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덕수궁 실척원도 발견.

야촌(1) 2007. 12. 13. 17:36

현재 규모는 원래의 3분의1… 사라진 18개 건물 나타나
신형준기자

 

이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왕이나 왕비의 신위를 모신 건물) 경효전(景孝殿),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임금의 얼굴을 담은 그림이나 사진)을 모신 선원전(璿源殿) 등 덕수궁 건물을 원래 건축 규모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


덕수궁 내 건물의 크기를 보여주는 ‘덕수궁 평면도’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덕수궁 복원 사업을 위해 발족한 ‘덕수궁 복원 문헌조사단’은 9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1907~1910년 제작된 덕수궁 실측 도면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덕수궁 도면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일 뿐 아니라, 건물의 외양만 묘사한 기존 도면과 달리 각 건물이 몇 칸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도면이라 의미가 크다. 이번에 발견된 평면도를 보면 덕수궁에서 없어진 건물과 문은 이름이 기록된 것만 18곳이 넘고 이름없는 작은 건물까지하면 30개 가까이가 사라졌다.

 

 

 

도면은 축척 1200분의 1, 가로 102㎝, 세로 71㎝. 원도(原圖)를 복사한 청사진(blue print)으로, 제작자나 시기 등은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황제를 양위한 고종을 모시기 위한 승녕부(承寧府·도면 12번)가 표시됐고, 덕수궁 석조전(石造殿·1910년 완공) 자리가 빈 채로 있다는 점 등에서 1907~1910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惇德殿)과 환벽정(環碧亭), 왕족·귀족 자제의 근대적 교육을 위해 설립된 수학원(修學院) 등 지금은 사라진 30여개 건물(문 포함)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도면을 조사한 김동현·김동욱 문화재위원과 이강근 경주대교수 등은 “대한제국기(1897~1910년) 덕수궁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됐다”고 반가워했다.

 

●풍운의 덕수궁

 

조선왕조 부흥의 마지막 불꽃과 몰락을 지켜보았던 덕수궁의 본명은 경운궁(慶運宮·사적 124호)이다. 명성황후 시해 직후(1895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에 올라 조선왕조 부흥에 불을 지폈다.

 

고종은 음악을 감상했던 정관헌(靜觀軒)과 석조전, 중명전(重明殿) 등 여섯 동의 양옥을 포함, 새 건물을 잇따라 지었다. 고명딸인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이 준명당(浚 堂)에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 강제 퇴위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되며, 왕조와 함께 몰락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경내 건물들이 잇따라 철거되고, 건물 목재들은 공개입찰로 팔리기도 했다. 일제는 벚나무 500그루를 심어 창경궁처럼 덕수궁을 공원으로 꾸미려고도 했다. 현재 덕수궁은 전성기 때의 3분의 1 만 남았을 뿐이다.

 

대한문 옆을 뭉텅 잘라낸 자리는 태평로와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변했고 북쪽의 수학원과 선원전 권역에는 구세군 본관과 옛 경기여고 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중명전 주변으로는 정동극장, 정동문화예술회관 등이 들어섰다.


원본 : 덕수궁 실측 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