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연암 박지원

야촌(1) 2008. 2. 18. 00:36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생졸년] 1737년(영조 13)~1805년(순조 5)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로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 시호는 문도(文度)다.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 계열로,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서울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아버지 박사유(朴師愈)와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창원(李昌遠)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 부터 원각사(圓覺寺 : 현 파고다 공원) 근처에 살 때 박제가,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고,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북학(北學)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당시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한때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그는 29세 때 과거에 낙방한 이후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으며, 44세 때(1780년, 정조 4)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연경(燕京)을 거쳐 청나라황제의 여름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었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그의 실학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50세 때 비로소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제수되고, 이후 안의(安義) 현감 · 면천(沔川) 군수 · 양양(襄陽) 부사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 기 위한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을 제시하며, 조선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엔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실학사상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양반전(兩班傳)》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許生傳)》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개혁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묘는 오늘날 황해남도 은률군(殷栗郡) 연암리(鳶岩里) <구지명 : 장단군(長湍郡)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년(순조 7)∼1877년(고종 14)]는 그의 실학사상을 계수하여 개화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의 문집 연암 집(燕巖集)》은 1900년에 비로소 초록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

 

●가족관계

[아버지] 박사유(朴師愈)

[형] 박희원(朴喜源, 1730년~1787년) 

[첫째 아들] 박종의(朴宗儀,1766년~1815년) 박지원의 형인박희원의 양자로 입적.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년~1835년)

[박규수/우의정] 박지원의 차자 종채의 장남

[처남] 이재성(李在誠), 열하일기에 '중존'(仲存)이라는 자로 논평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