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점필재 김종직 문인록(佔畢齋 金宗直 門人錄)

야촌(1) 2009. 4. 22. 01:08

■ 점필재 김종직 문인록

   (佔畢齋金宗直 門人錄)

 

 ● 김맹성(金孟性)    

     김맹성(金孟性)의 자는 선원(善源)이고 호는 지지당(止止堂)이며, 정통(正統) 정사년에 출생하였고, 해평인(海平人)이다. 조 매계(曺梅溪)가 선생의 시집(詩集)에 쓴 서문에 이르기를, “성산(星山)의 가천(伽川)에 살면서 독서(讀書)와 저술(著述)하기를 좋아하였고, 시 짓기를 더욱 좋아하여 날마다 음풍(吟諷)을 일삼았으며, 가인(家人)에 대한 생활 영위의 일은 일삼지 않았다.

 

그리고 천성이 술을 마시지는 못하나 손이 오면 술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문득 거나하게 취하여,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았으며, 부귀(富貴)와 영리(榮利)에 담박하였다.

 

선원(善源)은 문벌 좋은 집에서 태어났으니, 고 재상인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의 외손이요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의 생질이었다. 그래서 내외손(內外孫)의 친당(親黨)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간혹 벼슬하기를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탐탁찮게 여기었다.

 

일찍부터 중한 명성이 있었고 개연히 세상에 나가볼 뜻도 있었으나, 누차 과제(科第)에 실패하고 나서는 가천 가에 집을 지어 지지당(止止堂)이라 편액을 걸고 시주(詩酒)를 스스로 즐기면서 장차 그대로 생애를 마치려는 뜻이 있었다.”하였다.

 

그리고 점필 선생(佔畢先生)이 지지당 선생과 정분이 가장 두터웠으니, 서로 왕래하면서 경학(經學)을 강론했고, 서로 수창(酬唱)한 시첩(詩帖)은 이루 다 기억할 수도 없다.

 

그리고 점필 선생의 아들 곤(緄)이 단정하고 신중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지지당 선생이 그를 사랑하여 마침내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성종(成宗)이 즉위한 처음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자 지지당을 불러 중부 참봉(中部參奉)으로 삼았다.

 

뒤에 병신년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나서는 간성(諫省)을 거쳐 금종(禁從)의 직에 올라 화려한 명성이 더욱 널리 퍼졌는데, 이윽고 어떤 일에 연좌되어 고령(高靈)에 유배되었다. 고령은 가천(伽川: 성주군 가천면)과의 거리가 10여리 밖에 안 되었으나 한 번도 자기 집을 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로 여겼다.

 

오랜 뒤에 환조(還朝)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고, 정미년 봄에 서울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51세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요우(僚友)인 정자건(鄭子健)이 극력 주선해줌을 힘입어 무난히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한훤 선생(寒暄先生)이 지지당 선생을 사사(師事)하였으니, 지지당 선생의 간직한 바를 또한 상상할 만하다.

감히 공경하여 앙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점필 선생의 문집 가운데 지지당 선생과 서로 수창한 시만도 거의 30여 수(首)가 되니, 점필유고(佔畢遺稿)의 보존된 것을 이미 10의 2, 3이라 하였고 보면, 30여 수 이외에 그 망실(亡失)된 것이 아마 더욱 많을 듯하다.

 

그러나 선생의 문집 속에는 점필 선생과 왕복한 시는 하나도 없다.

지지당 선생의 문집을 신유 년에 찬집하였는데, 이때가 무오년의 천양지화(泉壤之禍)를 당한 지 4년 뒤이고, 또 신유 년으로부터 4년째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있었으므로, 점필 선생의 명호(名號)는 의당 세상에서 크게 꺼리는 바가 되었기에, 그 화답하여 부친 詩까지도 감히 편입(編入)하지 못했던 것이니, 그때의 풍색(風色)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지지당(止止堂)이 거처하는 정사(精舍)에는 한때의 명현(名賢)들이 와 놀면서 제영(題詠)을 남겼는데, 점필 선생의 시문(詩文)도 그 가운데 많이 있었다.

 

그런데 지지당 선생이 작고한 뒤에 한번은 별실(別室)의 꿈에 누가 와서 말해주기를,“빨리 당상(堂上)의 현판(懸板)들을 걷어치우라.”하므로, 별실이 놀라 깨어 그 꿈을 이상하게 여겨 즉시 제현(諸賢)의 제영들을 걷어서 숨겨버렸는데, 이윽고 중사(中使)가 서울에서 내려와 점필재 선생의 제영을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는 대체로 유자광(柳子光)이 자기가 함양군(咸陽郡)에 제영해 놓은 현판(懸板)을 점필재가 일찍이 발거(拔去)시킨 데에 원한을 품고 모든 점필재의 시편(詩篇)이 있는 곳은 끝까지 수색하여 극력 발거시킴으로써, 점필재의 현판이 있는 집도 또한 모두 화를 입었는데, 지지당 선생만이 유독 신후(身後)의 화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지지당집(止止堂集)》에서 나온 말이다.  

 

●정여창(鄭汝昌)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백욱(伯勖)이고 하동인(河東人)이며 호는 일두(一蠹)이다.

효행(孝行)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고 벼슬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이르렀다.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선생에게서 수업(受業)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일삼았다.

무오년에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작고했는데, 이윽고 부관(剖棺)되었다.

중종(中宗) 초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고, 그 후에 우의정(右議政)이 가증(加贈)되었으며, 선조(宣祖) 때에 문헌(文獻)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김굉필(金宏弼)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다가 천거를 받아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무오년에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순천(順天)으로 옮겨졌는데, 갑자년에 극형(極刑)을 당하였다.

중종 초기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뒤에 우의정이 가증되었으며, 선조 때에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조위(曺偉)   

    조위(曺偉)의 자는 태허(太虛)이고 창산인(昌山人)인데, 선생의 처남(妻男)으로서 선생을 사사하였다.

한훤당과는 동년생(同年生)으로서 정분이 가장 서로 친밀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들이 모두 원대(遠大)한 데에 이를 것으로 기대했었다.

이미 벼슬을 하기 시작하여서는 성종(成宗)의 알아줌을 크게 입어 칭찬과 총애가 특히 대단하였다.

 

그가 어버이를 위해 군수(郡守)가 되기를 요청했을 적에는 특별히 일급(一級)을 하사하여 사품(四品)으로 올려주었다. 그가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에 상(上)이 하서(下書)하여 포유(褒諭)하기를, “네가 문장(文章)으로 몸을 진취시켜 유악(帷幄)에 배시(陪侍)함으로 인하여 내가 너를 인재로 여겨온 지 오래였다.

 

그런데 어버이가 늙은 때문에 사직하고 시양(侍養)하기를 요구하여 가까운 군(郡)의 수령(守令)을 제수받아 어버이 봉양에 자뢰하게 되었으니, 이는 대체로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시종(侍從)이었던 관계로 감사(監司)에게 하유(下諭)하여 지금 네 어버이에게 희름(餼廩)을 약간 보내게 해서 향리(鄕里) 사람들로 하여금 너의 학문에 관한 힘으로 네 어버이에게까지 영화가 미치게 된 것을 알게 하도록 하는 바이니, 너는 그 뜻을 알라.” 하였다.

 

그러자 공(公)이 전(箋)을 올려 진사(陳謝)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세초(歲抄)에 관하여 응제(應製)하게 한 시(詩)가 상의 뜻에 맞아, 공의 부모에게 미두(米豆)를 하사하도록 명하였고, 함양 군수의 임기가 다 차서는 상(喪)을 당하자, 또 부제(賻祭)의 미두를 하사하였으니, 외관(外官)에 대한 부전(賻典)은 전에 없었던 것이다.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러 연산조(燕山朝) 때에 수찬 선생(修撰先生)의 시문(詩文) 때문에 죄를 얻어 의주(義州)에 유배되었고, 이어 순천(順天)에 이배(移配)되었다가, 홍치(弘治) 계해년에 질병으로 작고하니, 향년이 50세였다.  

 

공이 사귀었던 사람들은 모두 한때의 명류 거공(名流鉅公)들이었는데, 서로 조전(朝典)을 강론하고 문사(文史)를 절차탁마하면서 힘써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뒤에 비록 문사(文事)로 폐적(廢謫)되었으나, 그래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저술(著述)한 것이 자못 많다.

 

일찍이 매계총화(梅溪叢話) 10여 가지 일을 초(草)하다가 초고(草稿)를 완성하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한훤당과 함께 순천에 유배되었는데, 한훤당이 공의 병을 다스려주고 공의 상(喪)까지 주선해 주었으며, 반장(返葬)하기에 미쳐서는 제문(祭文)을 지어 조문하였다.   

 

● 남효온(南孝溫)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고 의령인(宜寧人)인데 추강거사(秋江居士)라 자호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면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고 도량이 넓고 의지가 견고하며, 소탈하고 고상하며, 가슴 속이 쇄락(灑落)하여 한 점의 진기(塵氣)도 없었다. 일찍이 선생에게서 수업했는데, 선생은 감히 공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경례(敬禮)를 받음이 이러하였다.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金時習) 등 제현(諸賢)과 함께 서로 추중(推重)하며 형제간처럼 지냈었다.

그러나 성종 때에 상소(上疏)하여 소릉(昭陵)을 복구시키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이 세상에 뜻을 단절하고 구속없이 지내는 삶을 일삼아, 무릇 명승지로 일컬어지는 곳은 그의 발자취가 거의 다 미쳤다.

 

정통(正統) 갑술년에 태어나서 성화(成化) 임자년에 졸하니, 향년이 39세였다. 연산(燕山) 갑자년에 소릉에 관한 상소 때문에 추죄(追罪)되어 천양(泉壤)의 화를 입었다. 유홍(兪弘)이 《추강집(秋江集)》 의 발문(跋文)을 썼다.   

 

● 김일손(金馹孫)   

    김일손(金馹孫)의 자는 계운(季雲)이고 호는 탁영(濯纓)인데, 집의(執義) 맹(孟)의 아들이요,

절효 선생(節孝先生) 극일(克一)의 손자이며, 김해인(金海人)으로 대대로 청도(淸道)에서 살았다.

 

일찍이 선생에게서 수업하여 문장(文章)을 잘하였고, 성품이 대범하고 고상하여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다.

벼슬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고, 무오년에 사화(史禍)를 당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극돈(李克墩)이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에 성종(成宗)의 초상이 났는데도 서울에 진향(進香)은 하지 않고 기녀(妓女)를 수레에 싣고 다녔으므로, 탁영이 그 사실을 사초(史草)에 기재하였더니, 극돈이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이 되어 실로 이 화를 일으킨 것이다.” 고 한다.

 

현종(顯宗) 때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자운서원(紫雲書院)의 편액(扁額)을 내렸다.   

 

● 권오복(權五福)   

    권오복(權五福)의 자는 향지(嚮之)이고 호는 수헌(睡軒)인데, 예천인(醴泉人)이다.

성종(成宗) 병오년에 과거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옥당(玉堂)에 전임되어 김탁영 등 제공(諸公)과 막역(莫逆)의 친교를 맺었다.

 

그러다 무오년의 사화가 일어남에 미쳐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탁영과 함께 극화(極禍)를 당하였다.   

 

● 유호인(兪好仁)   

    유호인(兪好仁)의 자는 극기(克己)이고 고령인(高靈人)인데, 정통(正統) 을축년에 태어났다.

임오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되고, 갑오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이르러, 나이 50세로 작고하였다.

 

어득강(魚得江)이 그의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는데, 그 서문의 대략에, “충효(忠孝)하고 청검(淸儉)하며, 침중(沈重)하고 간엄(簡嚴)하였으며, 시문(詩文)은 고고(高古)하고 필력(筆力)은 주경(遒勁)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

 

가세(家世)가 청빈(淸貧)하였으나, 또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다.” 하였다.

선생의 문학(文學)은 한 시대에 으뜸이었는데, 공(公)의 문학이 여기에 손색이 없었다.

 

아, 그런 덕망(德望)으로 성명(聖明)한 임금을 만났으니 평소에 온축해 놓은 것을 써볼 만했는데도, 누차 부격(府檄)에 굴해 있다가 섭양(攝養) 또한 이루지 못하여 50세에 그쳤으니, 슬프다.

 

공은 임종(臨終) 때에 아들 환(瑍)에게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모름지기 임금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너는 만일 조그만 벼슬이라도 얻으면 의당 내 말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뇌계(㵢溪 :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에 살면서 인하여 뇌계를 호로 삼았고, 유고(遺稿) 수권(數卷)이 있다.   

 

● 박한주(朴漢柱)   

    박한주(朴漢柱)의 자는 천지(天支)이고 밀양인(密陽人)이며, 자호는 우졸자(迂拙子)인데,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성종 을사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역임하면서 국사를 말하는 것이 직절(直截)하였고, 나가서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무오년 사화 때 벽동(碧潼)으로 장류(杖流)되었다가 갑자년 사화 때 피살되었다.

중종 초기에 명하여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이원(李黿)   

    이원(李黿)의 자는 낭옹(浪翁)이고 경주인(慶州人)으로, 익재「 益齋 : 이제현(李齊賢)」의 호임]의 후손이다. 성종 기유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다.

 

무오년 사화 때 원지(遠地)에 장류(杖流)되었다가 갑자년 사화에 죽었다.

그는 사람됨이 당당하여 사절(死節)이 있었으므로,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였는데, 연산군(燕山君)이 점필재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자고 청했다는 이유로 그를 능지처참하였다.

 

중종 초기에 명하여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남추강(南秋江)의《사우록(師友錄)》에 이르기를,“익재의 후손이요.

박팽년(朴彭年)의 외손(外孫)으로서, 두 집안의 현량(賢良)함이 이 한 사람에 모아졌다.”하였다.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 이주(李胄)   

    이주(李胄)의 자는 주지(胄之)이고 고성인(固城人)이다.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호임)의 후손으로 문장에 능하고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망헌(忘軒)이라 자호하였다.

 

성종 무신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제배되었다.

무오년 사화 때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피살되었다.   

 

● 이승언(李承彦)   

     이승언(李承彦)의 자는 사아(士雅)이고 성주인(星州人)이다.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도량이 넓고 용맹이 뛰어났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호산(湖山)에 마음껏 배회하다가,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벼슬이 한성 참군(漢城參軍)에 이르렀다. 아들 장길(長吉), 장곤(長坤)은 김한훤당에게서 배웠다.   

 

● 원개(元槩)   

     원개(元槩)의 자는 □□이고 원주인(原州人)인데, 고상한 행실로 천거를 받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 이철균(李鐵均)   

    이철균(李鐵均)의 자는 □□이고 성주인(星州人)이다.

경태(景泰) 경오년에 태어나서 을유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병진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 곽승화(郭承華)   

    곽승화(郭承華)의 자는 □□이고 현풍인(玄風人)이다.

정유년에 진사가 되었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청개(淸介)한 인품으로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사림(士林)의 화(禍)가 있을 줄을 알고 시골 구석에 묻혀 살면서 스스로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한훤당이 간혹 그에게 장난말로 이르기를, “이렇게 하여 화를 피하는 것이 어찌 도리에 합당하겠는가.” 하였다.   

 

● 강흔(姜訢)   

    강흔(姜訢)의 자는 시가(時可)이고 진주인(晉州人)으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맨 처음 여경(餘慶)을 따라 밀양(密陽)에 가서 선생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우고,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 종유하여 《시경(詩經)》을 배웠으며, 다음으로는 대유(大猷)에게 종유하여 《소학(小學)》을 전공하고, 다음으로는 시숙(時叔), 공서(公緖)와 종유하면서 유극기(兪克己)에게서 시(詩)를 읽었다.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뒤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사우록(師友錄)》에 나타나 있다.   

 

● 경유(權景裕)   

    권경유(權景裕)의 자는 군요(君饒)이고 또 다른 자는 자범(子汎)인데, 안동인(安東人)이다.

성종 때에 과거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누차 전임되어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 때에 시사(時事)가 점차 변해가는 것을 알고 외직을 요청하여 제천 현감(堤川縣監)이 되었는데, 무오년의 사화가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날에 죽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말하기를,“군요는 성품이 강직하여 작위(作爲)를 좋아하지 않았다.”하였다. 

 

● 이목(李穆)   

     이목(李穆)의 자는 중옹(仲雍)이고 전주인(全州人)인데, 성품이 강직하여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있을 당시, 윤필상(尹弼商)이 대신(大臣)으로서 국정을 담당했었는데, 이목이 가뭄을 인하여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필상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비를 내릴 것입니다.”하였다.

 

그 뒤 윤필상이 이목을 길에서 만나자 그를 불러서 말하기를,“군(君)이 꼭 이 늙은이의 고기를 먹고 싶은가?”하였는데, 이목은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연산군 초기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그 후 사화(史禍)가 일어났을 때, 윤필상이 당상(堂上)으로서 전일의 유감을 품고 이목이 일찍이 점필재에게서 수업(受業)했다는 이유로 죄를 얽어 죽였다.     

 

● 강경서(姜景敍)   

    강경서(姜景敍)의 자는 자문(子文)이고 진주인(晉州人)이며, 호는 초당(草堂)이다.

성종 정유년에 과거 급제하였고, 무오년에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회령(會寧)에 장류(杖流)되었다가 뒤에 방환되었다.

 

중종 때에 벼슬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초당집(草堂集)》 1건(件)이 있다.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 이수공(李守恭)   

    이수공(李守恭)의 자는 중평(仲平)이고, 광주인(廣州人)으로 둔촌(遁村)의 후손이며 영의정(領議政) 극배(克培)의 손자이다. 성종 무신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하면서 쟁신(諍臣)의 풍도가 있었다.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는 교리(校理), 수찬(修撰), 응교(應敎)를 거쳐 전한(典翰)에 승진되었다.

무오년에 창성(昌城)에 유배되었고 그 후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으며, 갑자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나이 41세였다. 중종 초기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 정희량(鄭希良)   

    정희량(鄭希良)의 자는 순부(淳夫)이고 호는 허암(虛菴)이다. 연산군 초기에 과거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윽고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

 

그는 점[卜]을 잘 쳐서 길흉(吉凶)을 알았으므로, 일찍이 말하기를,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 심할 것이다.” 하고, 어느날 갑자기 종적(蹤跡)을 끊고 도망가 버려서 그가 죽은 곳도 알 수 없다.

문집(文集)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 노조동(盧祖同)   

    노조동(盧祖同)의 자는 공서(公緖)인데, 《소학(小學)》을 읽기 좋아하였고, 엽등(躐等)의 학문, 풍월(風月)의 글귀, 과거(科擧)의 재주 등을 좋아하지 않아서, 몸가짐을 신중히 하여 법도를 지키는 것이 대략 대유(大猷)와 같았다.부친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일체 《가례(家禮)》에 따랐다.

 

시숙(時叔)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할 적에 한훤당(寒暄堂)이 그를 공경하였다.

김모재(金慕齋)가 노 처사(盧處士)를 방문하여 지은 시의 서문에 이르기를,“노공(盧公)은 고상한 행실이 있으며 현달하기를 구하지 않고, 젊어서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학하였다.”하였고, 그 시에는

 

인간의 고관 대작은 절로 길이 다른 법이라 / 人間軒冕自殊途

안자처럼 곤궁히 살며 도의 진미 맛보누나 / 顔巷窮居味道腴

눈 밑에는 크나큰 우주를 한데 넣었고 / 眼底牢籠閑宇宙

가슴 속엔 하나의 요순을 온축하였네 / 胸中蘊蓄一唐虞

학문은 염락관민의 바른 연원을 따랐고 / 學追濂洛淵源正

행실은 안자 증자의 실천과 같이 독실하도다 / 行篤顔曾踐履俱

산림 속에 찾아온 건 응당 뜻이 있노니 / 爲訪林丘應有意

높은 의범으로 남쪽 구석 표창하려 함이라오 / 欲將高範表南隅

하였다.

 

《척언(摭言)》에는 이르기를, “노 일사 필(盧逸士㻶)은 고성인(固城人)이다.”하였다.

상고하건대, 공(公)이 필(㻶)로 개명(改名)을 하였는데, 어느 때 무슨 연유로 개명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기묘보록(己卯補錄)》에는 이르기를, “유일(遺逸) 노모(盧某)의 별과 천목(別科薦目)에 의하면, 우애(友愛)가 향당(鄕黨)에 드러났고, 학식(學識)이 순정(醇正)하며 또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낙제(落第)하고, 천거로 누차 전임하여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다가 정랑(正郞)에 체배(遞拜)되었는데, 뒤에 강자(降資)되었다는 이유로 향리에 돌아갔다. 호는 묵재(墨齋)이다.”하였다.  

 

● 강희맹(姜希孟)   

    강희맹(姜希孟)은 진주인(晉州人)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 임희재(任熙載)   

    임희재(任熙載)의 자는 경여(敬輿)인데 풍천인(豐川人)이다.

무오년의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윽고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장류(杖流)되었다.

희재는 사홍(士弘)의 아들인데, 세설(世說)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희재는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이

요순을 조종으로 삼으면 절로 태평할 것인데 / 祖舜宗堯自太平

진시황은 무슨 일로 창생을 괴롭히는 고 / 秦皇何事苦蒼生

재앙이 소장 안에서 일어날 줄을 알지 못하고 / 不知禍起蕭墻內

오랑캐를 막고자 헛되이 만리장성만 쌓았네. / 虛築防胡萬里城

라는 시(詩) 한 절구(絶句)를 병풍에 써 놓았다.

 

그런데 연산군(燕山君)이 하루는 갑자기 사홍의 집에 행행하여 그 병풍을 보고 묻기를,“누가 쓴 것인가?”하자, 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연산군이 노여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경(卿)의 아들은 불초한 사람이니, 내가 그를 죽이고 싶은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하자,

사홍이 즉시 무릎을 꿇고 대답하기를,

“이 자식은 성행(性行)의 불순함이 과연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臣)이 진작 이 사실을 아뢰려고 하였으나 그리 못하였습니다. ”고 하여, 마침내 화를 입었다.

 

혹자는 말하기를,“희재가 항상 자기 아버지를 간(諫)하였기 때문에 그 아비가 이를 싫어하여 그를 참소했다.”고도 한다.

 

● 이계맹(李繼孟)   

    이계맹(李繼孟)의 자는 희순(希醇)인데 전의인(全義人)이다.

성종 기유년에 과거 급제하였고, 그의 시문(詩文)은 선생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무오년에 선생의 문도라는 이유로 장류(杖流)되었다.

중종 때에 다시 기용되어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그는 성품이 방달(放達)하여 몸을 검속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기묘 사류(己卯士類)들에게 흠을 잡혔으나, 사류들이 화를 당함에 미쳐서는 유독 그만이 사류들을 신구(申救)하여 마지않다가, 권간(權奸)의 뜻에 거슬리어 근심과 번민 끝에 죽었다.  

 

● 강겸(姜謙)   

    강겸(姜謙)은 진주인(晉州人)이다.

경자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갔다.

 

그 후 누차 승천되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장류되었다.

그의 아우 형(詗)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갑자년의 사화에 죽었다.  

 

● 홍한(洪翰)    

    홍한(洪翰)은 남양인(南陽人)인데, 을사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그는 성품이 곧고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아서 권귀(權貴)의 뜻에 거슬렸는데, 무오년의 화에 걸려 장류되던 도중에 죽었다. 중종 때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무풍부정 총(武豐副正摠)   

    무풍부정 총(武豐副正摠)의 자는 백원(百源)인데, 태종(太宗)의 증손이다.

시(詩)에 능하였고 거문고를 잘 탔다.

 

그는 양화도(楊花渡)에 별장을 짓고 살면서 조그마한 배에다 고기 잡는 그물을 갖추어 항상 어선(漁船)을 띄우고 노닐었는데, 시인 소객(詩人騷客)들을 맞이하여 날마다 좋은 시를 이루어 시가 무려 천 백편(千百篇)에 달하였다.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 자호하였다. 무오년에 먼 곳으로 장류(杖流)되었다.  

 

● 정승조(鄭承祖)   

    정승조(鄭承祖)는 연산군 갑인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선보(選補)되었다가, 무오년에 먼 곳으로 장류되었

    다.   

 

● 강백진(康伯珍)   

    강백진(康伯珍)의 자는 자온(子韞)이고 신천인(信川人)인데, 선생의 생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성종(成宗) 임진년 중춘(仲春)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정유년 봄에는 갑과(甲科) 제삼인(第三人)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흥해(興海)의 수령으로 나가 있을 적에 《이준록(彝尊錄)》을 간행하였다. 무오년에 장류되었다.  

 

● 강중진(康仲珍)

     강중진(康仲珍)의 자는 자도(子韜)이다.

경자년 봄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이르렀는데, 바로 백진(伯珍)의 아우이다.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무오년으로부터 22년 뒤에 중진이 선생의 문집(文集) 7권을 간행하였다.  

 

● 김흔(金訢)   

    김흔(金訢)의 자는 군절(君節)이고, 호는 안락(顔樂)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그는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한 일이 많았다.  

 

● 김용석(金用石)

    김용석(金用石)의 자는 연숙(鍊叔)이다.

그는 태학(太學)에 유학하면서 한 때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주 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망명(亡命)하여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다.  

 

● 홍유손(洪裕孫)   

     홍유손(洪裕孫)의 자는 여경(餘慶)이고, 호는 소총(篠叢)이며 또 하나의 호는 광진자(狂眞子)인데, 남양인(南陽人)이다. 그는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성품이 방달(放達)하여 몸을 검속(檢束)하지 않았고 또한 과거(科擧)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보로 영남(嶺南)까지 가서 선생을 배알하고 두시(杜詩)를 배웠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이 사람에게는 벌써 안자(顔子)가 도(道)를 즐기던 곳이 보인다.”고 하였으므로, 학자들이 모두 그를 높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문(文)은 칠원(漆園 장주(莊周)를 가리킴)과 같고, 시(詩)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의 호임)과 비슷하며, 재(才)는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의 자임)과 같고, 행(行)은 만천(曼倩 동방삭(東方朔)의 자임)과 같았다.  

 

● 이종준(李宗準)   

    이종준(李宗準)의 자는 중균(仲鈞)이고 호는 용재(慵) 안동(安東) 금계(金溪)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문장(文章)에 능하고 서화(書畫)를 잘하였다. 

 

성종 을사년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피살되었다. 

문집 용재유고(慵齋遺稿)고 있다.

 

● 안우(安遇)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孝行)이 있어 거상(居喪)할 적에 일체 《가례(家禮)》를 준행하였다. 노공서(盧公緖)와 함께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사환(仕宦)에 뜻이 없었고 절조(節操)는 동한(東漢) 시대 고사(高士)들에 견줄 만하였다.

 

호는 노계(蘆溪)이다.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었다가, 기묘년에 운봉(雲峯)에 유배되었다.  

 

● 최부(崔溥)   

    최부(崔溥)의 자는 연연(淵淵)이고 호는 금남(錦南)인데, 나주인(羅州人)이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영걸(英傑)하여 세사에 속박을 받지 않았다.

 

성묘조(成廟朝)에 재차 등제(登第)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는데, 무오년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끝내 피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표연말(表沿末)   

    표연말(表沿末)의 자는 소유(少游)이고 호는 남계(藍溪)인데, 신창인(新昌人)이다.

성종 임진년에 등제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다.

 

선생에게서 수업(受業)할 적에 서로 교유(交遊)하던 사람은 모두 한때의 명사(名士)들이었다.

일찍이 한림(翰林)이 되었을 때, 동료들과 연음(宴飮)하면서 우육(牛肉)을 베푼 것이 상(上)에게 알려져서 관례에 따라 파면되었다.

 

그 후로는 금육(禁肉)을 볼 때마다

그것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차마 다시 법을 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복상(服喪)하면서 예(禮)를 극진히 한 사실이 알려져 상(上)의 명으로 한 자급(資級)이 더해졌고, 뒤에 벼슬이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허반(許磐)   

    허반(許磐)의 자는 문병(文炳)인데 양천인(陽川人)이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음보(蔭補)로 사직 참봉이 되었다.

 

《추강집》에 이르기를,“허반은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어 벼슬하는 데에 생각이 없었고 일마다 옛사람의 인품을 흠모하고자 하였으므로, 대유(大猷)가 그의 단아(端雅)함에 감복했다.”고 하였다.

 

일찍이 좌상(左相) 홍응(洪應)에게 말하기를,“세자(世子)는 나라의 저군(儲君)으로서 만성(萬姓)이 우러러 의뢰하는 바인데, 지금 환시(宦寺)들과 함께 거처하니 옳지 않다. ……”고 하였다.

 

무오년에 등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는데, 마침내 사화(史禍)에 연좌되어 죽었다.  

 

● 유순정(柳順汀)   

    유순정(柳順汀)의 자는 지옹(智翁)인데 진양인(晉陽人)이다.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정세린(鄭世麟)   

    정세린(鄭世麟)의 자는 창부(昌符)이다.

그는 학문이 공서(公緖)와 같았고 시재(詩才)가 매우 높았으므로, 선생이 그를 공경히 대하였다.

병오년에 죽었는데 나이 22세였다.  

 

● 우선언(禹善言)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부(德夫)이고 호는 풍애(楓崖)인데,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 신영희(辛永禧)   

    신영희(辛永禧)의 자는 덕우(德優)이고, 영산인(靈山人)으로 재상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그는 기개가 있어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았고, 뜻이 크고 대절(大節)이 많았으며, 과명(科名)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후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성 참의(成參議)는 그의 시를 가리켜 소동파(蘇東坡), 황산곡(黃山谷)의 경지에 드나든다고 여기었다.  

 

● 손효조(孫孝祖)    

    손효조(孫孝祖)의 자는 무첨(無忝)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유학하면서, 김연숙(金鍊叔) 등 제인(諸人)과 함께 주 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  

 

● 김기손(金驥孫)    

    김기손(金驥孫)의 자는 백운(伯雲)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 강혼(姜渾)   

    강혼(姜渾)의 자는 사호(士浩)이고 호는 목계자(木溪子)인데, 문명(文名)이 탁영(濯纓)에 버금갔다.

중종 때에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 주윤창(周允昌)   

    주윤창(周允昌)의 자는 □□이고, 상주인(尙州人)인데,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학(遊學)하였다.  

1480(성종 11) 친시(親試)에 급제하였고, 군수(郡守)를 지냄.

 

● 방유녕(方有寧)   

    방유녕(方有寧)의 자는 태화(太和)인데,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 양준(楊浚)   

    양준(楊浚)의 자는 징원(澄源)인데, 마음이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으며, 곤궁함을 잘 견디고 도(道)를 즐기면서 담박하게 지냈다. 아우인 침(沈)과 함께 유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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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수찬 선생(修撰先生)

         여기서는 일찍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낸 김맹성(金孟性)을 가리킨다.

 

[주02] 소릉(昭陵)

         단종(端宗)의 생모(生母)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陵)으로, 본디 안산(安山)에 있었으나, 단종이 죽은 뒤 세조(世祖)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아들을 죽인 일을 책망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그 능을 발굴하여 다른 데로 이장(移葬)했었다.

 

그런데 그 후 영남(嶺南)의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세 차례나 추복(追復)의 논의가 일어났으니, 그 맨 처음 나온 것이 바로 남효온(南孝溫)의 상소(上疏)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연산(燕山) 때에는 김일손(金馹孫) 등이 다시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가, 중종(中宗) 때에 소세양(蘇世讓)의 건의에 의해 추복되어 현릉(顯陵: 문종릉〈文宗陵〉)으로 이장됨으로써 본래의 소릉이란 명칭은 없어지고 말았다.

 

[주03] 부격(府檄)

         관부(官府)에서 징소(徵召)하는 격문(檄文)을 이른다.

후한(後漢) 때 효행(孝行)이 뛰어났던 모의(毛義)가 노모(老母)를 봉양할 적에 관부로부터 그를 수령(守令)으로 징소하는 격문이 이르자, 그는 노모의 봉양을 위해 매우 기뻐하며 취임(就任)했다가, 자기 모친이 죽은 뒤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끝내 은거했던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하찮은 수령직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주-004] 자용(子容)

공자(孔子)의 제자인 남궁괄(南宮适)의 자인데, 그는 성품이 매우 신중하였고, 또 말을 삼가려는 뜻에서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의“흰 구슬의 티는 닦아낼 수 있거니와, 말의 과오는 어찌할 수 없도다.

 

[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라는 시를 하루에 세 차례씩 반복하여 읽으므로, 공자가 그를 신중한 사람으로 여기어 자기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었다. 여기서는 곧 남궁괄 처럼 신중 하라는 뜻에서 우선언(禹善言)의 자를 남궁괄의 자와 같이 지어준 것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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