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有仁 2

전주 향교 기문(全州鄕校記文)-서거정(徐居正)

사가집(四佳集) 제2권 기(記) /서거정(徐居正) 著 전주(全州)의 향교(鄕校)를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유학을 높이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었으니, 비록 궁벽진 시골일지라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하물며 전주는 우리 왕조의 시조가 살았던 땅으로서 남쪽 지역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그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곳이다. 고을의 젊은이들이 또한 대부분 대대로 학문하는 집안의 출신들로서 선행을 즐기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한 고을이 교화되어 아주 뛰어난 사람이 간혹 출현한다. 이것은 땅의 아름다운 기운이 모인 까닭이기도 하지만, 또한 모두 평소의 교육이 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주부의 학교는 예전에는 치소(治所) 안에..

이유인(李有仁)을 칭찬한 후미에 제하다-김종직

■이 이천을 칭찬한 유서의 후미에 제하다[題李利川褒美諭書後(제이이천포미유서후)] 내가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를 읽고서 한선제(漢宣帝)와 후한 장제(後漢章帝)의 백성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좋게 여겼다. 백성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지방관(地方官)을 대우한 것이 더욱 정성스러웠던 것이다. 유민(流民)들을 위로하여 돌아오게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관내후(關內侯)의 작(爵)을 하사받은 사람은 교동상(膠東相) 왕성(王成)이고, 이민(吏民)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사가 번거롭지 않다고 함으로써 천자(天子)의 정성스러운 조서(詔書)를 받은 사람은 양성령(襄城令) 유방(劉方)이었다. 그런데 뒤에 논하는 자가 비록 유민 8만여 구를 거짓으로 증가시킨 숫자라 하여 왕성을 책망하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