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야촌(1) 2007. 3. 15. 23:11

■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1.유방과 항우의 등장

 

유방(劉邦)/한나라 초대 황제 
(BC256~BC195, 재위 BC206~BC195)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봉기는 일시적으로 좌절 되었지만, 그로부터 반년 후에는 다시 열화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이 투쟁의 지도권은 이미 농민의 지도자로 부터 지주 계급과 6국의 옛 귀족 세력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이다.

 

유방의 자는 계(季)이고, 패(沛, 지금의 강소성 패현) 출신으로 진나라때 사수(泗水)의 정장(치안 담당하는 하급 관리)을 지냈다. 그는 패에서 군사를 일으켜 점차 병력을 집결시킨 후 망탕산에 웅거하였다. 유방이 봉기 한것은 진승이 7월에 대택향에서 봉기한 두달 후인 9월이었다.

 

유방의 인상은 높은코에 용의 얼굴이고 왼쪽 다리에는 72개의 사마귀가 있었으며 사람을 아끼고 주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활달 하였으며 큰 도량을 지니고 있어 조그마한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않았다 한다. 유방은 휘하에 소하. 조참. 번쾌 등 한제국 건국 공신을 거느렸고 패현의 자제 3천명을 기반으로 하여 제후들의 세력과 호응하게 되었다.

 

유방이 패에서 군사를 일으킬 무렵 절강성의 회계에서는 아버지 항연을 진나라 장수 왕전에게 잃은 항량(項梁)이 진나라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씻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항량은 초나라 명장 항연의 아들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이 항연의 죽음을 믿지 않으려 했다. 진승과 오광이 맨 먼저 봉기할 때 초나라 사람들의 이러한 영웅 불사설을 이용해서 항연의 이름을 사칭할 정도로 항연을 초나라 사람들에게 추앙되고 있었다.

 

 

2.항우는 항량의 조카이다.

 

항우(項羽)/BC 232~BC 202)
진나라 말기의 장수이며 진을 멸망시킨 인물

 

항우의 이름은 적(籍)이고 자가 우인데 항적보다는 항우로 불린다. 원래 하상(下相, 강소성 숙천현) 사람이었는데 그의 숙부 항량과 함께 회계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장 8척의 대장부로 힘은 능히 산을 뽑을 만하고 겹으로 된 눈동자를 가진 희대의 장사이었다. 

 

소년 시절에 학문을 가르쳤으나 학문도 싫어하고 검술을 가르쳤으나 검술 또한 싫어하였다. 항량이 크게 실망하여 노여워하자 항우가 말하기를 "학문이란 성명을 기록할 정도면 족하고, 검술은 한 사람의 적밖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이 따위는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만인의 적을 상대하여 싸우는 기술을 배우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다. 항량은 그의 기백을 기특히 여겨 그때부터 병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유방과 항우는 연령적으로 많은 차가 있었다. 

 

시황제가 죽던 해 항우의 나이는 22세이고 유방은 37세였다. 일설에는 46세라는 설도 있다. 그 출신에 있어서도 항우는 대대로 초나라에서 장군을 지낸 명문 출신이었고, 유방은 그의 양친의 이름이 한왕조 시대의 기록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름 없는 서민 출신이었다.

 

두 사람이 군사를 일으킬 때도 유방은 행정 구역상으로도 가장 하급 단위인 패현에서 일어나 패현의 자제 3천명을 거느렸고, 항량. 항우는 여러 현을 지배하는 군에서 일어나 정병 8천명을 거느렸다. 자제와 정병은 그 질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자제란 그저 나이가 젊을 뿐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정병이란 여러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여 철저한 훈련을 받은 군사를 말하는 것이다.

 

 

3. 달라지는 천하의 형세

 

항우는 스스로 서초 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여 양.초의 땅 구군(九郡)을 통치하고 팽성(彭城)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진의 토벌에 공로가 있었던 여러 장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주고 왕으로 봉하였다. 이때 왕으로 봉함을 받은 제후는 진의 항장 장한. 장사 혼. 동예를 비롯하여 경포. 한광 등 18명에 이르렀다.

 

항우는 진나라를 평정하자 진나라 토벌에 공이 있는 자에게 영지를 주어 제후로 삼는 분봉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분봉제는 전국 시대의 혼란과 진나라의 악정에 시달려 온 백성들이 바라던 평화와 통일의 실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천하를 통일하기 전의 군웅 할거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위에 항왕은 영지를 주어 제후를 봉하는데 있어서도 논공 행상이 그 공평성을 잃어 자기 기분에 맞는 사람에게는 좋은 따을 주어 왕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봉작을 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 여러 장수 가운데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자가 많았다.

 

이런 결과는 마침내 제후들이 각기 영지로 돌아간 후 한달 남짓해서 산동 지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모처럼 평화를 갈망하던 중원 천지가 다시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4.유방과 항우의 마지막 싸움

 

항우군은 군사적으로 우세했지만 동정 서벌 왔다갔다 하느라 완전히 지쳐버렸고 더구나 안정된 후방 기지가 없어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유방은 군사적으로는 뒤졌지만 군사들은 휴식을 취하였고 군량도 풍족하였다.

 

장기적인 소모전 끝에 항우군은 점저 피폐해지고 전재의 주도권은 점차 한군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항우도 이런 불리한 정세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럴 때 제왕 한신이 군사를 진격시켜 초나라를 공격하니 항우는 크게 근심하고 있었다.

 

유리한 입장에 선 유방은 이런 기회에 인질로 잡혀 있는 태공과 여후를 찾아로려 하였다. 한왕은 육가를 보내어 태공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처음 항우는 듣지 않았다. 한왕은 다시 후공을 사자로 보내어 강화교섭을 진행시켰다.

 

강화의 조건으로는 홍구라는 강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은 한나라, 동쪽은 초나라로 정하고 양군은 각각 동서로 철수하기로 하며 인질로 잡고 있는 한와의 가족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다.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항우는 이 조건을 수락하였다. 

 

B.C. 203년 9월 양군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인질을 돌려보냈다. 강화의 조건에 따라 항우는 무장을 풀고 동쪽으로 향하였다. 유방도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량과 진평이 한왕에게 '초나라는 군사가 피로하고 군량이 다 떨어졌으니 이것은 하늘이 초나라를 망하게 하는 때'라면서 공격하자고 진언한다.

 

한왕은 이들의 말을 들어 즉시 군사를 동쪽으로 돌려 양하 남쪽까지 항우군을 추격하다가 일단 멈추고 한신과 팽월에게 사자를 보내어 각각 그들의 군사를 이끌고 고을(固陵)에서 합류하여 초나라를 치라고 하였다.

 

항우는 해하(垓下, 안휘성 영벽현)에 진을 치고 한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항우의 군사는 10만이었다. 천하를 놓고 마지막 승부를 가리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순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신은 자기가 가진 모든 병력과 제후들의 군사를 모두 합쳐 30만에 이르는 군대를 진두 지휘하였다. 한군은 여러 겹으로 해하의 항우 진지를 포위하였다. 성내의 군량은 거의 바닥이 나고 사기는 떨어져 탈주병이 속출하였다.

 

한신은 해하에 모여든 여러 군사 가운데서 초나라 출신 군사들을 골라 일반 군사들에게 초가(楚歌)를 가르치게 하였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사면에서 자기 고향 노래만 들려 온다는 말로 자기를 도와야 할 고향 군사들이 모두 한군에 가담하여 고립 무원의 지경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

 

한신은 겹겹으로 에워싼 전군에게 초가를 부르게 하였다. 역발산 기개세의 천하 장사 항우도 사면에서 들려오는 고향의 노래를 듣자 점점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는 절박감이 머리를 어지렵혔다. 야음을 타고 점점 크게 들려오는 초가에 귀를 기울이던 항우는 크게 놀라며

 

"아, 한나라는 초의 땅을 이미 다 차지하였는가?

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가!"

 

항우는 밤중에 일어나 장막 속에서 술잔을 손에 들었다. 우희가 그 잔에 술을 따랐다. 우희는 항우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줄곧 항우를 따라다니며 시중들던 항우의 애첩이었다. 우희는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 

 

그녀도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항우의 몸에 돌자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회와 비분 강개한 감정을 노래에 담아 읊었다.

힘은 능히 산을 뽑고도 남음이 있고

기백은 능히 천하를 덮었었노라!

 

때가 이롭지 못하니 오추마야 너마저 달리지 않는구나!

오추마야 너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구나!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쩐단 말이냐!

 

[참고]

오추마는 항우가 타고 다니던 애마의 이름이다. 검푸른 털에 흰 털이 섞이고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였다 한다.

항우는 이 노래를 푸념처럼 읊조리며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었고 감히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뒤 우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정사에는 아무 언급이 없고 다만 [초한춘추(楚漢春秋)]에 우희의 화답이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한병은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했고

사면에 들리는 건 초나라 노래 소리뿐

대왕의 기개가 다하는 날

첩첩 어찌 삶을 바라리오.

 

우희의 최후의 장면에 대해서 후세 문인들은 여러 가지 각색을 가했다. 우희는 항우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항우의 검을 청해 받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고도 한다. 또 항우가 자기로 인하여 번뇌할까 두려워 자결했다고도 한다. 혹은 항우가 우희에 대한 번뇌를 끊기 위해 우희의 목을 쳤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그 후 우희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가냘픈 풀이 싹터서 자라니 후세 사람들은 이 풀을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항우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렸다. 날이 셀 무렵에야 항우가 탈출한 것을 안 한군은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항우를 추격하게 하였다. 남으로 달아나던 항우가 회수를 건널 무렵에는 8백기 가운데 겨우 백여기가 따를 뿐이었다. 

 

도중에서 모두 탈락해 버린 것이다. 항우가 동성(東城, 구강현)에 이르러 따르는 자를 점고해 보니 겨우 28기에 지나지 않았다. 항우는 말을 멈추고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5천의 기병이 바짝 쫓아오고 있는데 우리는 겨우 28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 항우는 28기의 장정을 향해 말하였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8년이 되었다.

 

그동안 70여회의 싸움에서 한번도 패해 본 일이 없었는데 지금 이같은 곤경에 처했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치게 하려는 것이지 결코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다. 나는 이제 죽음을 각오했다. 

 

마지막으로 한의 포위를 무너뜨리고 장수를 베고 기를 쓰러뜨려 3승을 거두어 그대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치게 하려는 것이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보여주리라."하고 한나라 장수 한 사람과 도위 한 사람을 베어 죽이고 수백명의 한군을 죽이니 그의 부하들은 모두 감탄하며 땅에 엎드렸다. 그러나 결국 항우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항우의 몸은 다섯 동강이로 나누어졌다. 목을 차지한 왕예는 두연후에 봉해지고, 여마동은 중수후, 양희는 적천후, 양무는 오방후, 여승은 영양후로 봉해졌다. 항우가 죽음으로써 4년여에 걸친 한.초전은 그 막을 내렸다. 진승.오광이 봉기한 이래 진나라 타도의 수훈감은 항우이었으나 마지막 승리의 열매를 거둔 것은 한 왕 유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