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천공(梧川公) 이종성(李宗城) 암행어사의 일화
[성 명] 이종성(李宗城)
[생몰년] 1692(숙종 18)∼1759(영조 35)
[본 관] 경주(慶州) 이(李)
[자·호] 자고(子固), 오천(梧川)
[시 호] 효강(孝剛), 문충(文忠)
[저서] 작품 : 《오천집(梧川集)》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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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숙종 18)∼1759(영조 3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으로 좌의정 이태좌(李台座)의 아들이다. 경기도 장단(長湍) 출신으로 서울 저동(苧洞)에 거주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숙종 37년(1711) 사마시에 합격하고, 영조 3년(172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3일만에 예문관 설서가 되고, 이어 전적, 정언을 지내고, 1728년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단을 논의하였으며,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고 이후 헌납 ·수찬 · 교리 · 부제학을 거쳐 1729년 불법 수령 적발을 위하여 다시 영남 어사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 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가 되었다.
1731년 관서 어사로 파견되어 양덕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 군수 홍태평(洪泰平), 맹산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이희하(李喜夏), 황주 목사 이성제(李誠?)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승지. 대사간. 이조 참의. 대사성, 1734년 홍문관 부제학, 1735년 이조 참의로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논하였다. 1736년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곧바로 기용되어 경기도 관찰사 · 동지의금부사, 1738년 이조 참판, 1741년 부사직, 1742년 충청도 관찰사, 1744년 이조 판서 · 예조 판서 · 형조 판서 · 대사헌 · 개성부 유수, 1749년 지돈녕 · 우빈객,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로 사망할 때까지 장헌세자에 대한 각별한 보살핌을 하였다.
그의 일화로 현직에서 물러난 뒤 도성을 떠나지 않고 낚시를 하면서 지내던 중 시골 젊은이를 통화문(通化門)수문장으로 추천하였다. 이때가 영조 35년(1759)으로 임금은 66세였지만 14세의 정순왕후(貞純王后)를 맞아 왕자대군을 두고자 하였으나, 왕후는 무자식이 상팔자라 하며 포태할 약을 다려주면 쏟아 버리곤 하였다.
이러한 낌새를 안 문숙원(文淑媛)은 임금의 총애를 기회로 상상임신을 하였는데 내친 김에 거짓말을 하고 민가에서 아이를 데려다가 아이를 출산한 것으로 꾸미는 음모를 진행하였다.
하루는 그가 통화문 수문장을 불러 “오늘밤 파루에 궁녀(宮女)가 후궁에 들어가는 음식인냥 함지를 이고 들어오면 무조건 단칼에 두 동강을 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엄명하였다. 과연 이날 밤 궁녀가 함지를 이고 들어오자 수문장은 무조건 도량단(刀兩斷)해 버렸다. 칼에 피가 묻어나오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 풀어보니 아이가 동강나 있었으므로 온 궁중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이다.
그는 성리학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며, 동궁(東宮) 보호에 진실하였다. 유척기(兪拓基)는 항상 그를 칭하여 신(神)과 같다 하였다. 장조(莊祖 : 장헌세자 : 사도세자)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효강(孝剛 : 후에 문충(文忠)으로 고침)이며 저서로는 《오천집(梧川集)》이 있다.
◇참고문헌 : 英祖實錄, 金石錄, 恩坡集, 朝鮮名人典, 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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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척기(兪拓基)는 숙종 17년(1691)에 태어나 숙종 40년 증광문과 병과급제 검렬, 정언을 거쳐 이조참의, 도승지, 양주목사, 함경,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이어 1739년 우의정, 1758년 영의정이 되었고 1760년 영중추부사,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가 있던 당대 명필이며 유명한 재상으로 영조 43년에 죽으니 문익(文翼)의 시호를 받은 사람이다.
정언으로 있을 때 경종 1년(1721) 세제(世弟)영조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숙종 37년(1711) 사마사를 거쳐 장단 오목이(장단군 군내면 읍내리)에 거주하면서 공부만을 하고 있던 이종성(李宗城)의 집 근처에 이르러 고개를 넘으려 하였으나 7일 동안을 가도 그 자리를 맴돌게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연유를 몰라 곰곰히 생각 끝에 동리사람에게 이 지방에 명인을 물으니 백사 이항복의 5대손이신 이종성(후오천대신) 이란 분이 사는게 이분은 지략과 도량이 넓으며 장래의 성쇠와 길흉을 점치는 신출귀몰한 유명한 재주를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찾아가서 사죄를 하고 자초지정을 간청하니 “그대 공이 청나라에 가게 되면 천자께서 쌀 1,000석을 보내라고 할 것이니 우리나라에서는 수년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하라.” 는 부탁을 하려고 그리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하직을 하고 떠나가는데 웬일인지 순식간에 청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도착하여 영조(英祖)책봉에 주청드리는 자리에서 천자께서는 이종성이 말한대로 과연 1,000석을 보내줄 것을 하명하자 우리나라의 곤궁한 실정에 대하여 자초지종을 상세히 상주하니 고개만을 끄덕이니 할 수 없어하며 요행이 사면하게 되어 무사히 돌아오는 길에 이종성을 예방 치하를 드린 후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한다.
이후 이 고개를 가칠일 고개(加七日嶺)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맑고 맑은 오목내(梧川)가 흐르고 있어 이종성은 오천대신으로 불려졌다. 오천대신 이종성에 얽힌 일화는 많다.
이종성이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가 되어 낙향 낚시와 시희로 소일을 하던 중 집안이 가난해 말을 타지 못하고 단신이 걸어서 황해도 봉산고을 사또로 부임차 이 지역을 지나던 김 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오목내를 건너서 건너가려할 때 건너쪽 언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이 있어
“여보 영감” “미안하지만 나를 업어 강을 건너 줄 수 있겠는가?”
하고 간청하니 서슴치 않고
“예”
하며 발을 걷어부치고 장등이에 업고 개울을 건너가는데 반쯤 가다가 김사또가 하는 말이
“이 근처 오천대신이 살고 계시다는데 알고 있느냐”며“무엇으로 소일을 하고 계시느냐”
고 물으니
“예”
대답하기를
“그 분은 낚시를 하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원천이나 하고 지낸다.”
하 니 깜짝 놀라며 기절초풍 개울 한가운데로 자빠졌다 한다.
이리하여 오천대신은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입히게 하고 깡 보리밥을 같이 하면서 황해도 봉산은 인심이 좋은 고장이니 아무쪼록 선정을 베풀어야 된다는 간곡한 부탁을 하니 대감의 말씀에 한치라도 소홀함이 없이 하겠다면서 공손히 하직 3년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3년이 지나고 돌아오는 길에 오천대신을 예방 후사를 하고 선도에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하며 후일 김 사또의 선정비가 건립되었다 한다. 또한 그 유명한 장단 오천대신을 모르는 선비는 없었으며 이 길목은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국도로 이곳을 지나가는 관리는 오천대신을 찾아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어느날 호의호식하다가 자라난 ○○정승의 아들이 호화찬란하게 말을 타고 하인을 데리고 음직으로 평산 고을에 사또로 부임하던 중 장단 땅에 오천대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울을 건너 그냥 지나가는지라 오천대신은 괘씸하게 생각하고 개울을 건너간 사또를 하인을 시켜 집으로 데려 오라하여 점심이나 같이 하자며 깡 보리밥에 고추장과 김치, 깍두기와 시래기 국으로 맞상을 하고 먹게 되었다.
그러나 호의호식을 하던 사또가 꽁보리밥을 처음 보는지라 먹을 수가 없어 우두커니 바라다만 보고 있으니 안 먹겠냐면서 오천대신은 고추장에다 썩썩 김치와 깍두기를 넣고 비비더니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사또의 밥까지 먹고 나서 물을 마신 뒤
"방자 오만불손한 자네가 어떻게 고을을 다스리겠다는 말이냐"
며 호통을 쳐서 되돌려 보내니 사또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가 아버지 정승을 뵙고 오천대감께서 하신 말씀과 자초지정을 고하였다.
그말을 들은 아버지 역시 괘씸히 여긴 나머지
"오천대신은 능히 그랬을 것"
이라며 크게 꾸짖으면서 앞으로 자숙하고 검소한 생활과 겸손한 태도를 몸소 익히도록 타일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오천대신 이종성(李宗城)은 숙종 18년(1692)에 장단 오목이 (장단군 군내면 읍내리)에서 태어나 자는 자고(子固)이며 호는 오천(梧川)으로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로서 숙종 37년(1711) 사마시를 거쳐 영조 3년 중랑문과 병과급제 전적, 정언을 지내고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한 후 교리 부제학, 평안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1744년 형조, 예조, 이조판서 대사성 개성유수 등을 걸쳐 1752년 좌의정, 영의정, 영중추부사로 영조25년(1759)에 죽으니 문충, 효강등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밝은 문장과 글씨로 뛰어난 명재상이며 장단대신 또는 오천대신으로 널리 이름이 높았다.
장단(長湍)대신은 선견이 총명하여 어떤 사물을 대하든지 그 장래의 성쇠와 길흉을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서 유명한 점쟁이로서도 이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대신이인(大臣異人)이라는 별명을 지어 칭하였다. 이인대신의 별명을 들을 정도로 장단대신에게는 신출귀몰한 일화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신이 벼슬을 하직하고 장단에 낙향하였던 때였다. 대신은 대재상의 지위를 차지하였던 큰 위인이었으나 장단에 낙향한 후에 그의 생활은 농촌의 한 늙은 농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선 그 거처 범절로부터 의복, 음식, 행동이 한 때 나라의 정권을 잡고 국내를 호령하던 때의 재상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지극히 검소하였다. 그런데 공이 귀히 기르고 알뜰히 가르친 손자가 있었으니 바로 성혼이었다. 새로 슬하에 거느리게 된 그 신부도 역시 명문 대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자라서 규중 예의범절을 모두 익힌 요조숙녀였다.
그 손부(孫婦)는 가례를 행한 후 일찍이 친정에서 배운 놀라운 예절과 행실로써 삼일을 치르게 되었다.
때는 손부가 삼일을 치르고 몇 달을 지낸 어느 날 아침이었다. 손부는 첫닭이 우는 소리를 따라서 일찍 유두분면과 녹의홍상으로 의복과 단장을 갖춘 뒤에 이공에게 아침 문안 시간을 기다려 문안을 드리게 되었다.
이공은 손부의 아침 문안을 받은 뒤에 매우 화려한 안색으로 손부를 쳐다보면서
"네가 우례를 해온지도 벌써 오래 되었으니 이제는 집안일에 대하여 서투른 것은 없겠지"
하고 말을 물었다.
손부는 양미를 숙이며 공손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지당하오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과연 손부는 워낙 영리한 까닭에 시집 온지 며칠을 지나 시가의 가풍과 가규를 얼른 잘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공은 손부의 지당하다는 대답을 들은 뒤에 또다시 쳐다보면서
"내가 내일 아침에는 네 손으로 일운 쌀에 밥물을 붓고 네 손으로 불을 때어서 지은 밥을 먹고자 한다"
하였다. 손부는 이공의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공이 밥을 지으라는 말은 청천벽력보다 더 무서운 말인 까닭이었다.
원래 손부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밥을 대하면 먹을 뿐이요, 쌀을 어떻게 씻으며 그 씻은 쌀을 솥에다가 어떻게 부으며 쌀을 솥 속에 먼저 붓고 나중에 물을 붓는지 먼저 물을 붓고 나중에 쌀을 붓는지 또는 물을 부으면 얼마나 부으며 불은 어떻게 때며 얼마만큼 때야 밥이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맹문이었다.
그러므로 밥을 지으라는 시조부의 말씀에 깜짝 놀라며 잠깐 주저하는 태도로 서 있다가 매우 황감하다는 어조로 "불민하와 밥 짓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사오니 어찌 진지를 감히 지을지 황감하여이다"하였다.
이공은 잠깐 양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펴며 "아직 못하는 일이면 할 수 없다"하였다.
손부는 매우 부끄러운 기색으로 물러나왔다. 이공은 그 이튿날 아침 돌연히 가마를 마련한 뒤에 아무런 말이 없이 손부를 친정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손부는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조부의 명령이라 감히 거역할 길이 없어 친정으로 갔다.
그 친정에서도 별안간 온 것을 이상히 생각하여 곡절을 물었다. 그는 아무런 허물이 없었고 다만 이공이 밥을 지으라는 말에 밥을 지을 줄 모른다 하였더니 별안간 친정으로 가서 있으라고 말하였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녀의 부친이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부끄러워 하는 기색을 띄우며
"네가 쫓겨 왔다. 그렇게 쫓겨오게 된 죄는 밥을 지을 줄 모르는 죄이다. 너의 시조부께서 이런 조치를 내리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밥을 짓는 것을 배워라"
하였다. 그녀는 부친의 말을 듣고 일찍 밥을 지어보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부엌으로 나가 쌀을 씻고 밥물을 부으며 불을 때고 밥을 넘기며 자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석으로 뿐 아니라 천생으로 영리하고 총명한 그 재주로서 밥쌀을 내는 것과 밥물을 붓는 분량이며 또 불을 때는 정도를 새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로 그녀가 지은 밥은 유난히 윤기가 돌고 밥맛이 좋았다.
그렁그렁 수삭을 지나 그는 다시 시가로 돌아간 뒤 누가 말한바 없이 스스로 부엌에 내려가 밥을 지었다.
이공은 그 밥을 처음 한 술을 뜬 뒤에 찬미를 느껴서
"이 밥을 누가 지었느냐"
하니 매우 황송하다는 기색으로
"새 아가씨께서 지었습니다"
하였다. 이공은 매우 기뻐하는 기색을 띄었다. 그리고 그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이공이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공은 손부를 불러서 이야기를 하였다.
"네가 지은 밥을 참으로 잘 먹었다. 밥 한 그릇을 다 먹기는 지금까지 처음이다. 내가 너를 밥을 지을 줄 모른다고 친정으로 보낸 뜻은 네가 밥을 안지었거나 밥을 지을 사람이 없어서 그랬겠냐?
그러나 가정을 다스리는 주부로서 무엇이든지 다 알아 둘 필요가 있는거다.
하인을 부릴지라도 내가 알고 부리는 것이 주부의 도리란다. 그러므로 밥 짓는 법을 알게 하려 한 것이다.
하필 밥뿐이겠느냐, 무엇이든지 모두 경험이 있어야 하는거야.
이후로 부터는 각별 명심하여 주의 하 거라."일렀다. 손부는 이공의 말에 감동되어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손부는 그날 밤부터 밥을 짓는 것 이외에 빨래, 다듬이 그릇닦이 등 여지껏 손에 대 본 일이 없는 것까지 모두 친히 하였다. 그런데 이공은 손부가 다시 돌아온 뒤 어느 날 그의 손자를 처가로 보냈다.
때는 마침 농사를 시작하는 초엽이었다. 장인은 사위를 만나게 되자
"옳다! 내 딸을 밥지을 줄 모른다고 쫓아 보냈으니 그대의 손자는 어떻게 가르쳤는가 보자"
하고 일종의 앙갚음을 할 생각으로 사위를 향하여
"금년 농사를 방금 시작하는 땐데 사위되는 사람이 맨 첫번 논을 갈아주면 농사가 대풍이 된다고 하니 수고스럽지만 우리 논에 쟁기질 좀 하여다오"
하였다.
일국의 대재상의 손자가 쟁기질을 해 보았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청하는 것은 사위보다 이공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위는 장인의 말을 듣고 조금도 주저하는 빛이 없이
"갈아 드리지요."
하고 승낙한 뒤 즉시 버선을 벗고 다리를 걷어올린 후 쟁기를 걸머지고 소를 몰아 논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에 쟁기를 걸어 메고 논을 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논 가는 법이 어찌나 틀에 잡혔는지 상농부(上農夫)에 지지 않았다.
장인은 사위가 그렇게 쟁기질을 익숙하고 능숙하게 하는 것을 보고
「오! 무서운 양반이다」
하는 말로써 이상공이 자녀들의 교육에 대하여 그렇게 빠짐없이 가르친 것을 크게 탄복할 따름이었다.
농사가 한참 바빠 논매기 김매기에 땀을 뻘뻘 흘릴 시절이었다.
머슴 하인이 들어와 이공에게 아뢰기를
“내일부터 논을 매겠삽는데 품앗이로 먼저 대감댁의 논을 매게 되었습니다. 황송하오나 댁의 일이오니 만큼 밥과 반찬을 썩 잘해 주셨으면 소인의 생색이 더 나옵고 일도 더 잘 되겠습니다.”
청하였다. 이공은 쾌히 승낙하였다.
그리고 즉시 돼지와 닭을 잡고 또 임진강 어부에게 기별을 하여 좋은 물고기를 구해와서 굽고 끓이고 졸이어 과연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진수성찬을 차리고 특히 밥은 백미 중에서도 상백미를 골라 짓게 하였다.
그래서 반찬이 풍성풍성 하고도 산해진미로 된 것이 큰 잔치와 같았다.
여러 농부들은 생전 처음 얻어먹는 음식이었다. 기뻐하며 칭찬하는 소리가 동리에 자자하였다. 그 이튿날 이공집의 머슴 하인은 그 동리에서 부자라 일컫는 농부의 집일을 하게 되었다.
그 머슴이 석양이 산등성이로 넘어갈 무렵 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공이 머슴을 불러 세우고 “너 오늘 무슨 밥을 먹었느냐?” 하고 물으니 “별 반찬이 없삽고 된장찌개 마늘잎 장아찌와 풋김치 몇가지였습니다.” “고기는 없었느냐?” “고기가 다 무엇이오니까?” 이공은 머슴에게 밥과 반찬이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물은 뒤에 품앗이가 끝나는 날까지 여러 집에서 대접한 밥과 반찬을 꼭꼭 말하라 일렀다.
그리하여 머슴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때는 먼저 이공에게 그날그날 먹은 음식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어느 날 온 동리의 논밭에 김매기 밭갈이가 다 되어 품앗이 일이 끝난 날이었다. 이공은 품앗이한 여러 농부를 불러 세우고
“품앗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일을 돌려 가면서 똑같이 하는 것을 품앗이라고 합니다.”
“옳다. 그런데 내 집 머슴을 데려다가 일을 시킬 때에 밥은 무슨 밥을 먹이었느냐?”
“밥은 콩과 보리가 섞인 것을 먹이었삽고 반찬은 김치와 된장 몇가지를 먹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내집 일을 하던 날은 무슨 밥을 먹었고 반찬은 무엇을 먹었느냐?”
“대감 덕택으로 옥같은 쌀밥과 고기며 생선 등 여러 가지 맛있는 반찬을 먹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내 집에서 먹은 것이 다르지 아니하냐.”
“다릅니다.”
“그러면 품앗이가 아니지 않느냐, 품앗이란 일하는 것만 똑같이 하는 것 뿐 아니라 먹는 것도 또한 같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내 집에서 너희들 대접한 것과 네 집에서 내 머슴을 대접한 것이 틀리니 그것은 품앗이가 아니다.
그런데 내 다시 생각하니
첫째 내집 내 머슴에게 잡곡밥을 준 것은 너희들이 잡곡밥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집 하인을 분명 멸시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고 연이어 내가 너희를 엄히 조치할 것이로되 특히 이번만은 용서하여 주거니와 지금 이후로 는 너희 장단 백성은 언제든지 잡곡밥, 특히 콩밥을 해 먹어야 하지 만일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는 전후 죄를 합쳐서 큰 벌을 내릴 것이니 각별 명심하여 거행하여라!”
하며 호령하였다.
여러 농부들은 황공무지로소이다. 하며 절을 꾸벅꾸벅 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물러 나왔다.
그런 후 여러 농가에서는 종래부터 흰쌀밥만 먹던 것을 고쳐 일제히 콩을 위시하여 여러 잡곡을 먹게 되었다. 이공이 여러 농민에게 잡곡밥을 장려한지 몇 달을 지낸 뒤에 농부들을 불러 세우고
“그동안 잡곡밥을 먹으니 어떻드냐?”
“괜찮았습니다.”
“밥맛은 어떻든고?”
“흰밥은 싱거움으로 반찬이 없으면 먹을 수 없사오나 잡곡밥은 밥맛이 구수하여 반찬이 없어도 잘 먹겠습니다.”
“그러면 흰밥과 비교하여 어떤 것이 유익하더냐?”
“잡곡밥이올시다.”
"옳다! 우리가 잡곡밥을 먹으면 먹기도 좋고 또는 반찬도 절약되는데 어찌 흰쌀밥 먹기를 원하겠느냐. 오곡중에 가장 귀한 것이 쌀이니 그렇게 귀한 쌀은 될 수 있는대로 아끼어 두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같이 너희들이 늘 쌀밥만 먹는다면 어느 하가에 치부를 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도 더욱 쌀을 아낄 줄 알아야 할거이니 한층 더 힘을 써서 쌀 대신 콩, 보리, 밀 같은 잡곡으로 먹기를 힘써 각기 많은 쌀이 마을 곡간마다 가득가득 쌓여 있게 하여라.”
이공이 이렇게 품앗이를 기회로 잡곡 먹기를 장려한 것은 장단 백성이 쌀밥만 숭상하는 폐단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단 백성이 일제히 잡곡 먹기에 힘쓴 뒤로는 과연 쌀을 저축하게 되어 그 부력이 날로 증가하게 되었다.
장단 백성의 부력이 늘어난 것은 오직 잡곡을 쌀의 대신으로 먹은 은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콩과 잡곡으로 혼식을 장려하게 되니 장단태(長湍太)라 하면 전국에 걸쳐 유명하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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