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약용(나주정씨)
다산은 자가 미용(美鏞), 송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庵), 다산(茶山), 태수(苔叟),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文岩逸人), 탁옹(籜翁), 죽옹(竹翁), 철마산인(鐵馬山人)등 여러 개가 있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하여 스스로 아호를 '삼미자(三眉子)’라 했다.
아명(兒名)은 귀농(歸農)이다. 아버지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다산을 낳았기에 그를 그렇게 부른 것이다.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여(與)는 의심할여이며, 유(猶)는 망설일유 자로 역시 두려워하며 못믿는다는 뜻이다. 당호에는 풍진 세상을 떨치고 전원생활에 안주하려는 심정이 담겼다. 다산은 1762년 6월 16일에 태어났다. 15세 때 풍산홍씨 승지 홍화보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홍화보는 문중8강의 하나인 풍산홍씨 가문으로 문경공 홍이상의 5대손이다. 홍화보는 무과 출신이며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홍중후의 아들이며 문과하여 승지를 지낸 홍만기의 손자이다.
큰아들은 학연이다. 학연의 자는 치수(穉修) 호는 서산(西山)이다. 1852년 선공감 감역을 지냈다.
작은 아들은 학유이다. 자는 치구(穉求)이며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외동딸은 해남윤씨 참봉 윤영희 아내가 되었다. 윤영희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낸 윤서유의 아들이다.
윤서유는 정약용과 교분이 두터운 친구로서 사돈이 되었다. 윤영희 아들은 윤정기이다.
윤정기는 호가 방산이다. 방산은 할아버지 서유에게 글을 배우다가 나중에 외할아버지 정약용에게 수학하여 오직 학문에만 힘쓰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날리는 학자로 유명했다.
영의정 권돈인, 우의정 한계원, 영의정 김병학 등과 시문으로 교유했다.
그의 문명(文名)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연경의 학자 주당(周棠)이 “백홍(白虹)의 기상이 있다.”고 극찬하며 호를 방산(舫山)이라 지어줬다.
다산의 외조부는 윤덕렬이다. 선비화가 윤두서(尹斗緖)는 외증조부이다.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조 3대 가인(歌人)으로 불리는 고산 윤선도는 외5대조이다.
다산은 윤지범, 윤지눌, 윤지충 등과 가깝게 지냈다. 윤지범은 외6촌이고 윤지충은 외4촌이다.
윤지충은 1791년 어머니가 죽자 천주교 교리에 따라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례를 행했다가 처형당했다.
다산은 평창이씨 참판 이동욱의 딸을 맏며느리로 맞아드렸다. 다산의 누이가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의 아내가 되었다고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다.
다산은 매형 이승훈의 누이를 며느리로 삼았다.
다산은 이가환의 외삼촌인 매형 이승훈, 맏형의 처남인 이벽 등과 함께 천주학을 공부했다.
다산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성호 이익의 종손자 금대 이가환, 목재 이삼환, 종증손 이재위(길환의 아들) 등 여주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통해 성호의 학문을 사숙했다.
다산은 성호 이익을 “백세의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다산은 22세 때(178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28세 때인 1789년 문과에 합격하여 33세에는 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거기서 교리 및 수찬 벼슬에 오르고 뒤이어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연천 현감 김양직과 삭령 군수 강명길이 뇌물을 받고 노비를 풀어주었으며 군역을 면제시켜주고 세금을 빼돌리는 등 온갖 탐학질을 했다. 다산은 어사로 이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 그들의 폭정을 뿌리 뽑았다.
그 뒤 곡산부사로 나갔다. 이때 이계심이란 죄인이 자수하였다.
그는 전임 부사가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는데 대해 천여명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관청에 항의하다 쫓기는 신세가 된 사람이다. 당장 체포하여 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지만 다산은 오히려 그냥 돌려보내면서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마땅히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 하였다.
일신의 안전을 살피지 않고 잘못된 정치를 보고 항의하는 이계심의 의분(義憤)을 헤아려 준 것이다.
다산은 때마침 곡산 땅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창궐하자 이에 대한 치료법을 적은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을 지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 9남매가 어릴 때 대부분 홍역을 앓다가 죽고만 회한이 있는데다가 고통 받는 백성들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다. 그 뒤 다산은 초정 박제가와 함께 역사상 최초로 종두법을 소개하였다.
1789년 배다리의 준공에 이바지했고 1793년 수원성 설계에 오늘날 기중기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도록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축성 비용 4만 냥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 뒤 벼슬은 병조참의와 좌우부승지 등에 이르렀다.
23세때 천주교를 처음으로 접했으며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였다.
신서파(信西派)로 지목된 다산은 공서파(攻西派)의 공격을 받아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당했다.
신유박해 때 다산은 경상도 장기(지금의 경북 영일군)로 유배를 떠나 저술 작업에 전념하였다.
장기에서 다산은 ‘기해방례변’ ‘삼창고훈’ ‘이아술’ 등을 저술하였다. 하지만 이 저술들은 오늘에 전하지 않고 있다. 곧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서 강진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천리 길 전라도 강진 땅으로 귀양길을 떠난 다산은 1801년 추운 겨울 날, 유배지 강진읍에 도착하여 '객중서회(客中書懷)'라는 시를 지었다. 북풍한설 몰아치듯이 나를 몰아 붙여 멀고먼 남쪽 강진 땅 밥 파는 집에 던졌구나.
강진읍 동문 밖 주막에 여장을 풀었다. 노파가 내준 뒷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하였다.
여기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 1805년부터는 강진읍 보은산방에 거처하였다. 1808년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다산초당은 처사 윤 박의 산정(山亭)이다.
윤 박의 아들 윤문거 형제들이 다산을 그곳으로 모셨으며 다산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해남윤씨로 다산의 외가 친척들이다.
이곳에서 다산은 백련사에 거처하는 학승 혜장선사와 교유를 했다.
혜장은 대둔사 12대 강사이며 다산이 ‘유학의 대가’라고 칭송한 고승이다.
11세 아래인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대접하고 자기의 제자 초의를 다산에게 소개했다.
다 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는 다산의 아들 정학연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를 만났다.
24세 아래인 초의는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동갑인 추사와 교유했다.
다산, 혜장, 초의, 추사 는 학문과 예술, 풍류로 함께 즐겼다.
다산초당에는 정석(丁石)이라고 새긴 바위, 대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한 속에 있는 약천(藥泉), 맑은 샘, 차를 끓이던 차 부뚜막이 있다. 이 정석(丁石), 약천(藥泉), 연지(蓮池), 다조(茶竈)를 ‘다산4경(茶山四景)’이라 일컫는다.
이곳에서 다산은 혜장선사, 초의대사, 추사와 함께 한국 다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어쩌면 귀양살이의 고통과 세속의 시름을 잊으려고 이들과 함께 다도 삼매에 들었을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다산은 풍류와 멋을 아는 명인(名人)으로 학자의 진면목(眞面目)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곳 다산초당은 다산의 사상이 잉태된 역사의 현장이다.
방대한 육경사서에 대한 저서를 비롯하여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권을 이곳에서 저술했다.
이 저작물은 '한국학의 보고'가 되었다. 이곳이야 말로 다산 학의 산실(産室)인 것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귀양지 강진의 다산 문하(門下)에는 이청, 이강회, 이기로, 윤종문, 윤종진, 윤문거 등을 비롯한 제자들이 20명이 넘게 나왔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다산의 아내 홍씨는 시집올 때 입었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남편에게 보냈다.
다산은 그 비단치마에 교훈의 글을 쓰고 매조도(梅鳥圖)를 그려 넣어 자녀들에게 다시 돌려보냈다.
1804년 겨울 유배지를 찾아온 장남 학연을 읍내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
1808년에는 둘째 아들 학유를 불러 주역과 춘추를 가르쳤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간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말아 라. 더욱 힘을 내 책읽기에 전념해라. 벼슬길이 막힌 집으로 글도 못하고 예절도 없으면 어찌 되겠느냐. 여느 집안사람들보다 백배 천배 열심히 공부하여라.”는 편지를 보내 학업을 독려했다.
57세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을 저술했다.
일흔 세 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유배시절 저술했던 상서(尙書)를 개정, 보완했다.
다산은 스승과 제자, 벗, 친인척이 대부분 남인이다.
스승으로 모신 성호 이익의 여주이씨 가문이 남인이다. 뿐만이 아니다.
매가(妹家)이자 며느리의 친정 평창이씨 가문, 사돈 이벽의 경주이씨, 형님 정약현의 딸, 즉 질녀(姪女)의 남편, 질서(姪壻) 황사영의 창원황씨, 권철신의 안동 권씨, 외가(外家)이자 사돈집인 해남윤씨, 매가(妹家) 평강채씨 등은 대부분 남인계 가문들이며 일부만 소론 계열이다. 다산은 남인 뿐만 아니라 노론과 소론 가문과도 친교가 있었다.
여한십대가의 반열에 드는 홍석주, 김매순과 같은 당대의 문장가들과 학문적으로 교류를 했다.
홍석주는 양관대제학에 좌의정을 지낸 당대의 거물급이다.
홍석주는 선조 부마 영안위 홍주원의 7대손이며 영의정 홍낙성의 종손자로 노론 가문 출신이다.
김매순은 안동김씨 창흡의 현손으로 핵심 노론 가문 출신이다. 신작은 평산신씨로 소론 가문 출신이다.
신작은 다산과 ‘주례(周禮)’의 육향지제(六鄕之制)를 논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다산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시를 지어 보내 칭송한 바 있다. 신작은 충장공 한성판윤 신립의 후손이다.
신작의 종증손이 신익희이다. 해공 신익희는 대한민국 제1대, 2대 국회의장을 지내고 제1야당 대통령 후보로 자유당 이승만과 대결, 유세 중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어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난, 일세의 큰 인물이다.
다산은 15세에 꽃가마 타고 온 새색시 아내 홍씨와 결혼한 날을 기념하는 회혼식에 숨을 거두었다.
다산은 이익을 조종(祖宗)으로 하는 성호학파와 유득공,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의 북학파의 폭 넓은 주장을 '실사구시라는’ 자기의 철학 속에 용해(溶解)시켜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인 다산학을 완성했다.
다산은 조선조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며, 예술(藝術)과 다도(茶道)의 향기가 짙은 풍류객(風流客)이고, 선각자, 개혁 사상가, 진보적인 학자, 민족의 거인(巨人)이요,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추앙되고 있다.
인터넷 자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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