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시인 김삿갓(김병연)

야촌(1) 2007. 10. 13. 16:09

■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생졸년] 1807년(순조 7)∼1863년(철종 14).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호는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6살 때에 선천부사(宣川府使)이었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이 평안도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인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을 당하여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자, 그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從), 김성수의 집으로 피하였다가 사면되어 부친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이 화병으로 죽자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廢族)의 자식으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 이 곳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그가 20살 되던 해에 영월 동헌에서 열린 향시(鄕試)에서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장원급제하고 집에 돌아 왔는데, 그날 저녘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비로소 듣게 되었다.

 

집안의 내력을 비로소 알게 된 김삿갓은 조상을 욕되게 한 罪人이라는 자책과 廢族의 자식이라는 세상의 멸시를 참지 못하고 22살 되던 해에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 한양으로 간다.

 

그는 한양에서 2년동안 의도적으로 명문대가의 자식들과 교유하면서 벼슬길을 찾아보지만 그 과정에서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벼슬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갈 길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방랑하였으며, 그의 아들이 안동,평강,익산에서 3번이나 그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매번 도망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화순의 동복 어느 곳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살았고, 그 후 지리산을 두루 살펴 본 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3년 뒤 둘째 아들 익균이 이곳으로 이장하여 왔다. 

 

●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과 김삿갓  

 

서북인(西北人) 차별 대우와 탐관오리들의 虐政에 분노하여 일어 난 " 홍경래의 난 "은 가산,박천, 정주 등 평안도 서북지역을 순식간에 휩쓸고는 마침내 선천(宣川)으로 향하였다. 

 

이 때 가산군수 정시(鄭蓍)는 일개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최후까지 반란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반면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당시 정시보다 높은 선천부사이었는데, 반란군에게 잡혀 결국 항복을 하였고 반란군에 협력하였다.

 

그 후 탈출하여서는 남의 공을 가로채려 하였으나 반란이 평정된 후 이 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이 때 김삿갓나이  6살이었다. 한편 김삿갓이 20살 되던 1826년 영월읍에서 백일장대회가 열렸는데 그 때 시제(詩題)는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즉, 정시(鄭蓍)의 충절 한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를 통박하라는 것이었다.

 

당시로선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그는 정시의 충절에 대하여는 아낌없는 찬사를, 그리고 김익순에 대하여는 가차 없는 비판을 하였다. 

 

● 김삿갓의 답안지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답안지) 

 

일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 一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장군도리농서락  열사공명도말고 / 將軍桃李膿西落  列士功名圖末高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존주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갈량 / 存周孰非魯仲蓮  輔漢人多諸葛亮

동조구신정충신  저장풍진입절사 /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가릉노리양명정  생색추천백일하 / 駕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혼귀남무반악비  골매서산방백이 /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신 /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祿臣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항렬순 /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오왕정하진퇴슬  배향서성흉적취 /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敵脆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 답안지의 국역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하였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 열사들 가운데 功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로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가산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써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관서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주(周)나라를 받드는 데에는 노중련같은 충신이 없었고

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에는 제갈량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군수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대군 앞이라도 義를 버려서는 안되리라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 무릎 꿇어야지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리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백일장대회가 열렸던 영월의 관풍헌(觀風軒)

      

● 김삿갓 시인의 마지막 글 

 

날짐승도 길짐승도 다 제 집이 있건만

나는 한평생 홀로 상심(傷心)하며 살아왔노라.  

 

짚신에 대지팡이 끌고 천리길 떠돌며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곳이 내 집이었다.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되어

해마다 해가 저물면 슬픈 회포만 가슴에 남았노라.

 

어려서는 이른바 복(福)된 집에서 태어나

한강 북녘 이름있는 고향에서 자라 났노라. 

 

조상은 구슬 갓끈 늘인 부귀한 사람들이었고

호화로운 가문은 장안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이웃 사람들도 귀공자 태어났다 축하해 주며

장차 이름을 떨치리라 기대했었다.

 

어린 머리칼 차츰 자라면서 운명이 기박해져

화를입은 집안은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변했다. 

 

의지할 친척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부모마저 돌아가셔 집안은 망했도다.

 

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마음은 고향그리는 떠돌이 여호같고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곳

부평초처럼 떠돌아 다니기 몇몇 해던고.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요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수록 아득하네.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았으나

풍월 읊은 행장(行裝)은 언제나 비었도다.

 

큰 부자 작은부자 고루 찾아다니며

후하고 박한 가풍(家風) 모조리 맛보았노라.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돌아 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얼마나 긴 세월 길가에서 헤매야 하는가.

 

● 김삿갓의 행적

 

김삿갓은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본명은 병연(炳淵)이고, 자(字)는 성심(性深). 호(號)는 난고(蘭皐)이다. 

김삿갓은 그의 속칭(金笠)으로 오늘날 경기도 양주시 회천동(회암리)에서 태어났는데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祖父) 익순(益淳)이 홍경래 에게 항복한 죄로 멸족( 滅族)이 되어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당시 그의 가족은 조부를 제한 나므지 가족의 목숨은 구해, 여섯살의 어린 나이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종이던 김성수(金聖秀)의 구원을 받아, 종 김성수의 고향,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 해서 살게된다.

 

그후 일곱살때 멸족에서 폐족으로 복권되어, 가족이 잠시 고향에 모여 살게 되기도 하지만 아버지(金安根)는 홧병으로죽게되고 또한 동생까지 잃게되자, 어머니는 폐족에 대한 천대도 심해 결국 살아남은 아들 둘을 데리고 강원도 영월로 숨어살게 된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글을 가르쳐, 20세 되던헤 영월의 백일장(오늘날 에비고사)에 응시하게 되는데, 이날 백일장의 시제가 "정가산의 출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평소 가산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이라고 존경해 왔떤반면,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경멸해 오던터라,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로서 장원을 차지(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으나 어머니 께서 기뻐 하기는 커녕 기절 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지금까지 숨겨왔떤 집안 내력을 듣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삿갓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22세 되던해 집을나서 방랑 생활에 올랐는데 그의 詩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것이 많아 민중 시인으로 불린다.

 

그의 아들이 여러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방랑을 계속하다 1863년 전남 화순군 동복(同福)에서 객사, 그곳에 묘(墓)를 썼는데 3년후 둘째 아들인 익균(翼均)이 지금의 장소인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노루목)로 이장했다. 작품으로<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897-2

 

↑김삿갓 선생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