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 선비<한강 정구1>남명 퇴계학문 진수 이어
남명(南明)과 퇴계(退溪)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퇴계는 영남좌도의 중심지인 안동(安東)에서, 남명은 영남우도의 중심지인 진주(晉州)에서 각각 전국의 인재를 대상으로 강학(講學)을 하였다. 당시 남명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퇴계의 문하를 찾기도 하며 퇴계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남명의 문하도 찾아 일찍이 보기드문 학문의 성세를 이루었다.
이처럼 남명과 퇴계가 살았던 시대에 태어나 두 사람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다시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수한 이가 있으니 바로 한강 정구(寒岡 鄭逑)이다. 한강은 1543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류촌(星州郡 大家面 七峯洞 柳村)에서 판서공 사중(思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도가(道可)이다.
선대에는 서울서 살았는데 조부 승지공 응상(應祥)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사위가 되자 판서공이 현풍(玄風)외가에 와 있으면서 성주 이씨와 혼인을 한 관계로 서울로 부터 성주 류촌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러니까 동방 5현중 한사람이며 소학동자라 불리는 한원당이 한강의 외증조부가 된다.
한강의 할머니 즉 한훤당의 딸은 효성이 지극하여 친정아버지가 몸이 불편할 때, 국을 맛있게 끓여 성주 대가(大家)에서 현풍(玄風)까지 1백여리길을 와서 대접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한강이 태어나자 판서공이 "이 아이는 장차 명현(名賢)될 것"이라며 기뻐하였다 한다.
5세때 이미 신동이라 불렸으며, 7세때는 논어와 대학을 배워 그 뜻을 알았다.
9세 되던해 부친상을 당하자 상에 임하는 범절이 예사롭지 않았다.
13세때 당시 성주 교수로 와 있던 남명의 제자 덕계(德溪) 오건(吳健 : 1521~1574)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는데, 이때 덕계(德溪)가 한강(寒岡)의 자질이 뛰어남을 보고 여러 제자들에게 이르기를「너희들의 스승이 될 사람은 마땅히 정생(鄭生)이다」라고 하였다.
덕계 선생연보(德溪先生年譜)에 의하면 덕계가 성주향교 교수로 부임한 해는 39세 때 인 1559년(선조 31)으로 되어있다. 한강의 나이는 17세때이다. 덕계는 한강의 종 이모부로 한강이 13세 때 덕계를 만났다면 성주향교 교수로 오기 이전의 일일 것이다.
21세때 퇴계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이때 한강은 퇴계선생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성리학에 대해 질정(質定)하고 돌아왔다.
한강이 돌아가고 난 후 퇴계는 유희범에게 보낸 편지에「정구가 하루를 머물고 갔는데 매우 영민하더라」고 하면서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 이해 가을 향시에 합격하고 12월 광주 이 씨와 결혼을 하였다.
이듬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바로 귀향을 하였다.
이후 과거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4세 되던 해 남명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남명선생 편년에 의하면 선생께서 산해정에 계셨는데 한강이 와서 달포를 모시면서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였는데 선생께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금인물의 어짐과 어리석음, 세상이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세상 도덕, 시대의 변화, 옳고 그름, 바름과 삐뚤어짐, 벼슬에 나가는 일과 물러나는 일, 말을 할때와 묵묵히 있을 때 등등 광범위하게 문답을 주고받았다.
남명은 명리에 초연한 한강을 대견하게 여겨 말하기를「자네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으니 내가 마음으로 인정하노라. 군자의 큰 절개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한강은 남명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에 나갈때와 물러날 때를 신중히하여 처신을 하였다.
31세때 조정에서 재능과 학식이 있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자, 고향 사람인 동강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이 수찬으로 있으면서 한강을 추천하여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창평산(蒼坪山)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주자의 '한천(寒泉)'의 뜻을 따서 한강정사라(寒岡精舍)라 하였다. 이듬해에는 한훤당 선생 연보 및 사우록을 편찬하였으며, 이어 조정에서 건원릉참봉(建元陵參奉), 의흥(義興), 삼가(三嘉), 지례현감(知禮縣監)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번 벼슬을 사양한 뒤, 38세때 창녕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어 첫 벼슬길에 나갔다.
임지로 떠나기전 임금이 한강을 보고 "목민관이 되어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는가"라고 물었다.
한강은 곧「옛사람들이 백성 보살피기를 갓난아기 보살피듯 하라고 하였으니 신은 어리석으나 이 말을 실천하겠습니」라고 대답하고 임지로 떠났다. 창녕현(昌寧縣)에 부임하여서는 고을 선비들과 함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서 강회계(講會契)를 만들고 현내 여러곳에 서재를 세우고 훈장을 선정하여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부임 1년만에 감사(監司)가 치적을 보고하는데, 최고의 성적을 얻어 사헌부 지평(持平) 등의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임하였다. 41세 때 강원도사(江原都事), 충청도사(忠淸都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창평에 회연초당(檜淵草堂)지어 제자들과 더불어 월삭강회계(月朔講會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규약을 정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44세 때 함안 군수(咸安郡守)·로 부임하여 옛날 좋은 풍속을 되살리고 낡은 행정의 폐단을 고치며, 각종 저울들을 통일하여 백성들의 세금을 감해주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없도록 시정했다.
또한 고을 어진 선비들과 군지인 함주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강은 창녕(昌寧)에 처음 부임해서부터 부임지역마다 군지를 편찬하여 그 지역의 역사와 문물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후임자들의 참고자료가 되게 하였는데, 이는 임란 중에도 중지하지 않았다.
1592년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한강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들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게 하여 왜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남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년~1617년)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고 있을 때 조정에서 곽장군에 대한 비방과 모함이 많았다. 선조가 곽장군에 대해 한강에게 묻자 대답하기를「곽재우의 인물됨은 작은 진주만을 맡아 싸우기에는 보다 큰 그릇입니다」라고 하여 곽재우 장군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이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형조참의(刑曹參議), 충주목사(忠州牧使)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事) 등의 벼슬을 지내고 60세때 고향으로 돌아와 62세되던 해에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지어 학문에 힘썼다.
66세 때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임해군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곧 사직하고 말았다.
이어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폐비 등에 불가 상소를 누차 하였으나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
이런 일로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않고 고향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생을 보내게 된다.
77세때 김해신산서원(金海 新山書院)을 배알하고 동래온천, 창원 관해정(觀海亭)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이어 이듬해 사양정사 지경재(泗陽精舍 持敬齋)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그 후 1623년(인조 1)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2년후 문목(文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효종 8년(1657년)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1997.6.27.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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