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191집《두타초(頭陀草)》책16, 잡저(雜著),〈요백발문(饒白髮文)〉
요백발문(見我白髮) - 이하곤(李夏坤)
(글의 요점은 요즘 말로 발상의 전환을 잘 표현한 글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어버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늙어 감을 안타까워하며 흰 머리를 뽑으려 들고, 뽑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아예 검게 물들인다. 그런데 18세기의 문인 이하곤(李夏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일찍 노쇠하여 서른 대여섯부터 머리에 한 가닥 두 가닥 흰 머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딸아이가 이것을 볼 때마다 싫어하면서 족집게로 뽑았는데, 나는 막지 않았다. 이제 흰 머리가 거의 절반이 되었는데도 족집게로 뽑는 일을 아직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어느덧 내 나이가 마흔 다섯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2, 30년 전을 돌아보았다.
내 모습은 나이와 함께 바뀌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가 나의 심신과 언행을 살펴보니 유독 바뀐 것이 없었다.
그러니 사람이 쉽게 바뀌는 것은 그저 외모뿐이요, 바뀌지 않는 것은 마음인가 보다.
아니면 남들은 외모와 마음이 모두 바뀌는데 나만 마음이 바뀌지 않은 것일까?
아, 옛적에 거백옥(蘧伯玉)은 예순이 될 때까지 예순 번 바뀌었다.
이는 외모와 마음이 모두 바뀐 예라 하겠다.
거백옥이 거백옥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의 경우, 외모는 예전의 내가 아니로되 마음만은 예전의 나 그대로다.
외모는 바뀌었지만 마음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바뀌지 않았는데 예전의 나를 벗어나고자 한들 가능한 일이겠는가?
내 머리카락은 허옇게 될 때마다 족집게로 뽑힌다.
이 때문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검은 머리카락뿐이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늙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어릴 때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바뀔 법한데도 바뀌지 않은 것은 누가 한 일인가?
나는 이제부터 머리카락이 허옇게 변하지 않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앞으로는 너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도록 하리라.
아침저녁으로 너 흰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바뀌지 않는 나의 마음이 너를 따라 바뀌도록 하리라.
□ 이하곤,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글(饒白髮文)>《두타초(頭陀草)
余早衰。自三十五六。鬢毛已有一莖二莖白者。女兒輩見之。輒惡而鑷之。余不
(여조쇠 자삼십오육. 빈모기유일경이경백자. 여아배견지. 첨오이섭지. 여불)
禁也。至今白者幾半鬢矣。而鑷之猶不休。余忽自念吾年已四十五矣。回視二十
(금야. 지금백자기반빈의. 이섭지유불휴. 여홀자념오년이사십오의. 회시이십)
年三十年前。則貌與年化。殆若二人。而吾考之吾之心身言行之間。獨無所化乎
(년삼십년전. 즉모여년화. 태약이인. 이오고지오지심신언행지간. 독무소화호)
哉。然則人之所易化者特皃。而所不化者心歟。抑人皃与心俱化。而吾獨不心化
(재. 연즉인지소역화자특아. 이소불화자심여. 억인아여심구화. 이오독불심화)
歟。噫。昔蘧伯玉行年六十而六十化。是心與皃俱化也。伯玉之所以爲伯玉者此
(여. 희. 석거백옥행년육십이육십화. 시심여아구화야. 백옥지소이위백옥자차)
也。若吾者。皃非故吾而心獨故吾也。是皃化而心不化也。心不化而欲免乎故吾
(야. 약오자. 아비고오이심독고오야. 시아화이심불화야. 심불화이욕면호고오)
則其得乎。盖吾髮隨白而隨鑷。故吾所見者獨黑者耳。吾未始以爲老也。而猶有
(즉기득호. 개오발수백이수섭. 고오소견자독흑자이. 오미시이위노야. 이유유)
童之心也。然則使我心可化而不化者。又誰之爲歟。吾自此唯恐吾髮之不白也。
(동지심야. 연즉사아심가화이불화자. 차수지위야. 오자차유공오발지불백야.)
請自今日始。饒汝白者。朝夕覽汝。使我不化者。將隨汝而化矣夫。
(청자금일시. 요여백자. 조석람여. 사아불화자. 장수여이롸의부.)
젊은 나이에 흰 머리가 돋으면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옛사람들도 늙은 모습을 감추려고 거울을 보면서 흰 머리를 뽑았다.
그 때의 감회를 담은 詩도 적지 않다. 이하곤은 서른 대여섯에 처음 흰 머리가 생겼다.
아내가 아침 창가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뽑아보이자 이하곤은 경악(驚愕)하였다.
그때의 심정을 담은 시(詩)도 전한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다. 젊은 날에는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기자 조선의 학자답게 내면을 돌아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외모는 바뀌는데 자신의 마음은 바뀌지 않아 원숙한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개탄하였다. 거백옥이 마흔 아홉이 되어서야 그간의 삶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는 故事가 있거니와, 예순의 나이까지 예순 번 잘못을 고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하곤은 거백옥을 본받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열심히 흰 머리를 뽑던 일을 그만두겠노라 하였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흰 머리가 많아질수록 그에 맞추어 마음을 바꾸어 바르게 만들겠다고 다짐하였다. ※요즘 말로 발상의 전환을 말한다.
사람들이 흰 머리나 수염을 뽑는 것은 늙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홍양호(洪良浩)의 "소영거사가 백발을 장사지낸 글에 쓰다.
제소영거사장백발기(題小瀛居士葬白髮記)"라는 글을 보면, 홍상철(洪相喆)이라는 사람은 흰 머리가 다시 나지 않도록 하려고 뽑은 머리카락을 아예 매장하고 장사까지 지냈다고 한다.
흰 머리가 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싫은가 보다.
조선시대 유행하던 우스개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노수신(盧守愼)이 흰 머리를 열심히 뽑자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노수신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백발은 사람을 죽이므로 백발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지봉유설(芝峯遺說)에 나오는 이야기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부지런히 흰 머리를 뽑은 나머지 늙어서도 검은 머리를 유지한 사람이 다섯 가지 장점을 들었다.
◇추하고 늙은 것을 숨긴다,
◇얼굴을 곱게 해준다,
◇젊은이들을 따르게 한다,
◇처첩을 즐겁게 한다,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된다.
그러자 흰 머리 뽑기를 포기하여 백발이 된 사람이 말하였다.
“형체가 있는 수염이야 숨길 수 있겠지만 형체가 없는 나이야 끝내 숨길 수 있겠는가?”
흰 머리는 사람이 죽음에 이를 징조(徵兆) 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뽑다보면 무엇이 남겠는가?
흰 머리는 공평(公平)하다. 두목(杜牧)이 <송은자(送隱者)>라는 시에서 “세상의 공평한 도리는 백발뿐이라, 귀인의 머리라도 봐준 적이 없으니. 공도세간유백발, 귀인두상불증요(公道世間惟白髮, 貴人頭上不曾饒)”라고 한 이래, ‘백발공도(白髮公道)’는 유명한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흰 머리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아울러 마음도 올바르게 바뀌어 표변(豹變)하는 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옛사람의 마음이자 지금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재훈
'■ 경주이씨 > 경주이씨 명인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문좌(李文佐) (0) | 2020.09.25 |
---|---|
예조참의 이경선 선생 전사일기. (0) | 2020.04.24 |
이봉수장군의 산소(1563~1634) (0) | 2020.03.01 |
이교영(李喬荣) (0) | 2019.11.13 |
이구징(李耉徵) (0) | 2019.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