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이유인(李有仁)을 칭찬한 후미에 제하다-김종직

야촌(1) 2017. 8. 8. 03:53

■이 이천을 칭찬한 유서의 후미에 제하다[題李利川褒美諭書後(제이이천포미유서후)]

 

내가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를 읽고서 한선제(漢宣帝)와 후한 장제(後漢章帝)의 백성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좋게 여겼다. 백성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지방관(地方官)을 대우한 것이 더욱 정성스러웠던 것이다.

 

유민(流民)들을 위로하여 돌아오게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관내후(關內侯)의 작(爵)을 하사받은 사람은 교동상(膠東相) 왕성(王成)이고, 이민(吏民)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사가 번거롭지 않다고 함으로써 천자(天子)의 정성스러운 조서(詔書)를 받은 사람은 양성령(襄城令) 유방(劉方)이었다.

 

그런데 뒤에 논하는 자가 비록 유민 8만여 구를 거짓으로 증가시킨 숫자라 하여 왕성을 책망하였고, 장제가 비록 다른 특별한 재능은 없다는 것으로 유방을 낮게 보기는 하였으나, 선제와 장제의 용심(用心)만은 그 인자함이 성대했으니, 한대(漢代)에 순량(循良)한 관리들이 성대히 배출된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백세(百世) 후인 지금에도 또한 그런 사실이 있다. 나의 동년(同年) 친구인 계림(鷄林) 이군(李君)은 청렴하고 성근한 사람인데, 성명(聖明)한 주상을 만나서 낭서(郞署)와 시종(侍從)의 직을 모두 다 역임하고, 그 부절(符節)을 나눠 받아서 남천[南川 이천(利川)의 고호임]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양성령의 정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은 효험만 있고, 교동상의 유민의 숫자를 증가시킨 거짓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민(吏民)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사모함으로써 온 경내가 편안해지니, 감사(監司)의 고과(考課)에서 매양 기보(畿輔) 지방가운데 제일(第一)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우리전하(殿下)께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칭찬을 하고, 높은 자급(資級)을 올려주어 장복(章服)을 일신시키니, 부로(父老)들이 매우 기뻐하고 사방사람들이 솟구쳐 감동하였다.

 

아, 그 다른 사람들에게 권장되는 것이 또한 많지 않겠는가. 그러니 선제(宣帝)가 왕성에게 공로에 대한 포상을 내린 조서와 장제(章帝)가 유방에게 안정(安靜)한 관리라는 칭찬을 한 것만 간책(簡策) 속에서 오로지 아름다울 수 없겠고, 왕성과 유방의 순전(純全 완벽함을 뜻함)하지 못한 것이야 이군에 비해 훨씬 낮다고 하겠다.

 

군(君)의 이름은 유인(有仁)이고 자는 산수(山叟)인데, 익재(益齋 : 李齊賢의 號) 문충공(文忠公)의 먼 후손이다. 그런데 문충공의 손자인 이보림(李寶林)은 전조(前朝) 때에 누차 명군(名郡)을 다스리어 그 정적(政蹟)에 대한 거사비(去思碑)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눈을 환히 비추고 있으니, 군이 백성을 잘 다스린 것은 대체로 그의 가법(家法)이라 하겠다.

 

[원문]

僕讀兩漢書(복독량한서)。宣章二帝憂民之切也(위선장이제우민지절야)。其憂之也切(기우지야절)。故其所以待字牧之良者(고기소이대자목지량자)。尤拳拳焉(우권권언)。勞來流民不怠(로래류민불태)。而賜爵關內侯者(이사작관내후자)。膠東相王成也(교동상왕성야)。吏民同謂不煩(리민동위불번)。而勤天子詔書者(이근천자조서자)。襄城令劉方也(양성령류방야)。論者(론자)。雖以僞增八萬口而譙成(수이위증팔만구이초성)。雖以無他異能而少方(수이무타이능이소방)。然而二帝之用心(연이이제지용심)。其仁藹如也(기인애여야)。漢世循良之吏(한세순량지리)。蔚然輩出(울연배출)。豈非職此之由耶(기비직차지유야)。百世之下(백세지하)。亦有其事焉(역유기사언)。吾同年友鷄林李君(오동년우계림리군)。淸勤人也(청근인야)。遭遇聖明(조우성명)。郞署侍從(랑서시종)。皆所歷敭(개소력양)。其分符而治南川也(기분부이치남천야)。有襄城不煩之效(유양성불번지효)。而無膠東增占之詐(이무교동증점지사)。吏畏民懷(리외민회)。一境晏然(일경안연)。監司考課(감사고과)。每爲畿輔第一(매위기보제일)。我殿下特降綸綍(아전하특강륜발)。以褒奬之(이포장지)。就加峻資(취가준자)。章服一新(장복일신)。父老歡欣(부로환흔)。四方聳動(사방용동)。噫(희)。其爲勸不亦多乎哉(기위권불역다호재)。宣帝功賞之詔(선제공상지조)。章帝安靜之褒(장제안정지포)。不得專美於簡策(불득전미어간책)。而王劉之未純(이왕류지미순)。斯爲下風矣(사위하풍의)。君名有仁(군명유인)。字山叟(자산수)。益齋文忠公之遠胄也(익재문충공지원주야)。文忠之孫寶林(문충지손보림)。在前朝(재전조)。累典名郡(루전명군)。其政蹟去思(기정적거사)。至今照映人目(지금조영인목)。君之善於治民(군지선어치민)。蓋其家法云(개기가법운)。

 

출전 : 점필재 제2권 後 -이 이천을 칭찬한 유서의 후미에 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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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유민(流民)들을……왕성(王成)이고 : 왕성은 한 선제(漢宣帝) 때에 교동상(膠東相)으로 있었는데, 선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의 교동상 성(成)은 유민들을 위로하여 돌아오게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8만여 구(口)의 유민들을 스스로 점유하고 뛰어난 치효(治效)를 올렸으니, 성에게 관내후의 작을 내리노라.” 하였다.

 

그런데 미처 징용(徵用)되기 전에 왕성은 죽고, 그 후 승상 어사(丞相御史)를 시켜 지방관들에 대한 정령(政令)의 득실(得失)을 조사하게 한 결과, 혹자가 대답하기를, “전 교동상 왕성은 거짓으로 유민의 숫자를 증가시켜 현상(顯賞)을 입은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漢書 卷八十九》

 

[주2]

이민(吏民)들이……유방(劉方)이었다. : 유방은 후한 장제(章帝) 때 양성령(襄城令)으로 있었는데, 장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안정(安靜)한 관리(官吏)는 지성스럽고 부화(浮華)함이 없는 것이다. 양성령 유방 같은 사람은 이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사가 번거롭지 않다고 말들을 하니, 그가 비록 특별한 재능은 없다 할지라도 이 또한 좋은 관리인 것이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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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題李利川褒美諭書後

僕讀兩漢書。韙宣章二帝憂民之切也。其憂之也切。故其所以待字牧之良者。尤拳拳焉。勞來流民不怠。而賜爵關內侯者。膠東相王成也。吏民同謂不煩。而勤天子詔書者。襄城令劉方也。論者。雖以僞增八萬口而譙成。雖以無他異能而少方。然而二帝之用心。其仁藹如也。漢世循良之吏。蔚然輩出。豈非職此之由耶。百世之下。亦有其事焉。吾同年友雞林李君。淸勤人也。遭遇聖明。郞署侍從。皆所歷敭。其分符而治南川也。有襄城不煩之效。而無膠東增占之詐。吏畏民懷。一境晏然。監司考課。每爲畿輔第一。我殿下特降綸綍。以褒奬之。就加峻資。章服一新。父老歡欣。四方聳動。噫。其爲勸不亦多乎哉。宣帝功賞之詔。章帝安靜之褒。不得專美於簡策。而王劉之未純。斯爲下風矣。君名有仁。字山叟。益齋文忠公之遠胄也。文忠之孫寶林。在前朝。累典名郡。其政蹟去思。至今照映人目。君之善於治民。盖其家法云。  <끝>