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 미수(許 眉叟) 이야기
[생졸년]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허목(許穆)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문보(文甫), 화보(和甫)요. 호(號)는 미수(眉叟),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1595년(선조 28년) 12월 11일 인시(오전 3시 30분-4시 30분)에 서울 창선방에서 아버지 현감 교(喬)와 조선(朝鮮)선조(宣祖) 때의 유명(有名)한 시인(詩人)으로 39세에 요절한 임제(林悌 :1549-1587)의 딸인 어머니 나주(羅州) 임씨(林氏)사이에서 태어났다.
1615년(광해군 7년) 정언웅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아버지가 거창 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衛)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30세에 광주(廣州) 쇠내에 우거하며 자봉산(姿峰山)에 들어가서 공부했는데, 어릴 때, 배운 전서(篆書)를 이 시절에 서체를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효종이 승하하자 예론으로 우암 등과 대결하였다. 인조(仁祖)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인조에게 독살되고 둘째 아들인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다.
그 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조씨가 효종(孝宗)을 위하여 몇년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을 기해예송(己亥禮訟, 1669)이라고 한다. 기해복제(己亥服制)에 문제가된 것은 효종이 가통(家統)으로 보면 차자(次子)가 되고 왕통(王統)으로 보면 적자(嫡子)가 되므로, 어느 쪽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복입는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1년복을 주장했고, 윤휴와 허목은 3년복을 주장하여 예송이 제기된다.
결국 논쟁에서 패하여 삼척부사로 쫓겨나고 이때 저유명한 속칭 퇴조비(退潮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동해의 조수간만이 약간 있었는데 파도가 매우 심하여 삼척 읍내까지 올라왔으며, 여름철 홍수가 나면 오십천(五十川)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매우 심했다. 그래서 미수가 글을 짓고 비를 세워 조수를 진정시켰다 한다.
한편 그는 이기론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理)는 기(氣)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미수는 남인의 영수로서 서인이던 우암 송시열과 예론(禮論)에 관련된 논쟁이 유명하다.
그의 사후인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자손을 등용 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 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 이원익비(領相 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同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纂), 미수기언(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를 봉안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 : 오늘날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허미수와 송우암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우암이 미수에게 문약(問藥)한 일이 있었다.
아들을 시켜 미수를 찾아가서 자기 병세를 상세하게 고하고 약방문을 내어달라고 청했다.
우암도 약방문을 못내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미수 외에는 자기 병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
미수가 우암에 대한 아들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비상 세 푼을 정화수에 탕하여 춘부장께 올리게」라고 했다. 우암 아들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비상 세 푼이라니 먹고 죽으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아버지가 걱정되어「더 좋은 약은 없을까요?」하니 그제서야 미수가 필목을 꺼내더니 초제(草劑)로 약방문을 적어서 아무 말 없이 건네주었다. 아들은 인사를 올리고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 우암께 그 글을 올렸다.
우암이 죽 훑어보고 아들에게 하는 말이「선생님께서 아무 말 없으시더냐?」하셨다.
그제서야 전후 사정을 자세히 고했다. 그러자 우암이 「그러면 그렇지. 역시 미수다워」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러면서 약장에서 비상 세 푼을 내어 미수 어른께서 시키는 대로다려 오라고 했다.
우암이 비상 세 푼의 약방문을 자기도 마음속에 내어 놓고 혹시나 하여 미수선생님께 보냈던 것이라 한다.
이 얘기는 비록 정치상의 의견대립은 있을 수 있어도 인명에 관한 의술에는 의견을 달리할 수 없었던 것과 인간적으로 물 약할 만큼 알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암이 세자 책봉의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약을 받게 되었는데 금부도사가 사약을 올리자 하는 말이 「이 약은 내가 먹어서는 죽지 않아」하였다. 관원은 죽지 아니하면 자신이 난감한 일을 당해야 하는 처지라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우암이 「자네야 무슨 죄가 있나. 나의 항문(肛門)을 막아라.」하였다. 솜으로 항문을 꼭꼭 막자 약사발을 마시고 누워서 고생고생하다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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