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예조참의 이경선 선생 전사일기.

야촌(1) 2020. 4. 24. 00:34

 예조참의 이경선 선생 전사일기 / 29世

(禮曹參議 李慶善 先生 戰死日記)

 

공의 초명(初名)은 경징(慶徵)이요. 자(字)는  군선(君善), 호(號)는 남포(藍浦), 오촌공(梧村公) 대건(大建)의 손(孫)이요. 충익공 벽오 시발(忠翼公 碧梧 時發)의 아들로 1600년(선조 33) 5월 초(初) 2일 태어나.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병자호란(丙子胡亂) 시, 광주 험천 전투(廣州 險川 戰鬪)에서 장열히  전사(戰死) 하니 향년 37세였고, 정축(丁丑) 1637년(인조 15) 5월 26일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 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1624년(인조 2) 사마(司馬)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1633년(인조 11) 11월 17일 계유 식년 방, 33인 중 10등(을과 7등)으로 문과 급제(文科及第)하여, 교서(校書), 교리(校理),  저작(著作), 예조좌랑(禮曹佐郞),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을 역임한 후, 1636년(인조 14) 1월에 남포 현감 겸, 홍주 진관  병마절제사(洪州鎭管 兵馬節制使)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14일 북녘 오랑캐 청 태종 홍타시(弘他時)가 난(亂)을 일어 켜, 12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서울로 물밀듯 쳐들어오자 미쳐, 막아 내지를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몽진(夢塵)하여 들어가니 때는 추운 겨울밤 9시였고 인조께서는 민익진(閔益震)에게 명하여 삼남(三南)에서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출전하라 하였다.

 

이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충청도내의 병마를 불러 모으고 각 읍 수령(各邑守令)들과 찰방(察訪)들도 불러 모아 남포 현감 이경선(李慶善)을  참모(參謀)로 삼고 전(前) 참판(參判)인 무인 최진립(武人 崔震立)을 좌영장, 심일민(沈逸民)을 우영장(右營將)에, 별장에 황박(黃珀), 중군에 이건(李楗), 방량 차사원(放粮差使員)에 이상재(李尙載), 군기 차사원(軍器 差使員)에 연산 현감  김홍익(連山縣監 金弘翼), 심약(審藥)에 이시량(李時亮)을 삼고 출전했는데 벼슬한 사람이 140명이고 잡색 군(雜色軍)이 2,432명이었다.

 

수원 산성으로 들어가 적정을 정찰하며 전진하여 12월 26일 헌인 능으로 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적세가 크게 떨쳐, 더 나가지 못하고  광주 검천(廣州 儉川)에 진(陣)을 머물렀다. 그 이튼 날, 12월 27일 이른 아침에 적병은 높은 봉우리로부터 내려오는 짙은 안개를 타고 급습 해왔다.

 

불의에 급습을 당한 아군은 혼란에 빠져 지탱을 못하고 감사 정세규(監司 鄭世規)는 절벽 아래 구렁으로 굴러 떨어졌으나 간신히 살아났고 이상재, 최진립, 황백, 이건, 이시량은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이경선과 김홍익만은 여전히 적과 싸우며 손에 잡고 있던 칼로 거추장스러운 옷자락과 옷소매를 잘라버려 몸 놀리기에 편하게 하고 몸을 바쳐 나라를 돕고 여기서 죽자는 결심이었던 것이다.

 

군량미를 쌓아놓고 노적(露積) 가리로 올라가 우뚝 히, 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독전(督戰)하였고 물러서는 병사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칼로 쳐버렸다. 창끝과 살촉이 서로 마주치는 데서도 흩어 지지 않고 적을 무찌르며 버티고 싸운 것은 이경선과 김홍익의 힘이었던 것이다.

 

군중(軍中)이 놀라고 어지러워진 데다 이미 주장(主將)을 잃었으므로 서로 밟고 밟히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경선은 큰소리로 병마절제사가 여기 있다. 도망가는 자는 참한다고 외치며 몸을 날려 뒤쫓아 가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겁에 질려 전의(戰意)를 잃고 무너지는 진세(陳勢)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전세를 알아차린 공(公)은 여기서 죽자 결심하고 곧바로 노적(露積) 가리 위로 되돌아와서 칼을 고쳐 잡고 달려드는 호병 십여 명(湖兵 十餘名)을 치고서 말 아래로 떨어졌다. 급히 다시 일어나 또 수명의 호병을 쳐 죽이니 호병들도 두려워서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이렇게 싸우던 중 불행히도 칼이 부러지는 바람에 적에게 살해(殺害)되었고 김홍익도 여기서 전사(戰死)하였으니 12월 27일이었고 이는 군중에서 직접 눈으로 본 병사들이 전(傳)한 말이다.

 

이듬해 1637년 1월 19일에 가서야 형(兄) 경충공(慶忠公)이 소식을 듣고 시신(屍身)을 모아 수습하여 본적, 온몸이 창자 국 투성이었고 성한 곳이라곤 없어서 형용(形容)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차고 있던 혁낭(革囊)과 병부(兵符)가 시신과 같이 있었고 노적가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판별(判別)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진중(陳中)에서 죽은 사람이 늘려 있었건만 유독 이경선과 김홍익의 시신만이 이같이 참혹(慘酷)하고 잔인(殘忍)하게 창에 찔린 것은 싸움에서 시종(始終) 물러서지 않고 독전(督戰)하며 많은 호병을 쳐 죽였기 때문에 앙 갚음으로, 죽은 뒤에도 난자(亂刺) 한 것이 틀림없고 여러 백 명(白名)이 전하는 바도 이를 밑 바침 해주고 있다.

 

대군(大軍)이 이미 무너지고 주장(主將)의 통솔(統率)도 없는데 이경선과 김홍익은 지방의 말단(末端) 관료(官僚)로서 죽어 마땅할 때, 죽지 않고 욕(辱)되게 살기를 탐하여 살기를 꾀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이 생각하고 더욱 굳게 적에 대항한 숭고(崇高) 한뜻과 몸에는 수십 군데나 창에 찔리면서도 죽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가벼이 생각하였으니 공(公)의 죽음은 어찌 그리도 장열 하였던가!

 

공의 나이 37세로 한참 일할 나이였건만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경술 1730년(영조 6) 9월에 왕명으로 정려(旌廬)를 세워라 명하여 그해 11월 용인 공세 곡 동구(龍仁 貢稅谷 洞口)에 정려(旌閭)를 세우다.   

 
崇禎紀元後二庚戌(1730년 영조 6)
撰人未詳(찬인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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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정려 소재지]

 

1658년(효종 9) 7월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한 묘비가 산소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한국전쟁의 역사적 질곡과 더불어 편액만 남기고 불에 타 소실(消失)되고, 죽산 후인(竹山后人) 안형열(安亨烈)이 찬(撰)한 묘갈(墓碣)이 있다. 묘의 소재지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 22-18(산직마을), 숭렬사(崇烈祠) 앞 신자원(申座原)이다.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이 공의 12대손이기도 하다.

 

[참고해설]

◯ 헌인릉 : 조선 제3대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의 능(현지명:서울 서초구 내곡동)

◯ 전사지 : 검천(儉川)은 오늘날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낙생저수지 아래임

◯ 잡색 군 : 평소 군역의 의무가 없던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조직된 군사를 말함)

◯ 남포현 : 오늘날의 보령시 남포면(藍浦面)을 말하지만, 당시엔 충남 보령시 전체가 남포현이었음.

◯ 몽  진 :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김.

◯ 정  려

충신 정려(旌閭)는 후손들이 세거하는 오늘날의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으나, 왜정 시대 일본이 조선의 정신문화 말살 정책에 따라 소실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11월 진천군에서, 진천읍 산척리 산  22- 18. 공의 묘소 아래 건립하고, 현판(懸板)은 12대손인 필자가 보존하고 있는 원판을 탁본해서 천연기념목인 후박나무로 복원 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예조참의 이경선 선생 묘역
 
예조참의 이경선 선생 충신 정려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