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의 제2혈지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3리) 407-5의 일용골 뒷산을 말하는 곳인데, 천내강을 굽어보고 있는 자리다.
이곳은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구릉으로서, 산의 정상 높이가 해발 약 150m 정도 밖에 안된다.
이곳 입지는 용화리에서 흘러내려 오던 물줄기가 이곳 일용골 구릉을 S자 형태로 휘어돌아 충북 영동군 양산면 쪽으로 빠져 나가고, 북서쪽으로는 금산읍에서 흘러나오는 봉황천이 천내강과 합류하는 곳이다.
그리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5호로 지정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12기가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팔선바위라 하여 신성시 하고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은 선인부사도강형(仙人浮莎渡江形)으로 동양(東洋)의 두번째 가는 혈지(穴地)로 유명해서, 풍수가들의 발걸음이 끊기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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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부사도강형의 문헌내용(석초자연풍수지리연구소 채영석 글)
지금까지 알려진 '선인부사도강형' 에 관한 만산결(萬山訣)과 이곳 천내리 일대에서 전하는 설(說), 장익호선사의 유산록(遊山錄)의 기록을 정리해 보았다.
1. 만산결(萬山訣)의 결록(訣錄)내용이다.
▲선인부사도강형산도(仙人浮莎渡江形山圖)
『금산(錦山) 천내(川內) 병오룡(丙午龍) 사유축감계득(巳酉丑坎癸得) 진파(辰破) 선인부사도강형(仙人浮莎渡江形) 횡작삼혈순승(橫作三穴順承) 위안취적봉단좌(爲案翠積峰端坐) 월용봉삽천(月龍峰揷天) 후유룡(後有龍) 전유낙안평(前有落雁坪) 수구인암입(水口印岩立) 동방이지(東方二地) 선등과갑(先登科甲) 명현비여주문공삼인병출(名賢比如朱文公三人幷出) 부귀차여왕공자이십팔인병출(富貴比如王公子二十八人幷出) 기간문무장상계계불핍지지(其間文武將相繼繼不乏之地) 하유천기(下有千基)』
간략하면 "금산 천내리에 병오룡(丙午龍)으로 입수(入首)한 터는 사유축방(巳酉丑方)과 감계(坎癸)방에서 득수하고, 진방(辰方)으로 파구(破口)되는 선인부사도강형의 혈인데, 횡장(橫障)으로 길게 벌려 삼혈(三穴)을 작혈(作穴)하였다.
전방의 취적봉(翠積峰) 안산이 단정하게 응기(應氣)하고, 뒤쪽에서 솟구친 월영봉(月影峰)이 혈을 후조(後照)한다. 강 건너 펼쳐지는 낙안평(落雁坪)이 아늑하고, 수구(水口)에는 인암사(印岩砂)가 직립(直立)하였다.
동방에서는 두 번째로 치는 대혈(大穴)로, 자손들이 등과(登科)하는데, 주문공(朱文公)같은 명현(名賢)이 셋이나 배출되고, 부귀를 겸비한 왕공자(王公子)같은 인물이 28인이 나오는데, 문무장상(文武將相)이 끊이지 않는다.
그 아래는 천년기업지지(千年基業之地)가 될 택지(宅地)가 있다" 로 요약할 수 있다.
2. 이곳 천내리 민가(民家) 등에서 전하는 부사도강과 관련한 설화이다.
『이곳 천내리(川內里)에 '대지대혈' 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이곳 대혈은 동방에서는 두 군데 밖에 없는 곳으로‘내안’이라 불리는 천내리의 뒤 산을 일컫는다.
이곳은‘선인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이다 하여 붙여진 형국명(形局名)인데, 금강건너편의 넓은 벌판을 낙안평(落雁坪)이라 부르고, 금강 좌측 편은 봉황이 하늘을 나르는 봉황봉(鳳凰峯)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 구릉일대는 문화재 자료인 선사시대의 고인돌과 수많은 묘지들이 산재하며, 또 우측강변에는 충남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용과 호랑이 조각상 2기가 있는데, 이것은 1361년(공민왕 10) 홍건족 난이 일어나자 안동(安東)의 청량사(淸凉寺)로 피신해 있던 공민왕이 풍수지리에 합당한 본인의 수능(壽陵)터를 찾을 것을 국풍(國風)에게 명한다.
그러자 전국을 돌며 터를 찾던 지사가 금산(錦山)의 동쪽 20리 지점인 이곳 천내리에‘선인부사도강’의 명당이 있다고 보고하여 왕릉(王陵)예정지란 표식으로 용석(龍石)과 호석(虎石)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3. 이 글은 고(故) 장익호 선사가 1983년 6월 이곳을 답사하고 작성한 유산록 내용을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금산(金山) 동국(東國-우리나라) 제2지라는 부사도강형을 찾아서 천내리(川內里)에 도착하니 금수강산(錦繡江山)이다. 금강이 흐르는 제원교(濟原橋) 위에서 사방을 관망하니 산세(山勢), 수세(水勢)가 과연 천하일품이다.
금강은 동남방(東南方)에서 흘러와 대원(大圓)을 그리며, 제 고비를 돌아 다시 동방(東方)으로 소수(消水)하여 금산에서 흘러오는 대천(大川)과 신술방(辛戌方)과 건해방(乾亥方)에서 흘러오는 대천들은 이곳에서 합류(合流)하여 일대천심취적(一大天心聚積)되니 처음 보는 수세의 장관이라 하겠다.
산세 역시 동조공로(同祖共路-동일한 조종산으로 오는 용맥) 수 백 리를 초초래조(초초來朝-멀게 달려와)하여 상호 공립(拱立-두 손을 잡고 옆으로 선다)하였으니 환봉형세(環峰形勢-고리처럼 산정이 연결되는 형세) 또한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혹은 봉황래조(鳳凰來朝-봉황이 달려오듯), 혹은 호거(虎踞-범이 웅크리듯), 용반(龍盤-용의 받침), 혹은 장군(將軍), 혹은 학군형태(鶴群形態, 학의 무리)로 내진(來盡-달려와 멈춤)하여 옹위(擁衛-끌어안음)하니 산세(山勢) 수세(水勢)의 일대도회처(一大都會處-산과 물이 한데 어울려 몸을 섞는)요, 천하일품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주산(主山)에 올라 내세(來勢)를 관망하니 녹존(祿存) 대룡(大龍) 평지행룡(平地行龍)하여 종횡주(從橫走-옆으로 길게 벌리며 나아감)하여 강락(降落)하는 형세는 갑묘(甲卯)로 천굴(穿屈-甲卯방향으로 낙맥하거나 행진)하면서 돈립(頓立-조아려 일으키며)하여 병오(丙午), 임자(壬子)로 횡장(橫障-子午방으로 길게 벌리는)하기를 십여단(十餘段-십 여 차례) 층층강락(層層降落-층층으로 떨어지듯) 소위 옥계장락자(玉階障落者-옥계단을 밟고 내려오듯)로, 극히 존귀한 용세(龍勢)이다.
평지강락(平地降落-평지로 떨어짐)이 다하니 천주일돌연후(穿珠一突然後-구슬을 꿰듯 솟구친 연후에) 녹존소치형(祿存梳齒形)으로 대결(大結-크게 맺어)하여 마치 흡사(恰似) 뗏목과 같은 형태를 이루니 부사도강형이라 함이 가당하다.
속락(速落) 일혈(一穴)하였으니 정미(丁未) 입수에 정좌계향(丁坐癸向)이며, 임감(壬坎), 계득(癸得)에 간인파(艮寅破)이나 주혈(主穴)은 아니다.(註: 次穴之處를 지칭한 것임) 또다시 재결(再結, 다시 맺음)하였으니 이것이 곧, 일대간룡결혈자(一大幹龍結穴者-大幹龍으로 맺은 主穴)이다.
혹자(或者) 이를 일자문성(一字文星) 운운하나, 기실(其實)은 평지녹존소치(平地祿存梳齒-땅바닥으로 낮게 엎드린 祿存 의 梳齒形)에 횡작대결혈(橫作大結穴-양옆으로 길게 橫障으로 벌려 맺은 大穴)이다.
녹존소치(祿存梳齒) 맥(脈), 대회전(大回轉)하였으니 마치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배(背)와 면(面)이 분명하나 속사부지차혈(俗士不知此穴-속사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혈)이다.
무식배(無識輩)가 혈(穴)을 얻으려 하나, 용맥락세난난무정처(龍脈落勢亂亂無定處-용맥의 형세가 어지럽고, 정하기조차 내키지 않는)이라 혈형(穴形)도 또한 막연하니 이것이 곧 조물주가 대혈(大穴)을 비장(秘藏)하기 위한 방도(方途)이다.
음래양수(陰來陽受-脈象으로 떨어져 평평하게 받음)하였으며, 양중음작(陽中陰作-평평한 중에 볼록)되었으니 암중약동(暗中躍動-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 약동하는 기운)함을 그 어찌 속사(俗師)의 우안(愚眼)으로 식별(識別)할 수 있으리오, 은은기괴(隱隱奇怪)하게 결혈(結穴)하였으니 을좌(乙坐)와 묘좌(卯坐)이며, 물은 손사(巽巳), 경태(庚兌), 신술(辛戌), 건해방(乾亥方)에서 오더라,
혹은 범장(犯葬-어긋난 葬處)하였으며, 장분지처(將分之處-마땅한 장소가 아님)에 은장(隱葬-葬處를 숨겨놓음)되었으니 이 주혈(主穴)만이 일대간결(一大幹結)이며, 삼백리 원기(元氣-백두대간룡의 末落 정기)의 수기자(受氣者)이다.
사수(砂水)가 대강(大江)이니 행룡이 심원(甚遠)함을 알 수 있으며, 조수(朝水) 또한 대수(大水)이며, 안산(案山) 또한 원원단좌(遠遠端坐-멀고 바르다)하였고, 수구산(水口山)이 높고, 긴폐(緊閉-여러 산자락이 얽혀 닫혀 보이지 않음)되었으니 이 또한 대혈(大穴)의 증좌(證佐)이다.
대저 소혈(小穴)일수록 근산(近山)이 긴밀(緊密)하며, 다정하나 원산(遠山)은 공조(拱朝)치 않는다. 또한 대혈(大穴)일수록 근산(近山)이 긴밀(緊密)치 않으며 무정한 듯, 그러나 원산원수(遠山遠水)는 긴밀하게 공조환요(拱朝環繞-朝山이 어깨를 마주하며 둥글게 띠를 두르듯 흐름)한다.
그러므로 속사들의 안목(眼目)으로는 식별하기가 곤란하며, 목도(目睹-눈으로 직접확인)하더라도 천기(賤棄-천하다고 버림)하는 것이 상식이다. 한 노인의 말에 의하면 허다한 인사들이 이를 찾으려 다녀간다는 것이다.
결록(訣錄)에 의하면 동방(東方) 제 2지라 하였으니 참말로 부귀불가형언(富貴不可形言) 지지(之地)이다. 강변(江邊)에는 용석(龍石)과 호석(虎石)이 인작(人作)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보호한다고 하는데, 그 연유를 알 길이 없더라. 이상이 유산록에 소개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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