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오운(吳澐 : 1540~1617)

야촌(1) 2009. 4. 12. 05:49

■ 오운(吳澐)

 

  [자] 태원(太源)

  [호] 죽유(竹牖). 죽계(竹溪)

  [생년] 1540년(중종 35)

  [졸년] 1617년(광해군 9)

  [시대] 조선 중기

  [본관] 고창(高敞)

  [부] 오수정(吳守貞)

  [조부] 오언의(吳彦毅)

  [증조부] 오석복(吳碩福)

  [외조부] 안관(安瓘)

  [처부] 허사렴(許士廉)

  [아들] 오여은(吳汝檼)

  [활동분야] 문신.

  [문과] 명종(明宗) 21년(1566) 병인(丙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7위(11/17)/27歲

  [생원시]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3등(三等) 62위(92/100)/22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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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본관은 고창(高敞) . 함안(咸安) 출생. 자(字)는 태원(太源), 호(號)는 죽유(竹牖)· 죽계(竹溪). 수정(守貞)의  아들이다. 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學諭)· 학정(學正 : 正八品) · 박사(博士 : 正七品) · 전적(典籍 : 正六品) · 직강(直講 : 正五品)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뒤 충주목사(忠州牧使 : 正三品)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 從三品)을 지낸 뒤 사재감정(司宰監正 : 正三品) 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 하였다. 그때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명에 이르렀다.(당시 죽유 오운선생의 나이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보다 12살 위임  특히 의령 부근의 전투와 현풍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尙州牧使 : 正三品)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陜川郡守 : 從四品) 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正三品)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 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正三品) 를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正三品)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慶州府尹 : 從二品)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工曹參議 : 正三品) 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郭再祐)와 동고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兵曹參判 : 從二品) 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 東史纂要》가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龍蛇列錄  ◇17세기 초의 歷史敍述(韓永愚, 韓國史學 6, 1985)

 

 

↑매림서원(梅林書院)/소재지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97[송림2길 54-7]

 

↑죽유종택(竹牖宗宅) 사랑채/소재지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101번지

 

↑죽유종택(竹牖宗宅) 안채

 

↑죽유종택(竹牖宗宅) 유물전시관

 

[죽유종택의 변천] 

1700년대 말에 지어진 죽유 종택은 본래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에 위치하였으나 1920년 대홍수로 인해 사랑채만 그대로 현재의 자리에 옮겨왔다. 그외의 안채와 나머지 건물은 새로 지었으며 오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1953년에 새로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당으로 사용되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고령지역의 본거지로 쓰였다.

해방 이후 6·25전쟁 당시에는 노동당 사무실로 쓰였다.  

 

[형태] 

죽유 종택은 입구의 솟을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ㅁ’자형 배치를 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있으며, 좌측에는 중사랑, 우측에는 유물관이 있다. 뒤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안채가 있다.

 

죽유 종택 우측에 있는 사당은 정면에 삼문과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현황] 

죽유 종택은 2001년 8월 20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죽유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류 7종 110건, 전적류 7종 12책 외에 오운이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말안장 등이 보물 제1203호로 지정되어 죽유 종택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물관에 보관 중인 자료로는 보물 제1203호 외에도 18세기 초에서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고문서 80건, 유물 및 현판 6건, 책판 166건, 서적 234건 428책이 보관되어 있다. 고문서는 준호구, 호구단자(戶口單子) 등의 호적류가 대부분이며 상서(上書), 첩정(牒呈), 시권(試券) 등있다. 책판은 『죽유선생문집』과 『한계선생문집』이 있다.

 

사진자료 : 디지털고령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