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世 이시영(李始榮)/ 경주이씨 상서공파
[생졸년] 1869. 12. 03 - 1953. 04. 17)
● 요약
본관 경주(慶州). 호(號)는 성재(省齋). 시림산인(始林山人). 초명(初名)은 성흡(聖翕). 1869년 12월 3일 서울에서 출생하고,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886년 가주서(假注書), 1887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副承旨)에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궁내부(宮內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하였으나, 1896년 장인인 김홍집(金弘集)이 살해되자 사직히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재등용되고, 1906년 평남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8년 한성(漢城)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 류허현[柳河縣]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 독립군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을 사임,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연보
생졸년 : 서울(1869.12. 3 ~1953. 4. 17)
본관 : 경주(慶州) 자 성흡(聖翕) 호 성재(省齋) · 시림산인 (始林山人). 김홍집의 사위.
활동분야 : 독립운동가, 교육가. 사상가. 정치가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1885년 1관직에 출사후 1형조좌랑. 홍문관 교리. 승정원 부승지. 궁내부 수석 참의 등 10년간 조선
의 관직에 역임하였다.
1868년 12월 3일 한성부 저동에서 출생
1885년 사마시(司馬試) 급제
1886년 가주서(假注書) 1887년 형조좌랑(刑曹佐郞)역임.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문과급제(고종28년 증광문과 병과(增廣文科丙科). 부승지(副承旨)에 이어 우승지(右承旨), 내의원(內
醫院) . 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宮內
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
1896년 장인인 김홍집(金弘集)이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재등용.
1906년 평안남도 관찰사가 되고, 1908년 한성(漢城)재판소장 ,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 . 고등법원 판사 등
을 역임.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집안 가솔들을 이끌고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여, 교육진흥 및 독
립군 양성을 위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항일 독립군의 핵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류하현[柳河縣]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 신흥 무관 학교, 신흥군관학교)를 설립, 민족 해방을 위
한 청년장교 육성 및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1919년(3. 1운동시) 이동녕. 조완구 등과 함께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 그해 4월 상하이 임시 정부를 수
립하고 법무와 재무 총장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
1945년 8 .15광복과 더불어 귀국,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으로 활약 1948년 정부가 수립되
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 되었다.
1951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국정혼란과 사회 부패상의 책임에 대한 대국민 성
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을 사임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병으로 운명.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
1964년 묘소를 현 수유리로 이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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