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제의례·제문

차례라는 설제사 말은 일본말이다.

야촌(1) 2007. 3. 24. 21:40

■ 설 제사에 대하여...

 

1. 설날 세배는 고려시대 풍속이었다.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버이에게 세배를 올리고 아침 밥을 먹는 것이 고려시대의 풍속이며 그 당시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高麗士人耘谷天錫所作庚午元正詩이다.

 

   鷄鳴起坐整衣襟, 星頭欄干曉霧深.

   (닭 울음소리에 깨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곱게 다듬어 입었더니, 별빛이 난간에 들어와 안개가 깊도다)

 

   時有兒孫來再拜, 油然發動壯年心.

   (그때 자식·손자들이 와서 세배를 하니, 어른스러워지는 마음이 저절로 갖추어 지더라)

 

2. '설날제사'는 고종 33년 병신년(1896년)에 오늘날 경북 성주군의 수촌리(樹村里)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

      한다. 그 이름이 '원조절사(元朝節祀)'로 되어서 老石 呂九淵(1865∼1938)의 문집인 『老石集二』卷三十

      三 「朝鮮人之祭其行」에 「元朝節祀之始行」이라는 글귀가 있다.

 

    歲拜後行祭, 其儀則誓祭稱之曰元朝節祀.

    (세배를 한 후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모양이 맹세하는 것인데 그것을 일컬어 원조 절사라 한다)

 

    高宗三十三年, 丙申元朝, 吾家行歲拜後, 行祭.

    (고종 삼십 삼년 병신년 설날 아침, 우리 집에서는 세배를 한 후에 제사를 지냈다)

 

    其儀則誓祭也. 四代合說焉. 祝無而一獻焉.

    (그 모양이 다짐을 하는 제사였다. 4대를 합설을 하는 것이다. 축이 없으니 술을 한 잔만 올렸다)

 

    男女共以爲同時. 行上拜焉. 男子行再拜, 女子行四拜焉. 矢之曰吾家古守陰曆.

    (남녀가 동시에 지낸다. 남자는 재배를 하고, 여자는 4배를 했다.

    다짐하기를 우리 집은 음력을 굳게 지킬 것이라는 것이었다)

 

    是, 朝鮮人之行, 其元朝節祀之始也.

    (이것이 조선사람이 행하는 설날 아침 제사의 처음이었다)

 

    여기서 『其儀則誓祭也』에 눈을 여겼다. '다짐하는 제사'라는 말에 아주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설날 아침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윗 어른들께 세배를 마치고 가족과 문중의 화목과 번영을 조상 앞에서 맹세하

    는 것이 바로 서제(誓祭)라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4대를 합설하였으며, 축문도 쓰지 않고 단잔의 술을 올리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실국시대에 와서는 총독부의 '단발령'과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겠다고 조상 앞에 맹세를 하는 서제

    (誓祭)로 된 것이다.

 

    실국시대에 조선총독부에 항거한 우리사대부가의 대 반란이 바로 '설날제사'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이 '설날 차례'라고 한다. 엉터리 같은 소리다.

 

    '차례(茶禮)는 일본 말이다.

    다(茶)를 일본에서는 '차'로 말하고 '우리겨레'는 옛부터 '다'라고 발음했다.

    그래서 '궁중다례'의 '다례(茶禮)'란 말이 있었고, '다도(茶道)' '다기(茶器)'에 이어서 훗날에 '다방'이 생기게 된

    것이다. '다례(茶禮)'라는 말이 조선조 태종실록에 나온다. 중국의 사신을 대접하는 것을 '다례'라 했다.

 

    고종 32년 을미년(1895)에 민비가 왜로 들에게 시해를 당했다. 시해를 당할 때의 직첩이 왕비였다. 명성황후는

    훗날에 붙여진 것이다. 시해를 당한 민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여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빈소가 궁궐에 오래도

    머물렀다.

    고종임금은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자주 지내었는데 그 제사를 임금이 『다례제(茶禮祭)』라 했다.

 

    이것을 총독부에서 왕실의 '궁중다례'와 맞먹는 가정의 의식이라 하여 '설날 차례'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우리의

    궁중문화를 낮추어 버렸다. 이후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설'과 '추석'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 것이다.

     '다도(茶道)'를 '차도'라고 하며 '설록다'를 '설록차'라고 한다.

 

    실국시대에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부왜인들이 이 땅에서 학자 노릇을 하면서 모든것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버

    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구광역시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에 경주 최씨의 집성촌이 있고 거기에 『다천정(茶川

    亭)』이 있으며, 고령군에 『다산면(茶山面)』이 있다.

 

    또한 정약용 선생의 호(號) 다산(茶山)을 '차산'으로 발음하는 미친 놈은 우리 땅에 없다. 이는 광복 후 초등, 중

    등, 고등학교 교과서에「설날제사」를「차례」라고 적고 괄호를 만들어 그 속에 '다례(茶禮)'라고 적고 나서

    이다. 여기에는 정치인들도 가세를 했으니 나라의 차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아주 큰 과오를 저지르고 만것이

    다

 

3. 설날 아침제사가 서제(誓祭)인 '다짐제사'라는 것을 조선총독부가 알아 차리고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일본설인 양력설을 장려하고 우리의 설인 음력설을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면 조선총독부의 음력 설 금지령이 내려진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의 문헌으로 비추어 볼 때에 대충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가. 총독부령을 버티면서 숨어서 우리 설을 지낸 집이 있다.

   나. 총독부령을 거역하니 집안에 있는 '누룩'을 조사해서 벌금을 내라고 하니 괴롭다.

       그렇지만 왜놈의 설을 지 내지 않겠다.

   다. 왜놈의 설이지만 그것이라도....

 

4. 우리의 고유명절인 『설』은 정확히 36년간 탄압을 당했다.

    조선총독부가 1939년 기묘년 설부터 광복 되던 해까지 6년 간을 탄압했고, 제1공화국 정권이 12년, 제3

   공화국 정권이 18년간 탄압하여 도합 36년의 긴 세월동안을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우리겨레의 전통 미풍양식을 고수해온 여러 문중과 곧은 뜻을 가진 올바른 학자들의 간곡한 소청에

   힘입어, 제5공화국 정권 시절인 1986년 정월에 『민속의 날』로 되어서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비록 『설날』이라는 본디의 이름은 찾지는 못했으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6공화국 정권시절에 방랑생활을 하

   던 『설날』이 돌아왔다.

 

   『설날』을 앞뒤로 하여 3일간의 공휴일이 법적 효력으로 이룩되었고, 1999년 1월 1일 하루만 공휴일로 정한다

     는 발표가 나왔다. 김대중 정권시절이었다.

 

   1998년 12월 1일 국무회의에서 숱한 진통을 겪다가 결국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양력 1월 1일은 신

   정이되어서 관청에서 시무식만 하는 쪽으로 되었다.

 

   양력 1월 1일은「설」로서의 자리를 잃게된 것이다. 그래서 양력 1월을 그냥 1월이라 하고 1월 1일을 신정이라

   고만 한

 

   그러나 음력 1월은『정월』이라 하고 음력 1월 1일을『설』이라고 한다.

   실국 시대에 왜로가 우리의 겨레정신 탄압을 목표로 없엔『설날』이 36년을 떠돌아다니고 숨어서 지내다가, 스

   무 해 전인 1986년부터 다시 그 이름을 회복하고, 뜻을 같이 하는 학계와 사계 그리고 정계의 노력으로 올바른

   자리로 돌아와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5.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라는 책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설날』에 길들어져 있다.

   『東國歲時記』라는 책은 실국시대였던 1911년 朝鮮光文會라는 출판사가 출판했던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세시풍을 기록한 책이고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崔大林이라는 사람이다. 그 번역자의 말을 빌리면 소장처가 고려대학교 도서관이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책이 이상스러운 것은

 

   가. 서문의 글이 조선의 서법이나 틀에 맞지 않는다.

   나. 본문 내용의 구성과 글의 틀이 조선 글이 아니다.

   다. 글에 쓰이는 낱 말과 단어가 일본글이다.

   라. 결국『東國歲時記』는 일본의 힘에 의한 우리의 풍습을 바꾸기 위한 僞書(위서)라고 본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이「李子有」로 되어 있고, 그 서문에 의하면 지은이가「도애 홍우(陶厓 洪友」라고 했

     다. 조선에는「李子有」란 이름을 가진 자가 없다. 「子」라는 글자가 '이름'이 아닌 '자(字)'에만 사용이 되는

     데 '자(字)'에도「子有」란 성립이 안되기 때문에 쓸 수가 없다.

 

     통상「子正」「子健」「子守」「子强」등을 사용하여「바르게」「건강하게」「보배를 지키게」「굳세

     게」의 뜻을 부여하지만 「子有」란 뜻이 없다. 굳이 만들려면「가지고 가게」라는 뜻인데 이것은 말이 안 된

     다. 또한 이름에 사용하면「李子」되어 더욱 망측스럽다.

 

     그러므로 서문을 쓴 이는 실제로 없는 거짓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서문을 쓴「李子有」가 지은이를「陶厓 洪

     友」라 하여「도애」란 호를 가진「홍」씨 성의 친구라 했다.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 호이며 이름자이다.

 

     또한 그 책의 구성내용이나 수록된 단어를 보면 더욱 우리 선조들이 엮은 서책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대표되는 몇 가지만 간추려 보았다. 먼저「見者以爲道得該備之」라는 글이 조선 선비의 글이 아니라

     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는 「見」字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余及受而卒業」에서「卒業」이 조선 선비

     의 글이 아니라 일본말이라는 것이다.

 

    「儼然爲一統文字」에서는「一統」이란 말의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鳴呼, 洪君之少日, 所期者, 自謂

       何如」에서「洪君」이 잘못되었다. 앞에서는 「洪友」라고 해놓고 뒤에서는「洪君」이라고 했다. 벗을

    「君」으로 부르는 것이 우리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自元月訖臘月, 凡爲目者, 二十有三」이라는 글이 일본사람의 글이 방식이다. 조선 선비가 썼으면「自正

       月, 至十二月, 凡爲目者, 每有二十三事」로 될 것이었다. 이렇듯 온통 일본의 글 방식과 낯 설은 글 방식이

       니 결국 지은이가 없는 책이 되는 것이다. 지은이가 없어서 불분명하거나 일본사람이 쓴 僞書일 수밖에 없다.

 

     아니 일본사람이 쓴 위서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東國歲時記』는 僞書이다. 그런데 이 僞書

     를 두고 우리의 세시풍습이니, 전통문화의 결집이라고 하는 꼴이 한심스럽다

 

6. 이러한 많은 사례로 위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우리의 설날은 다음과 같은 유래와 험한 여정이 있었음을 수가

     있다.

 

   가. 우리 설날은『고려시대』때부터 유래가 되었다. 당시에는 웃어른들에게『세배』만 하였지『제사』는 지내

         지 았다.

 

   나.『설날제사』는 조선 말기인 『고종 33년(병신:1896)』에 가족과 문중의 화목 및 번영을 목적으로 조상 앞

          에 맹세한 것을 시작으로 생기게 되었으며, 실국시대에는 조선총독부가 우리겨레 문화와 겨레 혼을 빼

          려는 정책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도 널리 이용되어 12년 간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다. 1945년 광복이 되어 3년간은 다시 우리 겨레의 고유명절로 자리를 잡는가 했는데 다시 제1공화국 정부

          탄압으로 12년 동안을 떠돌아야만 했다.

 

        제1공화국 정부는 조선 설인『음력설』을『구정』이라 하면서 "야만인의 설"이라 했으며, 반면 일본인의 설

        인 『양력설』을『신정』이라 하고 "선진국의 과학설"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제1공화국 정부는 당시 모든 문물과 문화를 지긋 지긋한 일본식으로 몰아붙였다.

       그 진위에 대해서는 현재 많은 학자들이 제1공화국 정부의 진실성(친일)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앞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면서 숙제이기도 하다.

 

   라. 제3공화국 정부 때에도 우리의 설은 18년간이나 탄압을 당했다.

      가난을 벗긴 정부로서 우리겨레에게 남긴 점이 많으나 역시 우리의 설은 제1공화국 때와 마찬가지로

      『이과세』라는 벽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마. 제5공화국에 와서 우리의 설이『민속의 날』로 되어서 실로 36년 만에 숨통을 열었다.

       『민속의 날』로 다시 지정되면서 그 하루를 공휴일로 하게 된 것이다.

 

   바. 제6공화국에 와서『설날』이라는 정확한 제 이름을 찾았고, 앞뒤 하루씩을 더해서 3일간의 법정명절 공휴

         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양력 1월 1일과 2일을 신정으로 하여 공휴일로 하고 있었다.

 

   사. 김영삼 문민정권에 시작된 치욕의 IMF 물꼬는 여지없이 김대중 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면서 나라 경제에

         변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1998년 2월 25일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학계와 사계의 청원 『이

        과세』라경제상황으로 신정을 단 하루만 공휴일로 정하는 안이 그 해 12월 2일에 국무회의에결정 되

        었다.

 

       이제 양력 1월 1일은 관청에서만『시무식』을 갖도록 되었으며 『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날이 된 것

       이다.

 

   아. 실국시대에 목숨 부지의 한 방편으로 일본을 추종하거나 왜로의 앞잡이를 하던 자들이 일본인의 위서(僞書)

         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라는 서책으로 우리겨레의 미풍양속 및 전통 예절을 뒤엎으려 하였다.

 

       지금도 우스꽝스러운『東國歲時記』란 책을 가끔 들먹이며 우리의 명절에 흠집을 내고 있다.

      『東國歲時記』라는 책은 우리 선조의 서책이 아님으로 이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일은『설날차례』라는 말을 빨리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말의 뿌리가 아주 잘못 되었으니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다례(茶禮)를『차례』로 말하는 것은 우리말이 아니며 일본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사(祭祀)를 『차

       례』로 하는 것이 더욱 안될 일이기 때문이다. 제사(祭祀)의 종류에는 몇 가지가 있다.

 

       돌아가신 날을 기리는『기제사』가 있고, 설날과 한식, 그리고 중구절(중양절)에 지내는 처사(處祀)가 있다.

       처사(處祀)를 다시 절사(節祀)와 년시제(年時祭)로 나누기도 하는데 문제는 모두『제사』의 종류라는

       이다.

 

       그러므로 다례(茶禮)가, 되었던 "차례"가 되었던『궁중다레』에서 나온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

 

출처 : 명문경주이씨카페 이민희(중하)

 

        아직 연구  검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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