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500년 명가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

야촌(1) 2007. 4. 29. 19:35

■500년 명문가에서 배우는 경영 30 - 최고의 역할모델

 

내리 8대 판서 배출… ‘참여형 명가’ 일궈 

 

자녀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역할모델’의 중요성은 먼저 가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정만큼 사회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본보기, 솔선수범이 중요한 이유다. 

여기서 가족이나 가문의 DNA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하는 까닭이 있다

.

이른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경제 원리는 가족 DNA의 진화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성 없는 과거의 질곡에 빠져 선진국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이 바로 이런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패전 후 전범을 반성하는 지도자(양화)가 나와 제 역할을 해 줬더라면 일본은 독일처럼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가진 역할모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지도자를 역할모델로 가졌다

 

.그 결과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 꼴이 되었다. 

아베 총리가 바로 악화의 역할모델을 가지고 있는 경우일 것이다. 아베의 역할모델은 다름 아닌 군국주의자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인정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백사 이항복(李恒福)은 경주 이씨 후손들에게 최고의 역할모델이 되고 있다.

그는 독학으로 당대의 핵심 인재가 된 ‘자수성가형’ 인물의 전형이다. 

그는 부친이 형조판서를 역임했지만 아버지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백사는 그의 먼 선조인 고려 말 익재 이제현 이라는 걸출한 대 문장가를 역할모델로 삼을 수 있었다. 

또 당대의 핵심 인재인 한음 이덕형과의 우정은 23세 때부터 시작해 평생 동안 이어졌고 병조판서를 번갈아 맡기도 했다

.

이 또한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백사의 일생은 고난과 영광이 교차했다.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역경도 감내해야 했다. 그는 계축옥사 때 좌의정에서 내쫓겨 도성을 떠나야 했다.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였지만 권력에서 내려오자 다시 고단한 삶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는 뚝섬과 노원, 망우리 등지로 이사를 다니면서 4~5년을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살아야 했다. 

권력에서 쫓겨난 그를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을 정도였다.

 

눈 온 뒤라 산속의 집은 저녁까지 문이 닫혔고/

개울가 다리에는 한낮에도 찾아오는 이 없다네/

화로를 끼고 있노라니 조금씩 따뜻해져서/

주먹만한 밤을 손수 구워 먹노라/

 

백사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인적 없는 도성 밖을 전전하던 백사는 또 한번 호연지기 정신을 발휘했다. 

 

인목대비(광해군의 계모) 유폐 사건이 발생하자 백사는 이의 부당성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618년 광해군은 중풍으로 고생하던 백사를 삭탈 관직하는 한편 북청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이내 죽었다. 백사는 이후 청백리에 올랐다.

 

백사의 일생을 볼 때 가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그만큼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는 역할모델도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경주이씨를 명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가문의 기획자이자 국가 위기 관리의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을 다했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백사는 실학파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다.

실학파들보다 200년을 앞서 중국에서 본 구운 벽돌의 실용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중국에서 집과 성벽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구운 벽돌에 주목했다. 

그는 구운 벽돌 제조 기법을 비밀리에 알아와 벽돌 사용을 주장했다.

 

하나의 모형만 만들면 복제가 가능한 벽돌이 돌보다 더 쓰임새가 있고 내구성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편에 백사를 인용하며 언급하고 있다.

 

백사를 역할모델로 삼은 그의 후손들은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를 일구었다.

백사에 이어 그 후손 대에 이르러 4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배출하면서 인재 산실의 역할을 했다.

내리 8대째 판서를 배출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은 ‘백사공파(ㅂ白沙公派)’라는 독자 계보를 만들었다. 

특히 ‘은둔 형’ 명가가 아니라 ‘참여 형’ 명가를 만든 것이다.

 

 

 ↑백사 이항복선생 묘(경기도 포천시 금현리 산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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