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조말생 묘역(趙末生墓域)

야촌(1) 2008. 11. 19. 12:54

■조말생(趙末生),

   [생졸년] 1370년(공민왕 19)~1447년(세종 29)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근초(謹初). 평중(平仲), 호는 사곡(社谷). 화산(華山)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인 성리학자 조용(趙庸)의 문인(門人)이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등용되고, 감찰. 정언. 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둘째로 급제하여,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이 되었으며, 이듬해 장령(掌令)을 거쳐 주로 예문관 승정원에서 근무하였고, 그는 대학자로 특히 글씨에 뛰어났다.

1418년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같은해 형조판서 승진하였다. 세종 즉위 후,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7년(세종 9) 병조판서 때 그의 명의로 왜국(倭國)에 보낸 국서(國書)에, 대마도(對馬島)는 경상도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된 우리 영토라고 명기(明記)되어 있다.

 

그 후 함길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여진족 방어에 힘썼고, 1435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1437년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축성(築城) 사업을 감독하였다.

143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으며,  1442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고, 1446년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요, 묘는 남양주시 수석동(水石洞)에 있다.

 

 

↑남양주 수석리토성을 내려오면 세종때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 신도비를 볼수 있다.

    자동차로 현지에 오려면 토성을 한바퀴 돌아 반대편으로 들어와야 한다./ ⓒ야초 풍수 지리학회

 

  ↑조말생 신도비는 귀부가 유난히 크고 고개가 왼쪽으로 꺾어져있다. 귀부와 비신이 불균형을 이루고있다.

      ⓒ야초 풍수 지리학회

 

사진 ⓒ남양주 럽

 

↑조말생 신도비의 후경이다. /사진 ⓒ야초 풍수 지리학회

 

조말생의 묘가 있는 이곳은 원래 안동김씨의 석실서원이 있던 곳이었는데, 고종 때 홍릉이 금곡에 들어서면서 이

    곳이 안동김씨 터에서 양주 조씨들에게 넘어갔다.  /  ⓒ야초 풍수 지리학회

 

↑조말생 선생의 묘역입구다. 왼쪽 신도비는 선생의 손자 신도비로 보여진다. / ⓒ남양주 럽

 

↑조말생 선생 묘역을 오르는 계단/ ⓒ남양주 럽

 

조말생선생 묘 / ⓒ남양주 럽

 

조말생은 죽어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에 안장되었으나 그곳에 고종황제의 능이 들어서면서 수석동 산2~1번지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말생의 묘비는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있으나 정식 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란다.

 

↑조말생 묘비명.../ ⓒ야초 풍수 지리학회

 

↑조말생 묘표 /  ⓒ구름떠가고 바람부는 정원

 

   글씨가 잘 보이지 안치만 겨우 읽으면 좌측부터 보국숭록대부 영중추원사 겸 병조판서 보문각 대제학 시 문강 조공 말생

   지묘 정경부인 평산신씨 부우(祔右) 입니다. 일반적으로 남편과 아내를 합장(合葬)할때 부좌(祔左)라 해서 아내를 남편

    의 왼편에 묻는데 ....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묘소에는 장명등이 조선초기 양식을 고려하여 최근에 세워졌다./ ⓒ 야초 풍수지리학회

 

ⓒ남양주 럽

 

↑한강물이 묘앞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 ⓒ야초 풍수 지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