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우암 송시열 선생 묘(尤庵 宋時烈 先生 墓)

야촌(1) 2009. 1. 16. 16:43

■우암 송시열 선생 묘

   [생졸년]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조선(朝鮮)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字)는 영보(英甫), 호(號)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1633년(인조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 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때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란하였고,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청서파에 속한 그는 공서파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파직된 뒤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 되었으나 1651년(효종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 함으로서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하였다.


그 후 충주목사, 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1658년(효종9)엔 찬선에 등용, 되고,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기년설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들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헌종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서 실각, 제1차 복상문제때 기년설을 채택하게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뒤 여러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 함으로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대학자 우암 송시열이 산수를 사랑하며 벼슬에서 은퇴 후, 은거했던 화양동 계곡과 노론사림의 중심인 대학자 우암 송시열이 산수를 사랑하며 벼슬에서 은퇴 후 은거했던 화양동 계곡과 노론사림의 중심인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청천리는 592번 국도와 19번 도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청천 사거리에서 청천초등학교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00m 정도 올라가면 마을 뒤쪽에는 몇 백년을 묵은 은행나무가 재실 앞쪽에 서 있다.

 

나무 옆에는 신도비를 안치한 비각이 있고, 묘는 그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야 닿는다. 신도비는 정조의 친필을 새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기와집 안에 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문묘에 배향되었다. 문묘(文廟), 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는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심경석의(心經釋義), 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1(충청북도 기념물 제 10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생의 묘역에는 호석없이 봉분으로 되어있고,석물(石物)로는 상석(床石) 옆에 두 개의 묘비(墓碑)가 서 있고, 앞쪽으로 망주석과 문인석상이 양쪽에서 시립해 있다.

 

尤庵(우암) 선생의 묘는 처음에는 수원의 무봉산에 있었으나 1757년(영조 33)에 이 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묘비에는 『 有明朝鮮左議政文正公尤庵宋先生墓.貞敬夫人李氏祔左 』 
   (유명조선좌의정문정공우암송선생묘.정경부인이씨부좌)

   비의 크기는 높이가 256cm, x 폭 62.5cm의 묘비(墓碑)다.

 

이곳 우암선생 묘(尤庵先生墓)는 풍수(風水)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라 하는데,장군 대좌 형에 얽힌 설화로 장군에겐 병졸이 병졸이 없으면 장군으로서 의위력이 없고 따라서 발복도 없다. .

 

그래서 묘의 발복을 위해 앞쪽에 병졸에 해당하는 사람의 무리가 있어야 했다.송종수는 청천의 동민과 의논하여 시장을 개설하게 되었다고 전한다.한 달에 여섯번씩 시장을 보기 위해 사람이 모이니 마치 시장 사람들이 병졸의 무리처럼 보였고, 또 시장으로 거리가 번창하고 사람들이 묘 앞쪽을 떠나지 않아, 묘지의 지세에 잘 순응하여 자손이 영구히 번창 한다는 것이다.

 

 

↑묘지의 뒷면에서 촬영한 것임(앞산을 바라보고)

 

당대의 최고(最高) 학자(學者)인 우암(尤庵)선생은 역사상(歷史上) 가장 극심했던 당쟁(黨爭)의시대에 자신(自身)이 그 중심 인물(人物)이셨다. 정치(政治)와 문맥(文脈)를 30년이 넘도록 한손에 쥐고 흔든 인물로서, 83세(歲)로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명으로 賜死(사사)되었으니『인생무상(人生無想)』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도비 옆으로 난 길을 조금 오르면 곧장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이 돌계단을 좌측으로 돌아 돌아 오르면 우암선생의 묘가 있다.

 

●복술가가 예언한 송시열(宋時烈)의 운명.


우암 선생이 젊었을 때다. 어떤 점쟁이가 점을 쳤다.
사주를 보고 손과 얼굴까지 살핀 점쟁이가 이윽고 점괘를 풀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에 초산야월 절죽행장(楚山夜月 節竹行裝) 이란 괘가 나왔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왕세자(경종)의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유배되고,그 후 국문(鞫問)을 받으러 상경하다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아 죽었다. 그러니 점괘가 맞은 셈일까?

 

정읍의 옛 지명은 초산(楚山)이고 그곳에서 야밤에 사약을 마셨으니『초산야월』이고, 그때는 죄인의 몸이라 시신을 대나무로 말아 장사를 치르었으니,대나무에 말아 장사를 치른다 는『절죽행장』의 점괘도 신통하게 맞은 셈이라 한다.

 

우암 송시열은 17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정치가로,성리학을 후기 조선 왕조의 주도 이념으로 확립한 그는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을 주도했고, 국상때 입을의복 논쟁을 통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천한 인물이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우암 자신이 은거하던 충북 괴산군 화양동 계곡의 아름다운 절경이 중국의 무이구곡(九谷)을 닮았다 하여 계곡(溪谷)을 거닐며 하나 하나 붙인 붙였던 데서 생긴 이름들로, 이형부의 화양구곡도점(華陽九曲圖帖)에 담박한 화풍으로 잘 표현한 대에 있다.

 

●화양구곡도점(華陽九曲圖帖)이란?


암벽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여『경천벽』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운영담』
우암이 효종대왕의 승하를 슬퍼하며 매일 새벽에 통곡하였다는『읍궁암』

가장 승경을 자랑하는 곳으로『금사담』

낙영산 꼭대기에 있는 기괴한 암벽이『첨성대』

2층으로 된 큰바위가『능운대』

첨성대에서 동남쪽으로 1km 쯤 가면 나타나는『와룡암 』
옛날에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고 전하는『학소대』
계곡 중앙에 펼쳐진 흰 바위로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파천』

 

●효종이 우암에게 내린 초구.

 

초구는『담비』라는 족제비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이며,효종이 입던 겉저고리를 우암 송시열에게 하사한 것이라 한다.

 

왕이 하사한 옷으로서의 가치보다는 임금과 신하 사이의 굳은 의리를 느끼게 하는 상징적인 자료로서의 가치가 주목된다.옷의 안쪽면에 우암의 친필로 적어 놓은 기록이 있다한다.

 

아마 풍류객이라면 이 넓은 반석 위를 거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화양계곡의 화양구곡(華陽九曲) 화양동의 선경(仙境)에 빠져 신선이 되고자 했던 우암 송시열 선생! 참으로 굴곡이 많으셨던 삶을 사셨던  분으로  지금은 화양구곡에서 선경속을 노니는 신선이 되셨을까?

 

 

↑신도비각(神道碑閣)

 

↑신도비(神道碑)

 

↑측면에서 바라본 재실(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