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중국은 원래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야촌(1) 2008. 1. 21. 05:12

■ 중국은 원래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도량형은 그렇다 치고 문자를 통일한다? 당연하다. 지금도 진 이전의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해도 가장 난감한 것 가운데 하나가 쓰이는 한자가 제각각 다 다르다는 것이다. 진과 제가 다르고, 연과 초가 다르고, 조와 초가 또 다르고, 사실 문자만이 아니라 언어도 문화도 제각각 달랐다.

 

또한 사람들 역시 서로 진나라 사람, 연나라 사람, 초나라 사람이라 여겼지 중국인이라거나 그렇게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이 없었다.최소한 진나라 이전까지 중국은 하나의 문명도 하나의 민족도 아니었다.

 

사기에 보면 주나라의 소왕이 남쪽으로 사냥을 나섰다 돌아오지 못하고 강 위에서 죽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 나라의 왕이 돌아오지 못하고 강 위에서 심지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상세한 내용이 정작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 씨 춘추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단편적인 정황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또 춘추시대 제환공은 규구에서 회맹하여 맹주로 선출된 뒤 초나라를 정벌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분을 내세운다. 

 

하나는 주 왕실이 있는데 스스로 왕을 칭하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소왕이 남쪽으로 떠났다 돌아오지 못한 죄를 묻는다고 하는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원래 초는 주의 제후국이 아니었다. 

 

제환공이 이끄는 제후의 연합군을 맞서 싸울 때도 독자적으로 70여 거수국을 거느리고 그들을 맞았거니와,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제후들로부터도 남만南蠻이라 하여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다. 

 

진을 제외하고는 땅도 가장 넓고 물자도 가장 풍부했지만 정작 중원의 제후들로부터는 같은 무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다. 다시 말해 원래 초는 주와 별개의 나라로서 이미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었고, 소왕이 사냥을 떠났다 돌아오지 못했다 하는 것도 주의 팽창정책으로 말미암아 원정을 떠났다 패하여 전사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라고 하는 나라는 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따라서 황하유역에서 발달한 주문명과도 아무런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발달한 별개의 문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주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그리고 주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제후들이 난립하면서 은근슬쩍 그러한 제후들 사이로 끼어들어 주라고 하는 천하를 다투게 되면서 춘추시대 열국의 하나로서 초장왕이 패자로 인정받았고 전국시대에는 일곱 강대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원래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중국문명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전국을 통일한 진秦 역시 중원의 제후들로부터 서융西戎이라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진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원래 주의 시조인 희시가 봉해졌던 지역으로 주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주의 유왕이 포사의 환심을 사려 봉화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 견융의 침입으로 호경이 불타버리고 평왕이 낙읍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로는 호경을 중심으로 한 관중 일대를 진이 차지하게 되었다. 더구나 진의 군주들은 대대로 주왕실과 같은 희씨성을 쓰고 있었으니 서융이라 하는 것은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원래 주라고 하는 나라는 하나의 문화, 하나의 언어를 갖는 민족국가가 아니라 여러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갖는 다양한 무리들이 봉건제를 통해 느슨하게 묶인 연맹체 국가였다. 또한 주가 은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주왕실과 인척관계에 있거나 공이 컸던 이들에게 땅을 나누어 이른바 봉토건국을 하니, 송을 비롯한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대개 그 제후들은 주왕실의 인척이거나 공신의 후손들이었다.

 

따라서 진을 지배하는 것이 주왕실과 같은 성을 쓰는 일족이고 그 피지배자가 이민족인 서융이라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더구나 관중이라고 하는 지역은 견융이 호경을 직접 공격하여 함락시킨 데서도 볼 수 있듯 원래 이민족이 들끓는 곳이었으니 설사 처음에는 융족과 별 상관이 없었어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이 소왕의 뒤를 이은 목왕이 소왕이 죽은 남쪽을 포기하고 주로 서북 방면으로 원정을 하여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곤륜에서 서왕모를 만났다고 하는 부분이다. 기록은 서왕모가 살고 있던 곤륜을 신성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초원의 길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하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여러 부족과 나라들을 지칭한다 할 수 있겠다.

 

목왕은 여기서 서왕모와 상당히 깊은 우정을 나누는데, 특히 서왕모가 여성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남성인 목왕과 이들 서방의 세력들과의 어떠한 긴밀한 관계가 이루졌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서방의 세력을 융이라 할 때 희씨 성을 쓰는 이들이 그들의 군주로 있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관계의 결과일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서융이라 불리우며 멸시를 당하던 - 심지어 제후들의 회맹에조차 끼워주지 않고 있다. - 진이 겨우 중원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은 한참 뒤 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부터였다.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와서야, 아니 그러고서도 진을 중원의 여러 제후의 하나로서 - 남만이라 불리우던 초마저도 인정받고 있던 마당에....

 

인정받지 못한 채 여전히 오랑캐라 불리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로 그 오랑캐에 의해 지금의 중국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중국의 사료에서는 춘추시대 후반 초를 공격하고 제를 위협하여 패자로서 위세를 떨쳤던 오의 선조를 두고 주무왕의 아버지인 계력의 두 형 태백과 우중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당대의 사서를 보거나, 오월의 옛 유적과 유물을 보아도 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문화와 오나라의 그것은 전혀 일치하는 것이 없다. 당장 맨발에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오랑캐라며 멸시하는 기록이 한둘이 아닌데, 설마 태백과 우중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 한다면 어느 정도 문화적인 연관성은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더구나 주가 일어난 근거지는 관중 - 즉 지금의 섬서성 일대다. 오월은 지금의 절강성과 강소성 부근이다. 과연 그 시대 그 거리를 이동해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더구나 주의 지배력이 오월의 경계에 닿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데.

 

실제 오가 월에 멸망하고, 월이 다시 초에 멸망하고 나서 이루던 민족들은 다시 남하해서 자신만의 문명을 세우는데 삼국지에도 나오는 산월이 바로 이들이다. 한과 그 뒤를 이은 진과 남조와의 투쟁 끝에 밀리로 밀려 광동을 지나 운남을 지나 지금의 인도차이나 반도로 남하해 갔으니 베트남이 바로 그들의 후손이다. 

 

말하자면 원래 강남은 베트남 사람들의 땅이었고, 오월 역시 중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베트남인들의 나라로서 중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민족을 당시까지 소급해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이겠지만.

 

또 주의 동쪽으로는 송과 제, 노를 동이라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 동이는 훗날 중국의 세계가 확장되면서 부르게 된 동이와는 전혀 다른 동이다. 당시 주나라 사람들의 세계관이라는 것이 황하 유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그보다 더 멀리 요동이나 만주, 한반도는 그들의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밖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동쪽의 이민족이라는 것은 황하 동쪽 산동과 하북 일대의 다른 문화를 일컫는 것이었고, 이들을 주의 팽창 과정에서 복속시키면서 제와 노, 연 등을 봉토건국함으로써 이들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중원의 문명이 확장되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이 보유하고 있던 고유한 문명도 점차 흡수되어 사라진다. 요동과 만주 한반도의 이민족을 다시 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로, 춘추시대까지도 연을 공격하는 동북방의 이민족을 두고 융戎이나 호胡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음을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오랑캐로조차 불리운 적이 없던 촉이 있다. 초한지에서 유방이 들어가 세력을 키우고, 삼국지에서 유비가 들어가 촉한을 세웠던 촉은 원래 중국과는 별개의 또다른 세계였다. 아예 오랑캐로서 불리워진 적조차 없을 정도로 철저히 격리되어 있던 이곳은 전국시대 말기 진의 공격에 의해 진에 편입되게 된다.

 

하지만 그로부터도 촉은 거의 독립된 지역으로서 중원에 난세가 찾아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는 그런 곳이 되었다. 워낙 외진 곳이라 그 가운데 정작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이는 한고조 유방 단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처럼 중국문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에조차 중국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문명이 아니었다. 

 

은허를 건설한 은민족이 송에 봉해져 머물고 있었고, 지금의 섬서에서 이동해 온 주가 호경과 낙읍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 동쪽에는 동이의 연과 노와 제가, 그 서쪽으로는 서융이라고 불리우던 진이, 남쪽으로는 남만이라 일컬어지던 초가 70여 거수국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동쪽에 다시 월족의 오와 월이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보유한 채 번성하고 있었다. 

 

중국문명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여러 문명들이 진의 시황제에 의해 통일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문명으로서 나타나게 된 문명이었다. 중국인을 지금도 한족이라 부르는 것은 그렇게 진이 천하를 통일하고 언어와 문자와 사상의 통일을 꾀한 이후, 초패왕 항우를 패사시키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 한고조 유방에 의해 하나의 왕조 아래 400년을 이어지면서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만들어진 때문이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초나라 사람이고, 진나라 사람이고, 제나라 사람이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한이라고 하는 하나의 왕조에 의해 한나라 사람이라고 하는 동일한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다. 일부 특권계급에 한정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이후 중국문명의 발전에 있어 큰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중국의 시련 - 혹은 발전은 그로부터가 시작이었다. 한이 멸망하고 제후들이 난립하다 사마씨의 서진이 다시 천하를 통일했다가 내분으로 지배력을 잃은 후 흉노, 저, 갈, 선비, 강의 이민족이 침입해 옴으로써 중국의 문명은 큰 변화를 겪는다. 

 

기록으로야 이들 이민족이 한민족에 동화되어 소멸했다고 하지만, 정작 문명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 이민족이 침입해 오기 이전과 이후의 중국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한자 발음조차 달라지고, 문화도 달라지고, 생활습관도 달라진다. 

 

당장 수를 대신해 세워진 당만 하더라도 그 중심세력은 어디까지나 한족이었건만 선비족이 아닌가 오해할 정도로 그 습관이나 생활양식들은 북방민족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을 정도다.

 

당은 또한 진정한 제국이었다. 자신의 문화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군사원정을 통해 영토를 넓힌 만큼이나 탐욕스러울 정도로 다른 문명의 문화도 받아들였다. 중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이 한나라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면 중국인의 문화적 전통은 바로 이 당에서 비롯되었다 할 정도다. 

 

그리고 오대 십국을 지나 북송에 이르면서 당이 받아들여 취합한 여러 이질적인 문화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녹여내게 된다. 당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비로소 중국적이라 할만한 문화적인 전통이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 이때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몽골의 침입이다.

 

원이 중국을 지배한 것은 고작 100년 남짓이다. 하지만 그 전 금의 지배기간까지 포함하면 중국, 특히 강북은 거의 200년 넘게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인은 강북과 강남의 기질이며 문화며 언어며 다 틀리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강북의 중국인을 두고 오랑캐의 그것에 물든 반쪽 중국인이라며 폄하하기도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북쪽에서 열심히 밀리는 사이, 남쪽에서도 열심히 다른 이민족을 쫓아내고 복속시키면서 강남에서도 문화와 민족의 혼합이 일어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북쪽은 북방민족에 의해 강제로 민족적 문화적 혼혈이 이루어졌다면, 강남에서는 한족 스스로에 의해 민족과 문화의 현혈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더구나 원의 지배는 그때까지의 중국문명 자체를 거의 파괴하고 있으니. 이때 당대에 완성된 궁중음악이 중국에서는 완전히 사라져 지금 우리나라에서만 남아 연주되고 있는 상태다.

 

200년간의 이민족 지배가 끝나고 다시 주원장에 의해 한족의 명나라가 들어섰다. 워낙 가혹했던 원의 지배였기에 명은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이 무척 강했고, 그래서 이전의 중국을 지배한 다른 정권들과는 달리 이민족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그러면서 이민족과 구분되는 중화라고 하는 것을 강조했으니, 한민족의 한은 한나라에서 시작되었고, 중화문명의 뿌리는 송대에 완성되었어도, 중화민족이라 할 만한 어떠한 것이 나타난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그래봐야 어디서 이런 또라이들만 튀어나왔을까 싶은 막장 황제들로 인해 200년 남짓 이어지고 다시 만주족의 청에 모든 것을 넘겨주게 되지만. 드디어 마지막 청이다. 청은 현대의 중국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왕조였다. 

 

당장 지금 중국의 국경선 자체가 이때 청에 의해 거의 완성된 것이거니와 중국 무협영화등을 통해 보는 중국의 전통 복식이나 문화 역시 청대에 대부분 만들어졌다. 

 

중국인 스스로 한족이라는 의식을 명확히 한 것도 청왕조 말기 만주족의 청왕조의 지배에 반발하면서부터였고, 그러면서도 중국인이 누리는 모든 전통문화라는 것도 역시 청에서 비롯된 것이니 정작 만주족의 청에 의해 지금 한족의 중국문명이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물론 마오쩌둥의 최대 삽질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남은 것이 없게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중국이란 하나의 민족이 아니었다. 하나의 문명도 아니었고, 하나의 문화도 아니었다. 

 

뿌리야 멀리 주나라부터 시작된다고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조차 온전히 주나라 문명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한나라 때 민족의 원류가 만들어진 뒤에도 오호십육국에 남북조시대에 가란이 하북을 차지하고, 금이 강북을 지배하고, 원이 다시 중국 전체를 지배하고, 청에 의해 또 한번 중국이라고 하는 세계가 만주족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지금의 중국은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중국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껏 중국을 거쳐간 모든 민족, 모든 문명, 모든 문화를 일컫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중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실 세계의 모든 문화가 그렇다. 

 

남태평양의 어느 섬처럼 고립되어 발전하지 않는 한 문화란 항상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군사적으로 침략을 당하기도 하고, 또 외교적으로 교류를 하기도 하면서, 무역으로 문화와 물자를 사고 팔고, 정책적으로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여 스스로의 변화를 꾀하면서 그렇게 발전한다.

 

어떠한 문화를, 어떠한 문명을, 어느 기점에서 그 단 하나로 단정짓는 것이야 말로 문화, 혹은 문명에 대해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중국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 모든 문명에 그것은 마찬가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전통은 중국보다 오히려 일본과 한국에 더 많이 남아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은 당나라의 그것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일본의 전통적인 관제며 복식들도 당의 그것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일본의 왕을 칭하는 천황이라는 호칭도 당에서 황제를 일컬어 부르던 호칭이었다.

 

한자 발음에 있어서도 일본의 그것은 북송대의 그것에 가깝고, 한국의 그것은 당대의 그것에 가까우니, 정작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민족의 영향을 받아 변질된 언어와 문자들 뿐이다. 조선이 말한 대로 중화는 중국이 아닌 조선에 있다고나 할까? 그래도 중국은 중국. 그것이 문명이고 문화다. 달리 중국이 아니라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인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뻘짓이라 비웃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고 이민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그렇게 다양한 문명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민족이 서로 공존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텐데도,그러한 모든 것을 정치적인 구호 하나로 모두 지워버리려 하고 있으니 어리석음도 이런 어리석음이 없고 천박함도 이런 천박함이 없다 하겠다.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하긴 그 좁은 머릿속이야 말로 지극히 중국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출처 : 쑹샤오핑중국노트 ㅣ 중국사이버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