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이정영의 묘(李正英의 墓)

야촌(1) 2009. 2. 1. 18:31

 

 

 

◇문화재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4호

◇지정년월일 : 1994년 5월 10일

◇시 대 : 조선시대, 17세기 말

◇규모양식 : 16,040㎡

◇소유자 : 전주이씨 함풍군파종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4동 산 44-7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서곡(西谷) 이정영(1616∼1686)의 묘이다. 이정영(李正英)의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 시호(諡號)는 효간(孝簡)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정종(定宗)의 아들 열다섯 가운데 열째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증손(曾孫) 함풍군(咸豐君) 이계수(李繼壽)가 이정영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증(贈) 찬성(贊成) 이수광(李秀光)이고, 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유간(李惟侃)이며, 아버지는 호조판서 이경직(李景稷)이고, 어머니는 보성오씨(寶城吳氏)로 첨지 경지(景智)의 딸이다.

 

이정영은 광해군(光海君) 8년 병진년(丙辰年, 1616년) 6월 16일에 태어났다. 태어난 지 석달 만에 어머니 보성오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 무렵 부친 이경직은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평안도 지방에 가 있었고, 이듬해 회답사 오윤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가는 등 계속 집을 떠나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청평군(靑平君) 심논(沈惀)이 이를 가엾게 여겨 첩(妾) 변씨(邊氏)로 하여금 이정영을 데려다 기르게 하였는데, 심논의 부인 파평윤씨가 친히 돌보며 교육하였다. 심논(1562~1633)은 자(字)가 상중(尙重).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아들이고 조선 13대 왕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1575)의 조카이다.

 

청평군은 외직(外職)으로 많이 나가 있었으므로, 이정영을 데리고 다니다가 열두 살이 되어 비로소 서울로 돌아왔다. 효민공 이경직이 가서 만나보았으나 이정영은 오히려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청평군이 일러준 뒤에야 사실을 알고는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며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니, 앉아 있던 손님들도 모두 눈물을 훔쳤다.

 

이정영은 인조 14년(1636) 별시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 (昭顯世子)가 볼모로 중국 심양(瀋陽)에 갈 때 따라갔다. 귀국해서는 정언․수찬․응교․검열․ 대교․봉교․전적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642년 예조좌랑을 거쳐, 효종 2년(1651) 교리로서 술에 취하여 경연에 나갔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 그 후 겸사서 이조정랑을 지냈다. 1659년 병조참의․좌승지를 역임하고, 현종 1년(1660) 부총관․병조참판․대사간이 되었고, 이듬해 진위겸진향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672년 한성부판윤으로 다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현종이 죽자 산릉도감 당상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고, 숙종 3년(1677) 형조판서로 시관(試官)이 되어 부정을 저지른 죄목으로 철원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어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1685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전서(篆書)와 주서(籒書)에 뛰어나, 오촌공 이대건 신도비명(梧村公李大建 神道碑名)의 전서(篆書)를 비롯하여,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 이순신명량대첩비(李舜臣鳴梁大捷碑), 영안위홍주원비(永安尉洪柱元碑), 호판이경직비(戶判李景稷碑), 판추김시양비(判樞金時讓碑), 감사 강홍중비(監司 姜弘重碑), 형참 이소한 비(刑參 李昭漢 碑), 예참홍주국비(禮參洪柱國碑), 정여창비(鄭汝昌碑)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묘는 17세기 말의 조선 분묘형식을 잘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덤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그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이들 석물은 조각솜씨가 뛰어나 17세기 조선 석조미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