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때의 영의정 이산해와 작은 아버지 이 토정과 이덕형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說話)가 있다.
이산해(李山海) 설화(說話) 즉 이산해 탄생담(誕生談)인 것이다.
이산해의 아버지인 이지번(李之蕃)이 명(明) 나라에 사신이 되어서 갈 때, 산해관(山海館)에서 유숙하면서 집에 있는 부인과 동침(同寢)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지번의 부인도 같은 날 남편과 동침(同寢)하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이산해(李山海)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안에서는 이지번(李之蕃)의 부인을 의심하여 내치려 하였으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叔父)인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만류로 참았는데, 이지번(李之蕃)이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말해 부인의 결백(潔白)함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이 꿈꾼 곳의 이름을 따서 '산해(山海)'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화(說話)는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었고, 몽중(夢中) 행위가 현실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위대(偉大)한 인물(人物)에 결부된 신이(神異)한 출생담(出生談)의 성격을 가진다.
그 밖에도 이산해(李山海)와 본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후손이 창성하게 된 유래(由來)를 말한 풍수설화(風水說話) 등이 있다. 또한 한국대표(韓國代表) 야담사화(野談史話: 洪曉民 篇)를 보면, 『선조 조(宣祖朝) 시대에 이산해(李山海)라는 분이 있었다. 그의 자(字)는 여수(汝受)요 호는 아계(鵝溪)다.
그의 아버지는 지번(之蕃)이요, 그의 작은 아버지는 이지함(李之菡)으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하는 분이다. 말하자면 이산해라는 분은 이토정의 조카였던 것이다. 이산해는 마침 당년(當年)한 딸이 있어 그의 작은 아버지 되는 토정에게 사위감을 부탁하였다.
이토정은 이 때에 풍수설 이라던지 관상과 사주 등 막힐 것이 없어 사위감을 부탁한 것이다.
이토정은 그의 조카에게 부탁받고 사위감을 고르러 다니는 판이었다. 하루는 종로의 큰 길거리로 시골서 서울로 올라오는 이사바리가 있었다.
그 이사바리 위에는 한 젊은 소동(小童)이 앉아 있는데 이 아이가 얼굴이 잘생기어 일견(一見)에 재상(宰相)감이었다. 이 토정은 이사바리를 좇아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 이 집은 그 때에 행세하는 양반의 집이요. 그 집의 사랑채에 시골서 먼촌 일가 되는 사람이 와서 드는 판이었다.
이 토정은 우선 시골서 올라온 사람과 인사를 청하니 그는 이민성(李民聖)이라는 분으로, 일찍이 지사를 지내다 낙향하였다가 다시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을 물으니 이덕형(李德馨)이라는 소년이었다.
이에 그 때에는 높은 재상으로 있는 이산해의 딸이 당년하여 사위를 고르는 판이니 그 집과 혼인(婚姻)함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민성(李民聖)이라는 분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요 워낙 궁한 판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살 수가 없어서 시골로 내려갔다가 시골서도 살 수가 없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그리 넉넉지도 못한 어느 일가집의 사랑채를 하나 얻어 드는, 바로 그날에 난데없이 청혼이 들어온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이 지사는 이와 같이 적빈여세(赤貧如洗)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역시 이토정도 약간 대답이 나가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일이 아니오 자기의 조카의 일이니만큼 문지(門地)나 재산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다.
이 토정(李土亭)은 우선 혼담(婚談)만은 어름어름 걸쳐놓고 한다름으로 자기의 조카에게로 왔다.
이공은 자기 작은아버지의 말을 듣고 문지나 재산이 없는 것을 알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토정(李土亭)은 그 소년을 한 번 보아나 달라고 하였다.
이산해는 이 말을 듣고 이덕형(李德馨)이란 소년을 가 보았다.
가서 보니 소년의 얼굴이 과연 동탕하고 잘 생기었다.
이에 이토정의 지인지감에 감탄하여 문지나 재산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모든 비용을 들여서 혼인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렇게 남녀 간엔 인물도 잘나고 볼 것이다.
이덕형 소년이 이 때에 누구나 보고 잘 생긴 소년이라고 하게끔 되어 드디어 이산해는 이 소년을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고도 의아하여 이 토정에게 묻기를, 이 소년이 나중에 어찌되겠느냐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 소년이 나중에 벼슬이 어느 정도 가며 국가의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되겠느냐고 하는 물음이다.
이 토정은 서슴지 않고 네 나이보다 먼저 정승을 할 것이다. 하고 한마디의 언질을 주었다.
과연 이소년은 속히 진사와 문과장원을 거치어 삼십 일세에 대제학(大提學, 1591, 선조 24년)이 되고 삼십팔세에 영의정(領議政, 1602, 선조 35년)이라는 놀라운 영달을 하였다.
이분이 곧 누구냐 하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막역지우(莫逆之友)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명종 16)∼1613광해군 5) 이었던 것이다. 이 두 분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가장 그 난국을 잘 담당한 사람으로 이름난 공신(功臣)들이다.』
●토정 이지함 선생(土亭 李之菡 先生, 1517~1578)
토정 이지함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얘기함에 있어 첫째로 언급해야 할 게 무얼까.
일단 그의 출생과 성장배경에서 출발 하도록 하자. 선생은 중종 12년(1517) 충남 보령에서 출생했다.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분인, 한산(韓山) 이씨의 중흥조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출생부터 범상치 않아 신비스러운 정기를 타고 났으며 신체조건이 보통사람에 비해 월등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어려서 조실부모했기 때문에 큰 형 지번(之蕃) 밑에서 글을 배웠다.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불행한선비로 분류 된다.
큰 형의 과거급제가 우선 순위였고 막상 기회가 왔을 때는 사관(史官)이었던 친우 안명세의 죽음으로 인한 실의 때문이었다.
처가와 관련된 역모사건을 피해가기 위해 마포 강변의 집 뒤에 토굴을 파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서 거처했기 때문에 토정(土亭)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재조명이라는 낱말이 있다. 막연히 토정비결을 지은 도사 정도로 인식이 되어오던 그를 오늘날 '재조명'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한 가지 단초는 야인으로 머물던 불행한 지식인이었음에도 세상을 향한 근심어린 애정을 끊임없이 발산했던 숨은 영웅이라는 것이다. 토정선생과 관련된 일화는 상당히 다양하다. 몇 가지 예화를 통해 그의 따스했던 인품의 한 측면을 조망해보자. 어느 해 선생과 형제 들이 모여 조부의 묘 자리를 구하러갔다.
지관(地官)의 말은 당대에 당상관이 2명 정도 나올 명당이긴 하나 막내인 토정 선생의 자손에겐 불길한 터라는 것이다. 선생은 근심하는 형님 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희생양이 되기로 작정한다.
"불길한 일은 제가 다 떠맡겠습니다. 이 자리로 결정하지요."
묘자리의 효과가 있었는지 과연 당대에 2명의 정승이 출현했다.
두 조카 산해(山海)와 산보(山甫)는 각각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제수 받아 1품 정승의 반열에 당당히 올랐다.
반면, 선생의 네 아들은 불행히도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후일, 영의정이었던 이산해가 자신의 글 선생이기도 했던 토정 선생의 사후에 이렇게 회상한다.
"재주는 충분히 한 시대의 질서를 바로잡을 만했으나 세상이 쓰지를 않았고, 지혜는 어둠을 낱낱이 밝힐 만했으나 세상 사람이 알아주질 않았다."
선생의 딸이었던 산옥(山玉)이 어떤 연유로 문둥병으로 불리는 불치의 나병에 걸리게 되었다.
찢는 가슴을 안고 딸과 함께 나환자촌으로 들어간다.
기(氣)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었던 도사였기 때문에 딸의 병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약재와 독극물을 통한 실험 끝에 생지네 즙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산 옥은 부친의 지시대로 일광욕과 생지 네 즙을 복용하며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은 천형(天刑)에 걸린 딸의 장래를 염려하여 장차 신복(神卜)으로 만들 것을 결심한다.
각종 역학 비법과 단법 수련을 통해 실력을 길러 주었고 불멸의 저서인 월영도(月影圖)를 전수한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월영 도는 탄생과 관련된 시간적 자료만으로 부모와 처의 성씨, 형제의 수, 고향, 수명 등을 알 수 있는 토정의 비전이다. 현재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사람만이 그 오의(奧義)를 깨달아 활용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오의의 내용은 신명(神明)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네 영(靈)은 기한(飢寒: 굶주림과 추위)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힘든 고행과 산상수행을 통해 피폐한 육체라야만 고도로 정제된 신명이 깃들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밝혀진 지혜라야 월영도의 한 자락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토정 선생은 백성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걱정한 실천궁행의 선비였다.
실학사상과 관련된 사상적 일면은 그가 시도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상업'의 장려와 물산의 흐름에 기반한 상업적 이익의 재분배과정에서 알 수 있다.
역학실력으로 천하를 주유했던 선생이 실학적 사유체계와 관계를 맺는 이유는 역학 자체가 가진 순기능 즉 현실적 개운(開運)을 담당할 수 있는 방법론적 측면 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두 개 정도 살펴보자. 선생은 처가와 관련된 역모사건의 피해자로 한동안 벼슬과 인연이 없이 지내다가 선조의 등극 후 다시금 입지를 얻게 된다.
벼슬길로 나가게 된 것은 선조 6년(1573 년) 에 인재천거와 관련된 어명에 의해서이다.
탁행(卓行: 본받을 만한 뛰어난 행동)으로 인한 특채형식의 발탁이었던 셈이다. 종 6품에 해당하는 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발령받은 후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예견하여 제방공사를 벌려 많은 인명을 구한다.
그리고 고을 재정이 극도로 빈약한 것을 염려하여 임금께 상소를 올린다.
전라도 만경현의 양 초주(洋草洲)와 황해도 풍천 부 초 도정(椒島井)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재정을 충당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는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 이 건의를 묵살해버린다. 토정 역시 미련없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버린다. 3년 후, 다시 아산(牙山)현감에 제수되었다.
부임 후 초도 순시한 결과 유난히 걸식하는 거지들이 많았다. 현청 앞에 걸인 청(乞人廳)을 꾸며 이들 거지들로 하여금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짜고 새끼를 꼬게 하였으며 대장장이 일도 배우게 하였다.
만들어진 생산물은 다음 장날에 팔아 쌀과 베로 거두어들이게 했다. 걸인청의 질서는 날로 자리를 잡아갔다.
늘어가는 걸인청의 수입은 춘궁기에 힘든 사람들에게 싼 이자로 대부하여 주었다.
현실극복의 적극적인 개운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도 아산에 가면 당시 현청 앞의 걸인청 건물을 볼 수 있다고 한 다.
스승 없는 제자는 없는 법이다.
토정선생에게도 그를 이끌어준 당대의 쟁쟁한 스승들이 있었다.
도맥(道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인연 줄을 훑어보기로 하자.
먼저 전 우치(田禹治). 그는 선가(仙家)의 인물로 신출귀몰하는 신선술과 환술(幻術)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빈민구휼의 적극적방법인 도적질을 통해 적선을 행했는데 왕명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이미 불사(不死)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지라 기름에 튀겨도 죽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직접 그린 나귀 그림을 타고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이런 인물에게 호흡법의 정수와 상대방의 마음과 이성을 꿰뚫을 수 있는 통신법(通神法)을 얻는다.
둘째,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도학자로 유명한 그의 밑에서, 후일 각 분야의 일가를 형성하는 허엽(許曄), 박순(朴淳: 좌의정을 지냈으며 서인의 종주), 차식(車軾) 등과 동문수학한다. 화담을 통해서 유학의 각종 경서와 주역, 천문, 지리, 수리, 역학 제분야 등을 공부하였다.
이외에도 토정선생의 시대에는 유가(儒家), 그리고 선가(仙家)를 통틀어 천재들이 명멸했던 시기였다.
고금을 통해 가장 무서운 적중율의 예언서로 인정받는 격암유록의 저자 남사고(南師古), 당대의 신복(神卜)이었던 홍 계관(洪繼寬: 그는 어미 쥐의 뱃속에든 새끼의 숫자까지 맞춘 사람이다),
유가(儒家)의 종주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그리고 당대의 문장가 송강 정철. 토정선생은 이들과 한 시대를 호흡하며 진정으로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한 역학자요 실학적 기풍을 진작시킨 사회사상가로서 자리 매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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