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봉강서원(鳳崗書院)

야촌(1) 2008. 2. 29. 21:52

↑봉강서원(鳳崗書院)

   소재지 : 경북 상주시 신봉동 270(신봉) / 건축연대 : 1817년(순조 17)

 

□ 건축배경

봉강서원의 전신은 고려가 망하고 난 이후에 개성 근교의 배록동에 들어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고려의 유신임을 자처하고, 조정에서 여섯 번이나 불러도 사양하고는 나아가지 않은 통계(通溪) 강회중(姜淮仲)과 연산군의 폭정을 직간하다 네 부자가 참화를 당한 강형(姜詗)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기 위해 공의 십 사세 손인 세백(世白)이 1817년(순조 17) 경덕사(景德祠)를 봉강(鳳崗)에 세운 것이다.

 

1868년(고종 5) 전국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후손들이 단을 세워 향사를 올렸다. 1964년 도남서원에서 경덕사를 복원하기로 결의 되어 복원하였으며, 11년 뒤에 옥동서원에서 서원으로 승원을 결의하였다. 2년 후에 서원으로 승원하여 이름을 봉강이라 하였으며, 묘호는 경덕사로 하였다.

 

서원의 중건은 1984년에 논의가 되어 이듬해에 중건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4년 뒤에 묘우와 내외삼문, 강당과 전사청이 중건되었다. 이 해에 멸문의 위기를 당하자 단식을 하며, 곡하다가 절명한 강형의 처인 선산 김씨의 정려문을 서원 옆으로 이건하였다.

 

□ 건축의 특징

쾌적한 주거 환경과 교육여건을 갖춘 지역으로 상주의 대표적인 사학인 상주고등학교의 약 20미터 정도 동쪽에 있으면서, 갑장산이 서북쪽으로 뻗어 나온 그 산자락을 마주보고 있다. 인재는 그 지방의 지형에 따라 나온다고 한 선현들의 말을 입증하듯이 좋은 위치에 자리 한다.

 

서원으로 승원하여 세운 숭덕(崇德)이 문 이름인 외삼문 밖에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입향 유래를 기록한 세거비가 왼쪽으로 서있으며, 그 옆으로 관리사가 자리 한다. 외삼문을 지나면 시멘트로 바닥을 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봉강 강당이 자리 한다. 중앙의 2칸은 마루로 시공되었으며, 양쪽의 방은 온돌이다.

 

강당 뒤의 삼간 솟을대문으로 된 내삼문을 지나면 일곱 계단의 높은 단 위로 묘우인 경덕사가 자리 한다. 묘우는 내부와 전면의 퇴 칸 모두 마루로 시공되어 있으며, 강회중(姜淮仲)과 강형(姜詗) 두 분의 위패가 봉안 되어 있다. 서원 담장 왼쪽 밖에는 서원에 배향된 강형의 처인 선산김씨의 정려가 있다. 건물은 3칸 솟을 대문이며, 양쪽에는 행랑을 시설하였다.

 

□건축구성

    봉강서원의 배치 형태는 교육 시설인 강당이 앞에 있고 제사 시설인 사당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

    묘(前學後廟)형 배치형태로 많은 서원이 본받았다.

 

□ 현판

◇숭덕문(崇德門) : 외삼문의 문호이다. 덕을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봉강서원(鳳崗書院) : 봉강 강당의 마루 안편 오른쪽 위에 게시 되어있는 서원의 원호이다.

 

◇경덕사(景德祠) : 묘우에 걸려 있다.

 

◇경덕사기(景德祠記) : 세마(洗馬) 강필효(姜必孝)가 지은 기문이다. 경덕사가 봉대 마을에서 현재의 위치

    로 옮겨 지은 것으로 건립 배경에 대한 설명이다.

 

◇봉강서원 기(鳳崗書院記) : 서원을 중건한 1977년 장병규 선생이 지은 기문이다. 세백이 경덕사를 짓고

    신주를 모신 과정과, 이건 사실들을 기록하였으며, 서원을 건립한 큰 덕과 교화가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

    는 마음이 실려있다.

 

□ 향사일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이다. 일년에 한 차례만 향사 한다.

 

□ 향례

    봄에 한 차례 추모하는 제사인 향례를 갖는다. 봄에 하는 춘기향례(春期享禮)는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

    에 지내고 가을에 지내는 추기향례(秋期享禮)는 지내지 않는다. 향례 하루 전 제사를 지내는 유사들이 들

    어와 서원 내부를 청소하고 제기도 씻어 놓는다. 행사 시작 오각 전에 찬을 관장하는 자는 제수를 진설한

    다.

 

    알자는 초헌관을 모시고 동쪽 계단을 올라가 진설된 제수를 점검한다. 모든 집사는 먼저 내삼문 밖에 선

    다. 집례와 알자 찬인은 먼저 배위(拜位)에 나아가 재배 하고 각자의 위치로 간다.

 

    봉강서원은 원래는 세덕사(世德祠)로 1975년에 경덕사를 서원으로 승원하였으므로 원의 이름은 1977년

    에 정하였으나, 승원한 해부터 사림이 행사를 하였다.

 

□ 배향인물

 

◇강회중(姜淮仲)

    1359년(공민왕 8) ~ 1421년(세종 3). 자는 중부(仲父). 호는 통계(通溪). 진주강씨(晉州姜氏) 박사공파 七세손

    으로 아버지는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이고, 강회백(姜淮伯)의 아우이다. 초취는 의령남씨(宜寧南氏)

    판사(判事) 남징(南徵)의 딸이고, 후취는 전주최씨(全州崔氏) 통정대부(通政大夫) 성주지사(星州知事) 최

    영(崔寧)의 딸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사사하였고, 순흥군 안종원(安宗源)과 판후덕부사 윤진(尹珍)의 문하에서 수

    학하여,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85년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성계

    가 역성혁명을 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두문동(杜門洞)에서 은거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인재를 찾아 공에게 1차로 형조참판에 등용코자 하였으나 불응했고, 재차 병

    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불응하고, 다시 병조판서의 자리를 제의해도 불응 하였고. 세종 때에도 총제(摠

    制)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병석에 누운 공은 손을 저어 물리치며 절개를 지켰다.

 

   공이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부음을 들은 세종대왕은 '고려조의 참된 유신이 세상을 떠났구나' 하

   면서 탄식하고 고려유신의 예우로 관례에 따라 부미(賻米)를 보내고 말하기를 '강 씨는 고집이 강하다고

   하더니 과연 강 고집(姜固執)이로구나' 라고 말한 이후부터 이 나라 안에 전파되어 '강고집'이 고유명사처

   럼 되었다고 전한다.

 

   저서로《전해고문진보지(箋解古文眞寶誌)》가 있고, 묘는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 시묘골에 있다.

 

◇강형(姜詗)

   생몰년은 미상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형지(詗之). 평양감사를 지낸 자평(子平)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성군(誼城君) 이채(李寀)의 딸이다.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지평

   을 거쳐 1495년 장령을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대사간에 재직중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廢妃) 윤씨의 복위문제로 일어난 갑자사화때

   폐비윤씨의 신위(神位)를 별묘에 모시는 입주입묘(立主立廟)를 비판하다가 반대파의 우두머리로 몰려 능

   지처참되었다.

 

   당시에 사위 허반(許磐)과 세 아들인 영숙(永叔), 무숙(茂叔), 여숙(與叔)이 같은 날에 참화를 입었다.

   아우인 군수 겸(謙)도 형의 죄에 연좌되어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천성이 너그럽고 공평하고

  후하였으나, 올바른 일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선비였다.

 

 아내 김씨는 한 달 동안을 먹지도 않고 울다가 죽었는데, 1507년(중종 2)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중종 때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