈其身何。天語在耳。臣敢爲殿下流涕而誦之。戊申。顯廟幸溫泉。時三南稅船數敗於安興洋。有泰安掘浦之議。行朝遣宰臣視形便。計劃已定。公疏陳其不可曰。此路一開。利於漕運。是一說也。地勢不順。終必無成。亦一說也。昔申叔舟始役未成而罷。金堉建議設倉而還止。設倉猶不可。況掘浦乎。古語曰。興一利。不如除一害。生一事。不如減一事。興作而有利。猶不可輕爲。況可不詳利害。輕擧大衆。徼祖宗未就之功乎。上年饑荒。湖西之內浦爲尤甚。幸而得免於殍殣者。聞車駕臨幸。咸願須臾毋死。思被惠澤。乃反鞭笞驅集。勞動於必不可成之役。使延頸顒望之民。懷疾首蹙頞之怨。臣竊閔之。事由是寢。庚子。爲吏議。顯廟問政廳曰。醫官梁濟臣曾命除守令。今不擬何也。公對曰。醫官除守令。事異常格。雖有成命。不敢遽擬。上累敎。執不可。特授濟臣陽川。遞公職。久靳點授。宋贊成時烈,李典翰壽仁進言論救。上亦尋悔之。顯廟朝而問領相鄭公太和曰。慶徽兄弟孰優。對曰。可謂難兄難弟。其兄尤弘大。左相洪公命夏曰。其兄風度力量似優。上曰。予曾於春坊。觀慶徽之爲人。蓋長者也。廷臣莫不洒然聳聽。以吏議陞擢江留。朝廷重其出外。卽遷吏參。在銓曹最久。歷踐十餘年。務恢公道。杜干請愼名器。奬抑一視其才望。寒畯得拔。冒倖者自息。朝流視公品藻。以定其升沈。如李公尙眞沈屈下僚。人莫之知。公在翰苑。排衆議而薦之。李公卒爲名相。世以此益服公知人之明。戊申在畿營。値歲大歉。竭心賑捄。狀牘連上。命致公於廟堂。與講減租蠲役。民賴以大蘇。己酉正月。以亞銓陞拜銓長。上眷益隆。公望洽然。未幾。腫發眉甚谻。上遣醫診視。連賜藥物。數問病輕重。竟以六月十七日告終。享年五十三。上震悼輟朝。賻祭如儀。嗚呼。孝顯之際盛矣。聖君在上。才賢滿朝。而公以德量器識。取重上下。與華谷公。並爲士流稱首。爛然如大角長庚之在列星也。及懷川相權位益隆重。輒以一言從違進絀人。擧世莫不茅靡。獨公嶷然自持。特立風波之中。未嘗曲意苟徇。而世亦不敢以纖毫非間。以公之所以爲公者故在也。若公非所謂和而不流之君子耶。徐公必遠,金公始振。與時枘鑿。謗訕紛然。平生親友畏時議。擯棄不顧。獨公兄弟全其舊好。始終不渝。君子稱其友道。公旣不事朋黨。不立名譽。侃然守正。奉公盡職。顯廟知公深。故或有觸忤。後必見察。其論事。辭語委曲。誠意懇摯。每章奏上。輒蒙寵納。卒之進擢冢宰。委以邦政。中外望其朝夕延登。以贊辨章國。有榮懷之慶。而公遽沒矣。鄭相公以詩哀之曰。擧足豈曾違正路。飭躬終自保淸名。皇天竟嗇仁人壽。他日誰扶大厦傾。意傷其未及大拜也。昔公嘗語錫鼎曰。丙丁以後。方內乂安。朝著寧謐。殆過三十年。世運不能長治而久安。變亂傾奪。其兆已見。宗國之憂方大。吾輩或未及見。而君行且知之。噫。自甲寅後。朝廷蓋多故矣。用捨靡常。廷議日益糺紛。使公而享有遐齡。久於位著者。庶幾和靖匡維。衷裁國論。世道乖亂。不至如今日之甚也。詩曰。君子實維。秉心無競。誰生厲階。至今爲梗。後之君子論公之世。必有三復而太息者矣。公早孤。事母夫人孝。旣貴。兄弟常侍側。非有故。未嘗暫離。時作嬰兒戲。以爲悅。侍疾經歲。藥膳必親。居喪盡禮。衰絰不去體。內外嚴截。與華谷白首同居。友愛篤至。家居廉儉。被服如寒士。戒婦女毋服錦綉珠玉。及名位漸盛。兄弟迭秉銓衡。子又登第。怵焉以滿盈爲懼。常有歸田之志。始號默好。晩改春田居士。公未嘗以文翰居。而詩文典雅贍暢。詞賦少作。風調瀏亮。得騷選體云。配貞夫人海平尹氏。>廣興守垍之女。領議政昉之曾孫。端莊淑哲。事姑盡誠敬。勤於女紅。老而不惰。資業淸寒。不類貴顯家。而需用施予。恪承君子之意。人不知其屢空。後公十八年卒。壽七十二。葬淸州川內枕庚原。公始葬仁川桃李峴。及是奉遷而合窆。擧六男。寅煥文科吏曹參判。爲伯父慶衍後。次寅爀司僕寺正。有厚德高識。見重於世。次寅煜,寅燦並夭。次寅熺南原府使。次寅烒通德郞。寅煥無子。取寅烒子泰坤爲後。五女適監司南正重,敎官閔伯基,佐郞柳鳳逸,正言尹聖時及尹宬。側室男岱坤。女呂文翊。寅爀四男。定坤,厚坤,濟坤,澈坤。三女適縣監崔昌翼及洪得福,柳太垣。寅煜無子。子其姪永坤。一女適縣監徐名世。寅燦無子。子其姪濟坤。寅熺四男。至坤,永坤,顯坤,迪坤。四女適韓重燁,權處信,鄭致謙,郭聖濟。寅烒三男。成坤今海州判官。泰坤參奉。元坤進士。二女適校理洪致中及郭煕績內外曾玄摠百餘人。錫鼎少贅華谷之門。公兄弟不鄙夷。得侍公閒燕。竊有以窺見所存之一二。每仰公如泰山巨浸。不見運動。而功澤之及物者廣。嗚呼。此世安得復見也。嘗謂公大類宋朝人物。器質沈厚。如王子明。心事正大。如范希文。識慮深遠。如李太初。簡重寡默。不以事物經心。如呂晦叔。此乃公誦。非余之私言也。傳曰。君子不可小知而可大受。可以託六尺之孤。寄百里之命。臨大節而不可奪。其在斯人歟。公嘗語華谷曰。崔甥如祥麟瑞鳳。長者一言之褒。終身不忘。僕正君猥見屬以墓銘。得自效於狀德之文。與有榮焉。不敢以文拙辭。謹敍而銘之。不佞嘗銘華谷碣。可以互見也。銘曰。李佐始林。發祥瓠巖有謁平。益齋德業。當麗季葉載顯名。亹亹再思。兆應八龜禍汗靑。碧梧之興。際我穆陵駿厥聲。配惟賢淑。公與華谷迺挺生。惟公弘毅。河嶽鍾異實幹楨。風度凝遠。出言簡訒器渾成孝顯之際。群彥萃會屬泰亨。英英叔伯。領袖朝德望實幷。王問孰優。相君曰兪難弟兄。溫然天語。稱公長者衮褒明。十年參銓。屛絶私干品流淸。進居太宰。塤篪遞代莫與榮。謂公峻躋。贊元台階百僚刑。大廈斯騫。曷不少延用扶傾。觀公孝友。愉婉湛孺自躬行。立朝秉論。一以忠信肫肫誠。躁營革風。狡僞獻衷鎭乖爭。世方騖虛。恥與衆趨守吾貞。交朋有義。困不捨棄背俗情。厚德端心。罕見汚今足範程。自公之逝。流風日壞百怪萌。國無君子。疇能弭此憂惸惸。天道與善。積厚流衍慶有贏。上黨之西。山紆水奫閟公靈。我詞匪諛。永遠是圖紀麗牲。 者叶渚。西叶仙。

 

출전 : 明谷集卷之二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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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曹判書李公諡狀

 

公姓李氏。諱慶徽。字君美。自號春田居士。又穪默好。鼻祖諱謁平。佐赫居世。始著。籍慶州。至高麗。有諱金書。官三韓功臣。配神鸞宮夫人羅王金溥女。其後門下侍郞鷄林府院君文忠公齊賢。以文章德業。名聞中朝。世穪爲益齋先生。入本朝。有諱尹仁。官平安道觀察使。生諱公麟。官昌平縣令。娶朴醉琴彭年女。有八龜之祥。果育八男。其弟三諱黿。文科禮曹佐郞。號再思堂。沒於甲子史禍。追贈都承旨。寔公五世祖也。其弟成均生貟鼉。無子。子再思子渤。贈左承旨。生諱憬胤。贈吏曹判書。兩世皆以家禍不仕。生諱大建。癸酉進士。世目爲館中顔子。不幸短命。爲士林所惜。贈議政府左贊成。生諱時發。刑曹判書諡忠翼。爲宣仁兩朝名臣。贈領議政。初娶驪興閔氏。進士敬男女。繼娶高靈申氏。承旨應榘女。以萬曆丁巳二月壬寅。生公于安邊府忠翼公任所。始忠翼公將聘申夫人。夢兩日相繼出海。覺而心獨異之。及公及公弟議政公。相繼生。遂以海日命公小字。幼雋偉異凡兒。六歲能誦項籍傳。隨忠翼公。贊畫西關。按使朴燁來就座。忠翼公命公出拜。公不可曰。聞按使暴虐喜殺人。何用拜爲。忠翼公甚奇之。甫十歲。忠翼公捐館。公號擗一如成人。申夫人惧公兄弟幼失學。課讀甚嚴。每戒之曰。吾所以苟延至今日者。只望汝輩能有所成立。汝苟自棄。吾復何望。於是公兄弟益自淬勵。早夜孜孜。至年十三四。文譽已蔚然。爲先輩所推服。十七。中癸酉司馬一等。出遊賢關。論議踔厲。卒常屈座人。甲申十月。擢別試文科。時公弟議政公。亦先公一月魁庭試。一世艷穪其榮。選隷槐院。乙酉。薦入史局。歷檢閱,待敎,奉敎兼侍講院說書。丙戌。陞典籍。移兵曹佐郞,司憲府持平。論淸州前牧使崔繼勳貪黷不法狀。請拿覈。繼勳抵賴。且多誣公語。禁堂有右繼勳者。議讞不以實。上特命拿公問。大臣言臺諫以風聞論人。設有差誤。不宜逮問。上然之。只命罷職。諫院爭執。仍劾禁堂。上不許。己丑。叙復兵曹佐郞。陞正郞。又拜持平。庚寅。出爲高山縣監。律身淸簡。愛民以誠。及歸。民追思碑之。壬辰。選入玉堂。因事忤旨。有勿付職之命。甲午夏。議政公廵按嶺南。旣復命。孝廟特賜召對。以前後奉使穪旨。面加奬諭。顧筵臣曰。此李某之同出乎。承旨洪處亮曰。某之弟也。上曰。頃有勿付職之命。今可付職矣。爲直講,兵曹正郞,副校理。乙未。與館僚陳箚忤旨。諸僚幷有付籤之命。罰名獨不及公。公累䟽固辭。得遆乃已。連除修撰,校理,司諫院献納。丙申。以副修撰。與諸僚聯箚陳戒。上卽引見。呼公進曰。近日天灾孔慘。憂惧方切。今觀爾等之箚。言甚切實。以文字批答。似涉無實。欲爲面諭。有此引見之擧矣。公對曰。臣聞天聦明。自我民聦明。天明威。自我民明畏。唯願殿下澄本源之地。盡修省之方。則天心克豫。國事修擧。在一轉移之間耳。上亟加嗟賞。顧語承旨曰。今見玉堂之箚。又聽儒臣之言。多有裨益之事矣。薦拜吏曹佐郞。遆爲献納。以內官。踰越法例。擅侵外朝。啓罷其職。丁酉。兼南學敎授實錄兼春秋。陞吏曹正郞兼漢學敎授,侍講院司書,校書館校理。爲便養。陳䟽乞郡。詞意懇篤。上愍其情理。特允所請。而銓部格不施。戊戌。爲副校理,吏曹正郞兼侍講院文學,中學敎授。尋以暗行廉察湖南。旣復命。多所條陳。而尤致意於軍兵弊瘼。率爲該曹所防啓。公又䟽陳海防踈虞水陸軍疊役之苦。反覆累百言。上優批褒異。甞召對庙堂諸臣。特令公同入。謂公曰。觀爾書啓中許多所陳。似無未盡之事。仍問沿路軍民繇役及諸般利害。公口對甚悉。上幷嘉納焉。秋。陞副應敎。移司憲府執義。以微事遆。爲成均館司成。復爲副應敎。宋同春浚吉自山林。徵拜憲長。朝野方想望其風采。而遽陳䟽辭遆。公上章。請仍置其職。以盡用賢之實。上答以追悔無及。令該曹依公䟽施焉。遆爲成均館司藝。己亥。復拜執義兼侍講院弼善。內侍作弊及守宰不職者。多所彈論遆。爲掌樂正。復入玉堂。應旨陳箚。有曰。君道至廣。要在修身安民。學不講則身不可得而修。政不擧則民不可得而安。御經筵接賢士。益進聖學。改貢案脩田政。務寬民力。則身修而民可安矣。上特賜優答。至以今聞昌言。不啻藥石爲敎。所陳之事。亦令廟堂稟施。歷司諫院司諫,司僕寺正。又歷執義,應敎,議政府檢詳舍人。冬。寧陵復土。公以殯殿都廳。例陞通政。拜兵曹參知。庚子。拜吏曹參議。甞於獨政日。顯廟傳于政廳曰。醫官梁濟臣。曾有守令差遣之命。今於陽川之窠。不爲備擬何也。公卽啓曰。醫官除邑宰。事異常䂓。不議長官。不可擧擬。上累下敎。俾公奉行。公竟執不從。於是上特除濟臣陽川。而舊例。政官罷政下直。始得出。至是上故終日不下其啓。政院累稟。亦不答。罷漏後下直之啓始下。公經夜政廳。還家。卽呈單得遆。自是雖擬他職。必靳點。宋尤齋時烈,李典翰壽仁相繼陳䟽。言其不可。上尋亦悔。除承政院同副承旨。以親病辭遆。除成均館大司成。復爲同副承旨。轉至左副承旨。辛丑。又拜吏曹參議。四月。丁申夫人憂。癸卯。服闋。拜戶曹參議,承旨。遷弘文館副提學。時太學諸生。請以牛栗兩賢從祀文廟。而嶺儒金鋼等䟽詆之。上以知道爲批。而太學辨誣之章。乃以勿爲煩瀆爲答。公請對痛卞鋼等誣罔狀。且言批旨未安。上曰。今日請對。謂有何等事。乃此事耶。公曰。卞別邪正。豈非治亂之大機乎。上曰。自先朝不許從祀。非以兩賢道德爲不足也。又敎曰。予何甞以金鋼之言爲是。與之辨別亦甚疲勞矣。公退而陳䟽曰。夫邪正之別。是非之分。國家之治亂興亡所由判。頃者。金鋼之䟽。實爲斯文大變。而邪正互爭。是非不明。則卞誣之擧。烏可已也。伏見聖批。殊欠卞別之道。顯示厭薄之色。此聽聞之所以駭惑。羣情之所以抑欝者也。又曰。古今天下。安有公議不申。邪說肆行。而能國其國者。若使羣下。早知聖意之所在。則豈有今日之紛紜。正恐日月之明。或眩於邪正。幷容其誣毁之言矣。又曰。目今灾異屢見。人心國勢無一可恃。而近日之旱。人類將盡。固知殿下憂勞恐惧之誠。宜無所不至。然而畏天恤民之意。未見有感孚于上下。賢士日遠。讜言不聞。大小臣工。悠泛偸惰。寘國事於無可奈何之地。嗚呼。豈不危哉。又曰。政宜捴攬權綱。益奮振作之志。容受臺啓。以廣忠諫之路。無以病憂自沮。毋以因循自安。責勵大臣。警勑百僚。痛革委靡之習。各存惕慮之心。凡可以應天消灾之道。革弊救民之政。博盡羣言。俱收長策。有同救焚拯溺。則庶有一分圖回之勢。又曰。先大王每於臨朝開講之時。慨然下敎。責勉群臣曰。廷臣縱不愛國。獨不愛其身耶。一朝爲亡國大夫。則奈其身何哉。天語在耳。尙如昨日。臣請敢以先王此敎。爲殿下流涕而誦之。伏願殿下以慨然之心。克體于身。以責勉之敎。激勵臣僚。上優批曰。䟽中陳戒。予甚嘉之。而厭薄之說。予實未曉也。由是。士論稍張。國是乃定。竄鋼之啓。始發矣。自是連除吏曹參議,承旨,大司諫,大司成,副提學。或再除。或三四除。間又兼槐院籌司,副提調。䟽决廳堂上。上甞於筵中。詢鄭陽坡太和曰。李某兄弟孰優。鄭公對曰。是眞所謂難弟難兄。而其兄稍似弘大矣。洪左相命夏曰。某之風度力量。似勝於弟矣。上曰。予曾於春坊進講時。觀某之爲人長者也。乙巳。擢授江都留守。是時。亞銓缺。大臣難其人。進白筵席。移拜吏曹參判兼國子長,籌司有司堂上。又兼瓦署,承文提調。以病乞遆。下該曹。只許遆備局。餘如舊。冬。又呈辭單至三。亦不許遆。亞卿之三單加。由異數也。丙午。再爲都憲兼同春秋,知經筵,校書館提調。丁未。由兵曹參判。出按圻藩。秋旱甚。民以飢告。公屢馳啓陳狀。洪相公命夏請致公備局。同議蠲役。而專用公區畫。旣量减諸般民役。而田一結所捧。只八升。由是民得大抒。水原有妖僧戒習獄。上以啓聞差晩。特命拿公問。大臣玉堂言水原獄案。不能詳。更使窮覈其遅滯。勢固使然。此出審詳之意。有何深罪事。上迺命罷職。戊申。叙拜都憲。是年爲都憲者四。爲亞銓者三。爲副提學者二。又兼尙衣司圃提調,同知經筵。夏。三南稅舡。幷於安興前洋臭載。於是泰安掘浦之議復起。遣度支長及備局堂上。察其形勢議定。而役且始矣。公以都憲。䟽論不可曰。此路一開。漕運永便者。萬口一談也。地勢不順。終必無功者。亦萬口一談也。二者之說。臣固飫聞矣。然光廟朝特遣相臣申叔舟始役。未成而罷。頃年故相臣金堉又建議設倉。審其不可而止。設倉猶不可。况於掘浦乎。仰惟祖宗朝國力之盛衰。民生之休戚。諸臣智慮之長短。視今日爲如何。而猶不果。卒就其役者。必有可已之勢存於其中也。若使一番開鑿。永世無虞。則祖宗已先爲之。豈肯留待後人乎。古人有言。興一利不如除一害。信斯言也。作事而有利。猶不可輕爲。况不詳其利害。不度其難易。輕動大衆。徼祖宗所未就之功乎。上年飢饉。湖西爲甚。湖西之中。內浦爲尤甚。卽今殍殣未葬。流離未還。幸而餘存者蓬頭菜色。近聞車駕近住溫泉。擧有須臾無死。願蒙惠政之望。反乃鞭笞驅集。騷動遠近。試其命於必不可成之役。使延頸顒望之喜。反懷蹙頗疾首之㤪。臣窃爲湖民憐愍。凡事出於不得已。則雖勞不怨。可已而不已。則雖少必怨。臣未知此役。果可幷擧於纔經飢饉連年擧動之日乎。其言反覆諄懇。上令廟堂覆奏。廟堂卽以䟽辭誠合恤民之道。請依施覆啓。掘浦之議遂寢。己亥。冢宰缺。特命亞卿中加擬。公遂膺進擢。於是輿望洽然。而天眷益隆重矣。夏。將設科。大臣言近來武擧。多有奸僞。此由試官非其人。今宜恪別擇差。以爲鎭壓之道。特命公。差武所試官。旣罷。猝患眉腫。日就危篤。上再遣醫看病。且賜藥物。至令掖隷齎送人葠。每醫官入診。輒問吏判病情輕重何如。辭䟽四上。始許遆。竟以六月十七日。告終于正寢。春秋五十三。訃聞。上震悼。轍朝致祭。皆如例。八月。權窆于仁川桃李村。後葬淸州川內木瓜洞庚坐之原。尹夫人祔焉。公天姿醇正。氣度弘偉。平居簡默。喜怒不遽。而風儀凝重。望之若不可犯。然至其待人接物。則寬厚有容。傳所謂威而不厲。和而不流者。公實近焉。與弟議政公同時通籍。其淸名直節。爲一世模楷。當時善類倚以爲重。每薦紳之間。論議紛爭。公徐以一言定之。莫不帖伏。是故。朝廷有事。未甞不取决於公。雖其持論重厚。不尙乖激。而至於邪正之分。所守確然。威武不能屈。其糾繩君違。䂓正官邪。則又言語委曲。忠愛勤摯。故章奏每上。天褒屢降。始或觸忤。而終必獲伸。前後踐歷。無非華要極選。而掌銓柄最久。自郞僚佐貳。至長席首尾。殆近二十年。常以甄拔人物爲己任。公道大闢。干托不行。尤重惜名器。技藝雜歧。一不濫授。雖以此屢承嚴敎。至於遆職。而不少動。仕路爲之一淸。衡鑑甚明。被選擧者。無不穪其職。故當世士大夫一聽其藻品。以卜前塗之升沉。是以雖移他職。或罷散家居。繼公而秉銓者。輒以通塞。咨於公以决疑焉。篤於孝友。以沖年失怙。爲至痛。事大夫人誠敬備至。與議政公朝夕侍側。非公故及接賓客。未甞須臾離也。時作嬰兒戱。以悅親意。凡祿俸饋遺。一無所私。悉以恣大夫人所用。病則夙夜衣不解帶。親操藥以羞。旣沒。執喪盡禮。三年之內。雖盛暑。未甞釋哀。與議政公白首同居。兩家子弟。亦共一室。兒無常父。人無常財。閨門之內。和氣藹如。家故淸貧。而不治産業。尤嚴於辭受之節。人不敢以苞苴相遺。雖位躋上卿。久秉銓衡。而門無雜賓。蕭然若寒士家。性不喜奢華。常飭子女無得服錦繡珠玉。子孫能至今遵而勿失。與人交。必有終始。旣知其人可取。不以世之取捨憎愛而變其志。少與徐判書必遠,金參判始振友。二公不能與時俯仰。訕謗溢世。昔之所與厚者。亦皆排擯不遺力。獨公兄弟能保衆毁之中。情好無替。李相公尙眞。沉屈下僚。世莫之知。而公在翰苑。獨排衆議而薦之。後卒爲名相。人以此益服公篤於友道。而明於知人也。公早負公輔望。朝野日望其作霖作礪。大濟時艱。而壽堇踰中身。人皆痛惜其不究厥用也。陽坡鄭公知公最深。世傳方公之爲冢宰。陽坡公欲以位讓之。未及而公遽沒。故其挽公之詩曰。擧足豈曾違正路。飭躬能自保淸名。皇天竟嗇仁人壽。他日誰扶大廈傾。此可以見公望重一時也。東平尉鄭公載崙。陽坡公之胤也。甞著公私聞見錄。其中有載公事者。其言曰。李判書某。與金判書佐明。甞會公廳。語及鞫獄事。李公曰。我國鞫獄。舊例忒嚴。不無寃死者。若能稍改其法。日後所活。奚但王賀之萬人。金公曰。何以言之。李公曰。善爲文者。平居無事結撰䟽章。數日凝思。屢易草稿。猶不能盡其意。况罪人蒼黃口供乎。方其就鞫之時。心䰟遁喪。而皁隷高喝。促令納供。換稱甲乙。錯認東西。勢之所必然。而取其恇㥘中迷亂之供。指爲違端。旣施刑訊之後。則雖有追陳暴寃之言。使不敢開口。故一入鞫獄。無得生出。彼有罪者。固無所惜。若是鴻罹者。則其爲寃當如何。自今定法。如有追陳之語。一皆收錄。刑訊之時。雖非承欵之語。有所陳則又收錄之。使言出於罪人之口者。一無所遺。以聞於上。則聖鑑所照。必得情罪之虛實。而無罪者。可蒙哀矜之典矣。李公卒後。余先考左議政府君。追聞是言曰。李君美此一言。亦足爲賢宰相。而天奪之速。未及大拜可恨。議政公諱致和。東平尉所後考也。幷錄之以告世之君子云。公文詞贍雅。筆法亦妙。而絶不以詞翰自居。有作輒弃不收。只有如千卷藏于家。配貞夫人海平尹氏。廣興守垍之女。領議政文翼公昉之曾孫。生六男。長寅煥。爲伯父慶衍後。文科吏曹參判。次寅爀。進士司僕寺正。次寅煜,寅燦。幷早圽。次寅熺。府使。次寅烒。內外諸孫揔敎百餘人。甞聞先輩穪。可以托六尺之孤。寄百里之命。臨大節而不可奪。唯公可以當之。嗚呼。若公詎不謂巨人偉器也哉。公之沒今六十二年。而尙不擧易名之典。今公孫元坤及曾孫錫禧。以僕正公所爲行錄。屬德壽。俾爲狀。謹序次如右。以備太常之考据焉。<끝>

 

출처 > 李德壽西堂私載卷之十一 / 諡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